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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시편126편1~6절
제목 :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 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기쁨과 아직 돌아오지 못한 동포의 귀환을 바라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절대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모두에게 절대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에겐 꿈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치료가 있습니다. 용서가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만 가정의 문제가 새겨나지요. 몸이 갑자기 아프죠.
사업이 어려워지죠. 참, 말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들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어떤 문제도 우리가 뛰어 넘을 수가 있습니다. 왜?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기 때문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변하여 응답이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에게 잠시 질병이 다가와도 다시 건강의 회복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나아가면 정말 꿈꾸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기적들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 70년이 지나서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주십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야, 우리가 꿈을 꾸는 것 같구나. 꿈인가, 생시인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이와 같은 고백을 담은 감사의 시편입니다.
1. 절망 가운데서 구원하시 하나님(1~3절)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본문은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데,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는 표현이 당시의 기쁨을 생생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고백합니다(3절).
1)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꿈꾸는 것 같았다(1절)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 포로 귀환 사건은 예기치 못한 경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 일이 도래했을 때 맛보았던 기쁨은 엄청났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이 감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연상하면 어느 정도 이해될 것입니다.
먼저 절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이 지난 다음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풀려나게 되니까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이고, 아픈 것을 보니까 꿈은 아닌 것 같으네.” 정말 꿈꾸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택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삼아주시고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시대가 열려서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두 번째 왕이 다윗이고, 세 번째 왕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를 솔로몬 시대의 말기에 계속 왕으로 시작해서 그 왕의 부인들이 우상을 앞서 섬기게 되었고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게 되니까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와서 주전 922년에 나라가 반쪽이 됩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 수도가 사마리아이고요.
남 왕국은 유다이고 수도가 예루살렘입니다.
주전 922년에 남북으로 나뉘게 되고,
우리 대한민국이 남북으로 나뉜 것처럼 비슷하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서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요.
남 왕국 유다는 다시 그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바벨론에 의해서
605년부터 포로로 끌려가기 시작해서 1차, 2차, 3차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 주전 586년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민족의 포로가 되어서 그곳에 가서 노예생활을 하니
말로다 그 고통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귀족들, 왕족들, 배운 사람들을 다 끌어갔습니다.
그러니 한 번도 막노동을 해보지 않다가 와서 노예생활을 하니 그 고통,
그 비참한 현실을 말로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무려 칠십 년입니다.
완전히 그들은 불에 타 꺼져 남은 재처럼 마음에 꿈과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았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이 바벨론이
파사, 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포로로 끌려왔던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가도 좋다.’ 칙령을 내린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꿈꾸는 것 같은 일이었습니다.
주전 538년에 포로 귀환을 명하고 다음해에 저들이 1차, 2차, 3차에 나눠서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됩니다.
시편 14편 7절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데 시온으로 돌아가는 것이 저들의 꿈입니다.
그들이 눈물로 탄식하며 “주여,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우상숭배하였나이다. 주님, 우리를 저 시온으로, 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너희들은 이제 너희 나라로 돌아가도 좋다.”
70년 만에 이와 같은 꿈꾸는 일이 나타난 겁니다.
우리나라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 외교적으로 주권을 빼앗기고, 1910년에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9년이 지나서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완전히 일본군국주의 앞에 우리는 꿈과 희망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되었습니다.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어났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미주리호 함상에 의해서 항복서에 사인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해방되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와서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는데 우리가 준비되어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것처럼 갑자기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와 같은 꿈꾸는 것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고 주님께 부르짖고, 부르짖고,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기적적으로 해결 되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여러 가지 해결할 수 없는 산적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 가로놓였을 때,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어느 날 어느 때에 갑자기 주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입에는 웃음이 혀에는 찬양이 넘치고 우리는 기쁘다(2~3절)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웃음이 가득하고 - 완전한 행복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욥 8:21).
뭇 나라 중에서 말하기를 - 열방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대적 혹은 이스라엘을 섬기는 하나님께 대한 회의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79:10; 115:2).
그러나 이 경우 그들 역시 이스라엘 회복에 큰 감동을 받았고 따라서 그 입을 모아 포로 귀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을 삼자 적 입장에서 증거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98:2; 사 52:10; 겔 36:36).
“야, 저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저들을 해방을 시켜주었구나.”
너무나 기뻐서 그 기쁜 감사를 어떻게 표현할 줄 모를 정도로 큰 기쁨이 저들에게 충만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70년을 포로생활을 합니다.
젊을 때 끌려 왔던 분들이 다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고 어린아이들이 80세의 영감님이 되어서 있을 그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갑자기 해방을 시켜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라말도 잊어버리고 그 나라 문화에 빠져서 그냥 영원히 민족혼이 말살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갑자기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믿고 구하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게 이와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를 불쌍히 보시고 주의 기적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희망이요.
환경과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절망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을 뛰어 넘어서 절대 희망되신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고 나아갈 때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박진식 시인이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7살 때부터 희귀병에 걸렸는데요. 병 이름도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 이란 병이에요.
그 몸에 칼슘이 과다로 분비되어가지고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져 가는 겁니다.
9살 때부터 누워서 지내고요. 13살 때에는 이 몸에서 이 석회질이 나와 갖고 체내에 욕창으로 막 몸이 붓고 살갗을 뚫고 나와서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되는 그런 병입니다.
25살 때에는 석회화 되는 것이 폐와 심장까지 계속 확대되어서 몸 30%가 완전히 굳어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절망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절대 왕 되신 예수님을 붙들었어요.
그래서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두 손에 볼펜을 끼워서 컴퓨터를 두들기면서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절망의 아픔은 또 다른 희망이라고 고백하며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고백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가면입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즐거운 천연색 날실뿐만 아니라 고난의 검은색 씨실도 필요합니다. 검은색 실도 있어야 아름다운 비단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절망을 거부하며 삶을 긍정하면 승리의 길은 열립니다. 절망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공간이고 ‘나’ 자신을 찾는 시간입니다.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의 의지를 불러줍니다.
제가 고통의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더라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떠올리면 나의 아픔은 더 이상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라고 미소 짓습니다.
몸은 잔인한 고통으로 뒤덮였지만 꿈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행복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절망 중에 감사하세요. 슬픔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세요.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우리 삶 가운데 큰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2.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4절)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남방은 팔레스타인 사막지역으로서 항상 건조하므로 비를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4절은 여호와께서 비를 내리셔서 남방의 사막을 옥토가 되게 하듯이, 이스라엘의 남은 포로를 돌려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케 해 달라는 기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포로 상태로부터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표현으로 보아 아직 포로 귀환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이 시편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포로 귀환의 감격을 그렸던 사실(1절)을 미루어 보아 포로 귀환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라는 사실도 동시에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제 기자는 일전에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순간에 남은 포로 백성들을 귀환시켜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바벨론 포로귀환이 그 칙령을 발표한 이후에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약 5만 명이나 되는 많은 포로들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70년 동안 살다보니까 그 자녀들이 그곳에 다 머물러 있는 자녀들이 많았고, 꿈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마음이 남방시내처럼 되었습니다.
남방시내는 그 팔레스타인 남쪽의 네게브 지역을 말하는데 일 년 내내 마른 시내로 있다가 우기 때만 되면 그곳에 물이 넘쳐흐릅니다.
그들이 마른 시내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들 마음에 꿈이 사라졌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메마른 광야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셔서,
그들 마음에 꿈과 희망이 다시 생겨나게 하여 주시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여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옵소서.
은혜의 단비가 내리면 죽음의 땅이었던 그 땅이 살아나고 꽃이 피는 아름다운 옥토로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영혼이 메마른 시내처럼 되었습니다.
한때 은혜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눈물 흘릴 때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신앙이 형식적이 되었습니다. 습관적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바쁘다보니까 너무나 세상일에 지치다 보니까
우리의 심령이 메마른 심령처럼 되었습니다.
예배를 오긴 와야 되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감격이 없어졌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앉아서 형식적인 찬양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이와 같이 메마른 심령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치료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사랑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평안함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감사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그 단비가 강줄기를 이루어 죽어가는 심령들이 다시 소생하게 하여주옵소서. 다시 살아나게 하여주옵소서. 주여,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
우리를 모든 절망 가운데서 건져주시옵소서.
해방 전에 북한에 3천 5백 개의 교회가 있었고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려 졌습니다.
그런데 1945년 해방이후 북한을 소련 공산군이 점령해서 북한이 공산화되고 난 다음 지금까지 68년 동안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많은 믿는 백성들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3천 5백 교회가 다 사라지고 평양에 봉수교회, 칠골교회 둘만 남아있는데요. 이 봉수교회도 매주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임명진 목사님이 몇 달 전에 북한 갔다 와서 말씀하시는데 주일날 교회가자고 하니까 “동무, 오늘은 손님이 없어서 문 닫았시오.” 그래가지고 예배를 못 드렸다는 거예요. 손님이 많이 와야 문을 열고 손님이 많이 없으면 문을 닫는 그 교회가 그냥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보여주는 교회로 북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하교회에서 많은 백성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여, 저 메마른 북한 땅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구원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옵소서. 복음의 단비가 내리게 하여주셔서 구원의 강물이, 은혜의 강물이, 치료의 강물이 넘쳐나게 하여주옵소서.” 할렐루야.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3. 영광스련 미래를 예비하시는 하나님(5~6절)
5,6절에서도 눈물로 씨를 뿌린 자가 기쁨으로 거두듯이 이스라엘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 씨를 뿌리는 때는 고통과 근심의 때이나 씨를 뿌린 자는 추수 때의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포로민들은 많은 시련을 당하였으나 그들 앞에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고, 고통, 압제 및 낙심, 기다림의 때를
믿음으로 극복하는 자는 결코 그 상급을 잃지 않습니다.
눈물 흘림은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씨뿌림과 거둠 사이의 대비는 학 2:3-9, 17-19을 참조하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할로크 옐레크 우바코 노세메쉐트 하자라)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씨주머니를 들고 울면서 나가는 자'입니다.
우선 '할로크 옐레크'는 이중 부정사인데 이것은 어떤 동작의 계속됨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할로크 엘레크', 즉 '울면서 간다'는 것은 단회적인 동작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동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이중 부정사를 의미의 강조로 보아서 '울지 않고는 그의 발걸음을 옮겨 놓지 않는 자'라고 강하게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한편, '노세 메쉐크 하자라'(그의 씨주머니를 들고)는 구체적으로 곡식 종자창고에서 종자를 덜어내어 자루에 담고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하는 구절입니다(암 9:13).
정리하면 본 구절은 '그 일이 너무 단조로우면서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씨종자를 덜어내 와서 밭에 뿌리는 자'를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눈물로 씨앗을 뿌린 70년 동안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를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이 문제를 만났을 때, 어려움 당했을 때, 몸에 질병이 다가왔을 때,
가정에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주여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들이 강가에 나가서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시편 137편 1절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이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아무도 깊은 밤에 혼자 침대에서 소파에 앉아서 흘리는 눈물을 보지 못하고 닦아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깜깜한 밤에 여러분이 혼자 외롭고 아프고 쓸쓸해서 병상에서 집 한구석에서 사람들, 가족들 모르게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그 눈물을 주님이 보시고 닦아주십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혼자라고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병상에 누워있는 몸이 아픈 성도님들, 병상에서 너무나 외롭다고
눈물만 흘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그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아프고 외로울 때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과 외로움을 몰라도 주님이 아십니다.
걱정하지마세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눈물로 뿌린 그 씨앗이 기쁨으로 은혜로 축복으로 기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눈물로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그만큼 희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시간을 드려야 되고 노력을 해야 되고 정성을 쏟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예루살렘 성이 다 무너지고 땅은 황폐해졌는데 다시 그 성을 재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밭을 다시 일구고 손에 손을 마주잡고 힘을 모아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여러분, 힘들어도 어려워도 믿음으로 전진해 가십시오.
성실과 근면으로 여러분 앞에 있는 모든 일이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주님의 기적을 사모하며 전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달란트의 비유가 있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맡깁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가진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갑절로 남겼을 때 21절과 23절에 그들에게 칭찬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여러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서 이와 같이 칭찬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임금이 백성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학자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책에 담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학자들의 모든 지식을 담아내니 책으로 12권이나 되었습니다.
임금은 “책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다 읽을 수 없으니 줄이라”고 명했습니다. 결국 줄이고 줄여 1권을 만들었지만 왕은 다시 “한마디로 줄이라”고 했습니다. 고민 끝에 학자들이 결정한 최고의 세상 이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습니다.같은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바로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나오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조차 심지 않고는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이치는 우리 생활 가운데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교 1등을 하기 위해 하루에 5분만 공부하는 이는 없습니다.
남이 먹고, 잘 때도 공부해야 합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려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 훈련해야 합니다.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심지 않고 거두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오늘 당신은 무엇을 심으셨습니까.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시편 126편 5절을 기억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토저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성경은 눈물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눈물 앞에 최고의 보물을 내놓는다”. 우리가 말씀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면 기적과 축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고 하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의 씨앗을 심어야 됩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어야 됩니다.
사랑의 씨앗을 심어야 됩니다.
용서의 씨앗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실과 근면의 씨앗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다시 재건해서 함께 모였을 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느헤미아 12장 43절에,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주여, 이 기쁨이, 이 은혜가, 이 감사가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로마서 5장 3절로 4절 말씀을 기억합니다.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 같은 우리 마음에 은혜의 단비를 흘려주셔서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변화 받고, 치료받고, 용서 받고, 새 힘을 얻어 모든 문제와 어려움과 싸워 승리하고 위대한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눈물로 씨앗을 심으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성실과 인내함으로 믿음으로 심으면,
하나님의 때에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뒤로 물러가지 마세요.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믿음의 전진 또 전진을 해서 하나님의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어떠한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만나도 꿈꾸는 것 같은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절대희망되신 주님 안에서 감사하며 영광 돌리며 나아가는 믿음의 식구들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다시는 우리 입술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 탓하고, 부정적인 애기를 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