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0:11~15)
'바다가 사망한 자를 버리고 죽음과 음부가 죽은자를 버렸다.
각자가 자신이 행한 일에 따라 심판 받았다.
죽음과 음부도 불의 호수(the lake of fire)로 던져졌다.
불의 호수는 2번째 죽음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으면, 죽음의 호수로 던져질 것이다.'
(13~15절)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돌아왔다.
성탄절 기간동안 묵상집이 복음서를
인용했었다.
예수님의 탄생이 복음의 시작이라면,
요한계시록은 그 끝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제시한 본문처럼 심판의 내용이 계속된다.
모든 이가 심판대에 선다.
각 사람의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은밀하고도 내밀한, 영원히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낱낱히 드러난다. 사람의 눈을 속여 왔지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워낙 비판받아 마땅한 세력들이 국가 공동체에 있어서
심판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리기 쉬운데,
이것은 먼저 심각하게 나를 점검하는 일이다.
그 다음 공동체에 해악한 이, 세력들에게 적용한다.
옥씨부인전에서 받은 영감처럼,
용서든지, 따가운 경고든지, 아니면 징계든지
모든 것은 보복(응징)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을 위해서여야 한다.
결국 복음적 사랑 안에서 행해지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는 능지처참을 하고 싶은 사악한 가해자가 있지만
나의 감정과 다르게 전인격적으로
어떤 이들에게든지 그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행동만을 해야 한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설득이든지,
아니면 단호한 경고라든지,
매우 중한 징계를 부여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궁극적 목적이 상대방의 어그러짐을 조정하기 위한
'회복'의 과정이어야 한다.
내가 사형제도를 부인하고, 대신 사면 없는 종신형을 최고형으로
여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런 회복을 위한 끈질긴 여정도 한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심판'의 때이다.
끈질긴 노력, 복음적 사랑을 베풀어도
돌이키지 않는 영혼에게는 심판이라는 마지막 과정을 통해
'궁극적 거부'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궁극적 책임을 지게 된다.
그것은 그것을 선포하는 이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도저히 '천국'이라는 궁극적으로 선한 것, 곳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미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부여하고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단계로 이해한다.
<오늘의 명언>
죄인인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프랑스와 페늘롱-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자에게
'감동과 설득'의 끊임 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덧붙여 '하나님의 임재의식', '경외'를 통해
'겁'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겁도 없는 세력, 누군가,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나도.
"하나님! 도와 주세요. 이곳 저곳, 그리고 제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간절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