주장하고 내세우면 무아(無我)가 아니다. / 대원 큰스님
무아(無我)라는 걸 어떻게 깨닫느냐가 중요한데,
무아(無我), 무주(無住), 무심(無心), 이것이 서로 다 통하는 말이다.
33조사(라후라다, 승가난제 등)가 법을 주고받은 데서는
무아(無我)라고 말로 표현을 했다.
거기서 이분들은 모든 것이 해결이 돼서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
이 부분을 중국에 와서는 간화선으로 발돋움을 했다.
여기에서 내가 바로 볼 수 있는 눈(正眼)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보고 바로 보는 계합이 안 되면 여기서 이분들이 말씀하신
道에 대해서는 미몽견제(未夢見在)라 꿈에도 보지 못하게 된다.
'무아'라고 하는 걸 책자에도 더러 설명을 해놨지만,
그것은 무아에 대한 걸 바로 다 해놓은 게 아니다.
천분의 일도 밖으로 다 해놓지 못한 거다.
설명해놓은 그거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진짜 무아에 대한 걸 중국에 와서는 간화선으로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화두를 가지고 깨달아서 그렇게 계합이 되는 것이다.
본인이 참구하는 본참 공안의 화두가 박살이 나지 않으면
무아에 계합이 안 된다.
'무아'라는 게 그리 쉽게 여러분이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도에서 힌두교라고 하는 게 아트만 사상인데,
아트만에서는 절대적인 뭔가 하나가 있다. 라고 했다.
그걸 힌두교 성자들(라마나 마하리쉬 등)이 진아(眞我)라고 했다.
그것이 절대자이고, 그것이 우주 만유를 다 창조했고
만물 속에 그게 다 들어있다 한다.
여기의 무아는 다른 거다. 어떻게 보면 ‘진여자성이 있다’
이러면 아트만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근데 그게 아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절대 나라고 하는 그런 건 없다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무아(無我)라고 한 거다.
절대 무엇 하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조사스님들은 '아주 없다'라고 하면
단멸(斷滅), 단견(斷見)에 떨어질 수 있는 문제를 간화선을 통해서 해결했다.
[대중1] 있다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없다 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없다' 이러면 단견이 되잖아요.
[대중2] 그렇지 않습니다.
무아라고 해서 단견에 떨어진 그 무아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건 범부의 생각이지, 깨달은 이는 절대 그런 도리가 없습니다.
[스님] 그러니까, ‘깨달은 데는 그런 게 없다’
이러면 자꾸 없다 하는데 떨어진다 이거라. 허허.
[대중2] 그런 상을 내지 않습니다.
[스님] 그렇게 안 낸다 안 낸다, 안 낸다는 걸
본인이 자꾸 그렇게 주장한다 이거거든. 주장이 되는 거여.
[대중3] 무아라는 건,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데,
부처님은 우주의 공한 성품을 보셨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신 겁니다.
[스님] 공한 성품이라고 하면 그것도 공(空)이 있다는 아(我)가 되는 거다.
[대중3] 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있다 해도 맞고, 없다고 해도 맞는 것입니다.
[스님] 그런 이론적인 주장, 바로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인정이 안 돼요. 어쨌든지 주장이니까.
주장을 하고 내세우잖아. 그렇지?
주장을 하고 내세우면 틀렸다 이거라. 거리가 멀다 이거라.
[대중4] 제가 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중에 누구라도 지금 어른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깨닫는 분이
나오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이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은 항상 그 대상을 쫓아다닙니다.
잡을 수 없는 존재,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이냐 라는 그 노파의 질문에 올가미가 걸려서
끝끝내 그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존재를 볼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 그것도 그리 되면 주장이지. 본인이 주장을 만들었지.
올가미를 만들어서 스스로 걸려드는 거야.
전에도 항상 말씀드렸지만, 남악회양 선사가 마조 선사에게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되느냐, 수레를 때려야 되느냐?”
이랬을 때 마조 스님은 깨달았다는 것이다.
만약 거기서 마조가 "소를 때려야 되지요." 이랬더라면
남악 스님이 "아직 너는 공부가 익지 않았구나!"
하고 전법을 안 해줬을 것이다.
내가 어떤 선지식이라고 하는 조실에게 물어보았다.
"소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하느냐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까,
"그거야 당연히 소를 때려야 되지 않겠는가?" 이러더라.
그래서 "스님께서는 본인만 눈이 멀면 다행인데,
많은 사람까지 눈을 멀게 하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육조 스님이 도명에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것이 너의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이겠느냐?" 하는 데서 도명이 깨달았다.
거기서 '이런 겁니다' 대답하고 손을 들거나
그런 게 없고 깨달았다. 깨달았는데, 뭘 깨달았느냐는 것이다.
가나제바 존자(15조)의 전법게의 ‘마침도 없고 시작도 없다(無終亦無始)’
이런 것을 중국의 조사들이 간화선으로 발돋움시켜서,
“마침도 없고 시작도 없는 그때를 당해서는 어떠하냐?”
이런 문답을 전개하였다.
('22.9.18 학산 대원 큰스님 소참)
출처 :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