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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이 문 열
봄은 눈뜸과 피어남과 움직임의 계절이다. 또 봄은 떠나는 이와 떠나야 할 이, 그리고 이미 떠나 떠돌고 있는 이들의 계절이기도 하다. 대지의 따스한 숨결은 겨울의 추위로 굳고 잠들어 있던 것들을 깨우고, 쉼 없는 봄바람은 끌듯 밀듯 사람의 넋을 길 위로 내몬다.
산속 깊은 곳 오두막에서 한겨울 늙고 지친 몸을 쉬었던 시인에게도 봄은 그랬다. 지난해 가을 늦게 시인은 큰 짐승을 쫓는 사냥꾼들이나 심마니 또는 이런저런 까닭으로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이들이 얽어 놓은 오두막에 해진 삿갓과 나날이 무거워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길고 매서운 겨울 추위로부터 비껴 앉았다. 바람 없고 볕 좋은 골짜기 덤불 속에서 작은 깃을 오그리고 있는 멧새처럼, 또는 깊고 어두운 바위 굴에서 혼곤한 겨울잠에 빠져 든 곰처럼. 그러다가 소리 없이 다가온 봄과 더불어 그 긴 잠과 같은 멈춤에서. 어지럽고 스산하던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을 스멀스멀 간질여 오는 듯한 봄기운에 끌리어 시인이 오두막을 나서 보니 먼 산자락까지 두텁게 쌓여 있던 눈은 봉우리 끝으로 밀려가고,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계곡에는 눈 녹은 물이 졸졸 소리 내어 흘렀다. 내려다보이는 들판은 벌써 기분 좋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양지바른 둔덕을 덮고 있는 참꽃의 꽃망울도 어느새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바람도 많이 데워져 낡은 무명 핫옷이면 처마 밑에서도 밤을 지새울 만했다. 같은 나무 그늘 아래 사흘을 머물지 않는다던 어느 운수(雲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인이 그 어둡고 퀴퀴한 오두막에 더 틀어박혀 있어야 할 까닭은 없었다.
시인은 그날로 괴나리봇짐을 꾸려 오두막을 나섰다. 이 세상에서의 날들이 이젠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한 예감이 그 봄의 시인을 바쁘게 내몰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인에게는 봄 꽃 여름 구름이, 가을 물 겨울 눈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경들조차도 허망하게 스러져 가는 노을처럼 안타깝고 애달프게 느껴졌다.
그사이 시인은 더욱 늙어 있었다. 스스로 시가 되고 시를 사는 동안에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나고 늙고 죽는 자연의 일부인 그의 몸도 그 세월을 따라 시들어 갔다. 이제 시인은 솔밭에 서면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늙고 구부러진 소나무 같았고, 바위 언덕을 오르면 바위 중에서도 가장 오래 풍상을 겪어 푸슬푸슬하고 이끼낀 바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몸처럼 또한 자연의 일부인 시인의 마음은 그 봄과 함께 새로이 피어나고 있었다. 삭아 가는 굴참나무 등걸에서 새 움이 돋듯이, 늙은 사슴이 묵은 털을 벗듯이, 또는 아직은 메마른 산봉우리 위로 힘차게 피어오르는 봄 구름처럼. 그리하여― 아직 가 보지 못한 땅과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에 다시 가슴 두근거리며 시인은 늙은 발길을 재촉했다.
시인이 자연과 인간 사이를 넘나들며 걷는 동안에 봄은 점점 짙어 갔다. 들풀들이 파릇한 싹을 틔워 내고 산꽃들도 하나둘 망울을 터뜨렸다. 들짐승도 산새도 저마다의 소리와 빛과 냄새로 짝을 부르고 있었다. 시인은 조금씩 그런 봄에 취해 가며 급한 부름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멈출 줄 모르는 떠돌이의 넋에 시든 몸을 맡겼다. 그러다가 어느 이름 모를 영마루에서 발아래 골짜기의 작은 마을을 저만치 굽어보고 있을 무렵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마을의 복숭아나무들은 불타는 구름 같은 복사꽃을 둘러쓰고, 하이얀 배꽃은 윤삼월에 때아닌 눈꽃을 동구가 자옥하게 뿌려 댔다. 마침 한나절이라 몇 줄기 점심 짓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마을의 초가집들이 야트막한 언덕 위에 모여 한 폭의 아늑한 그림 같았다. 그리고 그 언덕 발치에는 가까운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차고 맑은 물이 한 줄기 쪽빛 띠처럼 감아 돌고 있었다. 일생을 떠돌며 이 땅 구석구석에서 흔하게 보아 왔지만 그날따라 시인에게는 그런 정경들이 너무 정겹고 아름다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시인은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으로 한동안 그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시인의 두 눈을 찔러 오듯 다가드는 정경이 하나 있었다. 마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호젓한 골짜기 어귀의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였다. 무엇이 이끌어 낸 힘일까. 먼빛으로나마 여인의 자태가 비치자 그 무렵 들어 스스로 느낄 만큼 침침해 오던 시인의 눈은 갑자기 높이 뜬 솔개의 눈처럼 밝고 맑아졌다.
시인이 그런 눈으로 찬찬히 보니, 처음에는 그저 빨래 나온 산골 마을 아낙쯤으로 여겼던 여인은 뜻밖에도 댕기 머리 처녀였다. 시인이 그녀의 등 뒤로 길게 드리운 댕기 며리를 알아본 순간 갑자기 그녀 주위를 무슨 환한 빛 무리 같은 것이 감싸는 듯했다. 아직 멀어 얼굴 생김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맑은 개울물 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그녀는 아련한 자태만으로도 그 개울가 골짜기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그 어떤 봄꽃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 처녀가 있는 골짜기 개울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름다움은 시인이 한살이〔生〕 내내 얻고자 뒤쫓은 것들 가운데서도 으뜸이었다. 그렇게 고달프고 어렵게 떠돌면서도 손 뻗으면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시인이 그대로 지나친 적은 없었는데, 여인의 아름다움이 특히 그랬다. 젊은 날 시인은 그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빠져듦을,
먼 하늘 떠가는 기러기 물 따라 날기 쉽고
푸른 산 지나는 나비 꽃 피하기 어렵네.
라고 읊어,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런 양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詩) 에서 둘러댄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은 언제나 스스로 다가갔고, 때로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낯 뜨겁고 위태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늙음과 더불어 여인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은 조금씩 시들해 갔는데, 그날따라 그 아름다움은 젊은 시절의 그 어느 날보다 더 강렬하고 신선한 매혹으로 시인을 이끌었다.
느닷없는 정염(情炎)으로 후끈 달아오른 시인은 처음부터 그녀를 바라 길을 떠난 사람처럼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를 앞으로 내몰듯 하는 정염에 감응한 것일까, 시인의 모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르게 바뀌어 갔다. 눈에 띄게 휘어져 가고 있던 허리는 꼿꼿이 펴지고 비척이던 두 다리와 끌듯하던 발걸음도 반듯하고 사뿐해졌다. 푸슬푸슬 세어 가던 머리칼이 젊은 구령말의 갈기처럼 힘차게 너풀거리는가 하면, 숱 많지 못한 수염이며 희끗한 눈썹까지 거뭇해지는 듯했다. 나중에는 풍우친 정자 기둥처럼 삭아 가던 시인의 피부마저도 은은한 윤기를 머금으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시인이 홀린 듯 다가가고 있는 그 처녀는 마을 끝 골짜기 안에 따로 떨어져 사는 산지기네 외딸이었다. 그날 늙은 산지기는 머잖아 시작될 농사철에 쓰일 호미와 낫을 벼리러 몇 십 리 밖 장터로 나가고, 그 아낙은 고사리를 꺾으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혼기를 한참 넘긴 스물세 살 외딸만 남아 눈 어둡고 가는 귀 먹은 할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자니 활짝 핀 봄날이 그녀를 가만히 버려두지 않았다.
먼저 흩뿌리는 꽃비가 산지기네 처녀를 마당으로 불러내고, 다시 영마루 위로 높이 솟는 뭉게구름이 그녀를 사립 밖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훨씬 가까워진 듯한 앞산 두견이 울음소리며 여럿이 엉켜 알싸하기까지 한 봄꽃 향기가 모두 그녀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가난하고 지체 낮아 이팔청춘도 일곱 해나 넘긴 데다, 그 봄에는 재취 자리 권하는 방물장수 할멈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더욱 세차게 그녀를 몰아댔고, 끝내 견디지 못한 그녀는 빨래를 핑계 삼아 멀리 재넘이 길이 보이는 개울가로 나와 앉은 참이었다.
빨랫감을 물에 담그며 가만히 돌아보니 봄은 사방으로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산기슭 집 앞에 환한 복사꽃 돌배꽃부터 응달진 골짜기의 늦은 참꽃과 산수유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녀의 다치기 쉬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맑은 물을 따라 어지럽게 떠내려 오는 갖가지 빛깔의 꽃잎들도 하나같이 그녀의 가슴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퀴어 대는 듯했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난데없이 초여름 흐드러진 밤꽃에서와 같은 야릇한 향내를 풍기며 그녀를 메스껍게 했다.
하지만 오래잖아 처녀의 마음도 곧 그녀를 에워싼 봄 속에서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시집 못 가고 나이만 먹어 가는 시름과 외로움은 봄눈 녹은 맑은 물에 씻겨 가고, 처녀다운 기다림과 설렘이 되살아났다. 미명귀(未命鬼)도 못 돼 손각시 (손말명)로 호젓한 길가에 눕게 될지 모른다는 슬픔과 두려움도 곧 오래 묵어 폭 익은 다감함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이 봄에는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밤마다 꿈꾸며 기다려 온 그 님이 올지도 몰라.
그러자 새로워진 마음을 따라 처녀의 모습도 달라졌다. 개울을 덮듯 떠내려가는 복사꽃잎 고운 빛깔이 두 볼에 어리면서 원래도 밉상스럽지는 않던 그녀의 얼굴은 그 어떤 봄꽃보다 환하게 피어났다. 잡곡밥과 산나물로 기른 그녀의 몸도 봄비에 씻긴 자작나무 줄기처럼 미끈해졌고, 해진 무명 치마저고리로 감싼 그 속살은 금세 터질 함박꽃 망울처럼 희게 부풀어 올랐다. 시인이 멀리서 알아본 것은 바로 그렇게 피어난 그녀였다.
처녀도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시인을 진작부터 알아보았다. 멀리 대처로 넘어가는 길목 영마루에 시인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녀의 젊고 밝은 눈은 벌써 그 늙음까지 가늠했다.
‘나이보다 훨씬 많이 늙고 시든 나그네가 일찍도 길을 떠나 이 깊은 산골까지 왔구나’
무심한 눈길의 그녀에게는 처음 시인은 그렇게만 보였다. 그런데 그 나그네가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녀의 느낌은 달라졌다.
‘영마루에서 보면 빤히 보이는 곳이지만 이리로 접어들면 20리는 더 길을 돌게 되는데, 무슨 일일까. 주막은 재 너머에 있고, 우리 집에는 찾아올 손님도 없는데…….’
처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살피는 동안에 나그네의 모습은 점점 변해 갔다. 기이하게도 그녀가 먼저 느낀 것은 멀리서부터 쏘아져 나오는 듯한 나그네의 눈빛이었다.
‘나이는 들어도 눈빛만은 맑고 힘찬 분이로구나.’
이어 나그네의 걸음걸이가 처음 그를 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을 의심하게 했다.
‘멀리서 보기보다는 젊은 분인지도 몰라. 힘차고 가뿐한 걸음걸이가 마치 산등성이를 차고 오르는 수노루 같구나.’
그러는 사이에도 나그네는 빠르게 다가왔고 처녀는 차츰 혼란스러워져 갔다.
‘내가 잘못 보았어. 그렇게 나이 든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아래 배미 위토(位土)의 주인 되시는 재 너머 마을 새서방님이 한식 성묘라도 오신 걸까. 아냐. 저것 보아. 멀리서도 저리 얼굴이 환해 뵈고 근골이 번듯한 게 아직 장가들지 않은 도련님 같아. 책을 지고 스승을 찾아 멀리 길을 나서시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이른 과거(科擧)라도 보러 가시는 길일까. 그렇게 저렇게 여기를 지나시다 ― 들메끈이라도 끊어지신 게지.’
그러다가 저만치 나그네가 다가오자 처녀는 갑자기 화톳불이라도 쬔 듯 달아오르는 두 볼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부터 붉혔다. 뚜렷하게 알아볼 만큼 가까이 이른 나그네의 얼굴은 그녀가 열두엇 소녀 때부터 밤마다 애태우며 꿈꾸어 온 그 님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그네의 얼굴에 눈길을 보내기도 잠깐, 그녀는 소스라치듯 굳어지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차마 뜬눈으로 나그네를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속으로만 그가 바로 그토록 기다려 온 그 님이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오래잖아 처녀의 뜨거운 바람은 믿음으로 바뀌고 나그네는 어김없이 그녀가 기다렸던 그 님이 되었다. 그녀는 그토록 늦어서야 자신에게 이른 그 님이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제나마 찾아온 것이 가슴 터질 듯 기뻤다. 다시 눈을 뜨고 안길 듯 그 님에게로 다가가려는데 문득 나그네의 추레하고 군색해 보이는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자신을 찾아오는 동안의 길고 고달픈 헤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해, 그녀는 다시 벅차 오면서도 미어질 듯한 가슴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안았다.
그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환과 뒤엉킴은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던 처녀의 아름다움에 전과 다른 풍정(風情)을 더했다. 그믐밤의 별빛 같은 처녀의 눈동자에는 마주 보기조차 가슴 저린 애련함이 어렸다. 미끈한 허리와 무명 저고리 안에서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에서는 까닭 모르게 처연한 떨림까지 느껴졌다.
그때쯤은 시인도 늙은 그를 단숨에 그곳으로 내몬 느닷없는 충동에서 퍼뜩 깨어났다. 취한 듯 어린 듯 이끌리어 오기는 했지만, 막상 호젓한 골짜기 물가에서 낯선 처녀와 눈길이 마주치게 되자 겸연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 겸연쩍음은 새롭고도 세찬 감동으로 갈음되었다. 풍성하고 다채롭던 젊은 날의 그 어떤 말로도 다 그려 낼 수 없을 듯한 그녀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이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한 떨기 피어 있다…….’
못 박히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시인은 소스라쳐 굳어 있는 처녀를 한참이나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눈길을 받은 처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정말로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청초하면서도 화사한 꽃송이가 다소곳이 수그리고 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더 눈부셔진 그녀의 아름다움이 문득 오래 잊고 지내 낯설어진 시인의 열정을 불 지폈다.
‘나는 너를 알 듯하다. 어쩌면 지난겨울 내 스산스러운 꿈속에서 그토록 나를 간절하게 불러 댄 것은 바로 너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봄 그토록 일찍 내가 길을 떠난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열일곱 소년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벼운 기침으로 감추며 탄식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오래 시(詩)로 갈고닦지 않아 밑감(원재료) 그대로 시인의 의식 밑바닥을 뒹굴던 말들이 급하게 다듬어지고 엮이어, 그 느닷없으면서도 세찬 홀림과 이끌림을 스스로 발명 (변명)해 나갔다.
‘네 아름다움은 내 시의 한 외경(外經)이었다. 일생 수다하게 들쳐 봐 왔지만 언제나 새롭고 낯설기만 하던 그 비전(秘傳). 구석구석 살피고 샅샅이 더듬어 보았으나 끝내 다 풀 수는 없었던 그 깊고 아득한 오의(奧義). 그래도 나는 네 살과 피의 따듯함과 부드러움과 아늑함을 기억하고, 그것들이 내 고단했던 살과 피에, 내 외로운 넋과 얼에 베푼 것들을 일생 감격하며 사랑해 왔다. 나는 네 속에 감추어진 모든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따스함과 푸근함과 달콤함과 짜릿함과 또 그 허망함을 안다. 특히 네 아름다움, 희거나 검거나 붉어서 아름다운 것들과 좁거나 가늘거나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그리고 길거나 넓거나 통통해서 아름다운 그 모든 것들을 이제는 늙어 쓸쓸해진 꿈속에서도 모두 그려 낼 수 있다. 그것들이 내 감각에 펼쳐 보이던 낙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고, 내 영혼에는 그것들에 대한 몰두와 탐닉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남아 있다. 복초(復初, 본성(本性) 대로 돌아감.)를 말하고 이치를 따지지 않으리라. 하늘에 솔개가 날고 못에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이[?飛魚躍, 자연의 이치대로] 이제 다시 한 번 네 아름다움 속에 내 몸과 마음을 풀어놓아 너와 나를 아울러 자유케 하고 싶구나. 너와 함께 시가 되고 싶구나.
어찌 보면 그런 시인의 정념은 말라죽어 가는 소나무가 더 많은 솔방울을 맺듯 느닷없고 하염없는 욕정 같은 것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질탕한 잔치가 끝나고 자리를 거두면서 그래도 미진하여 마지막으로 급하게 걸치는 한 잔의 궁색일 수도 있다. 즐거운 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저무는 길섶 한 군데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까지 꺾어 가는 각박함으로 볼 수도. 하지만 우리 시인에게는 아니다. 이미 시가 되고 시를 살고 있는 시인에게는 아니다.
그런 정념을 펼치려는 시인의 마음가짐도 젊어 모든 것이 설익은 시절의 그것이나 저잣거리 속된 한량들과는 달랐다. 복수를 앞둔 것 같은 다급함이며 가학(加虐)과도 같이 거친 다가듦은 식어 버린 피와 성숙해 간 시심(詩心)으로 진작 잦아들고 없었다. 틀림없이 우리의 삶은 불확실한 데가 많지만 여인과 한 번의 사랑을 나누기조차 불안할 만큼 다급하지는 않다. 그때 뺏는지 뺏기는지 모르게 주고받는 것도 모진 괴로움과 다름없이 진저리쳐지는 즐거움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거칠게 움켜야 할 까닭은 없었다.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다가들 때 곧잘 일던 죽음과 소멸의 예감이나 부질없는 소유와 독점의 망상에도 더는 부대끼지 않았다. 남녀가 몸을 섞는 일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는 우리 개체의 존재와 연관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내가 죽고 사라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자신을 본뜬 새로운 목숨을 싹 틔우기 위해서는 다른 씨앗이 날라 듦을 막아야 하지만, 남녀의 만남이 오직 그런 본뜸〔自己複製〕 만을 위한 것일 수만은 없다. 나비는 한 꽃에 머물지 않으며, 만남은 떠나고 헤어짐으로써 비로소 온전해짐을 시인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 번 빠르고도 놀라운 변용이 시인에게 일어났다 시드는 두 뺨 군데군데 피어나던 검버섯과 골 깊게 자리 잡아가던 주름이 어느새 말끔히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은은한 윤기를 머금으며 피어나던 살갗은 이제 막 관례(冠禮)를 치른 젊은이처럼 희고 맑아졌다. 그 볼에는 갈겨니의 혼인색(婚姻色)처럼이나 고운 홍조가 어리고 잿빛으로 메말라 가던 입술도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거기에다 이제는 가라말의 갈기보다 짙고 숱 많아진 머리칼이
어우러져 처녀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눈부신 그 님을 빚어냈다.
시인이 어떤 여인도 거부 봇 할 성징(性徵)을 휘황한 빛처럼 내뿜으며 한 발 더 다가들자 처녀에게도 똑같은 변용이 일어났다.
‘그래 저이야.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받아 온 기억 속의 내 님이야. 젖가슴에 멍울이 맺히기 시작하면서부터 밤마다 내가 그리워하던 그분이야. 까닭 모르게 내 몸을 달아오르게 하고 긴 밤 잠 못 이루고 뒤채게 하던 내 낭군. 저이와 만나는 것은 내 오랜 꿈이었고, 저 품에 안겨 저이와 하나가 되는 것은 내가 철들면서 줄곧 기다려 온 일이었어. 그런데 이제 오신 거야 드디어 내게 이르신 거야……'
시인의 추레한 차림에서 느낀 처연함도 잠시, 처녀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신 눈으로 시인을 바라보는 동안 그녀 모습도 빠르게 변해 갔다. 개울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봄꽃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던 그녀는 그사이 더욱 화려하고 요염하게 피어나 보는 이를 넋 빠지게 했다. 그녀가 걸친, 쑥물 치자 물 다 날아간 해진 무명 치마저고리도 어느새 수놓고 구슬 입힌 비단 활옷보다 더 호사스러워 보였다. 그 마음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이 되어 가슴에 더께 앉은 망설임을 털어 버리고 시인과 똑같은 바람을 품었다.
‘저이가 나를 안고자 하신다면 기꺼이 안기겠어. 저이가 내 안으로 들어오시겠다면 나는 서슴없이 나를 열어 받아들이겠어. 아니, 오히려 나야말로 저이와 하나가 되고 싶어. 몸과 마음 모두로 저이와 함께하고 싶어.’
이윽고 그렇게 알지 못할 조바심에 달떠 있는 처녀에게서는 사향 노루의 암컷에게서처럼 배릿한 향내 같은 것도 풍겼다.
시인이 가만히 처녀에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무언가 눈부신 빛 같은 것이 시인의 두 팔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처녀를 끌어당겼다. 그게 시였을까. 어쩌면 시였을 것이다. 거기에 끌린 듯 다가간 처녀가 시인의 품에 몸을 맡기고, 시인은 그녀를 안아 가까운 산수유 꽃그늘로 데려갔다. 그 둘레에는 향기 짙은 인동덩굴과 찔레떨기들이 두터운 담처럼 우거져 바람을 막고, 바닥에는 지난가을의 낙엽이 두텁게 싸여 폭신한 요처럼 덮여 있었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쓰러지듯 그 낙엽 위에 누웠다. 시인은 순결한 새의 깃털에 잘못 들어붙은 먼지나 짚 검불 같은 처녀의 거친 무명옷을 벗기고 이어 자신의 몸에서도 해묵어 흉측한 허물 같은 입성들을 떼어 냈다. 흐드러진 꽃그늘 아래 원래 하나였다 나뉜 두 몸이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합쳐지고…… 그리고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구름이 잘생긴 봉우리를 휘감았다 가는가 싶더니, 꽃사슴 한 쌍이 부끄럼 없이 어울렸다 나뉘어 갔다. 바람이 무심히 함박꽃 가지를 흔들어 그 향기를 흩어 놓고, 골짜기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함께 만나 흐르다 다시 갈라졌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죄 없는 만남과 헤어짐이 거기 있었으며 시인의 사랑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도 시였을까. 그래, 시였을 것이다. 틀림없이.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시인이었다. 시인은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벗어 내던진 자신의 낡고 해진 옷가지를 찾아 조용히 걸쳤다. 봄볕은 아직도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으나, 봄바람은 이미 열정이 식은 그의 늙은 몸이 벗은 채 오래 견뎌 내기에는 아직 쌀쌀하였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채운 것은 젊은 날 그토록 자주 그를 서글프게 하던 환락 뒤의 적막과는 달랐다. 세상 아름다운 꿈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꿈에 흠뻑 젖었다가 깨어난 이의 나른함과 포만
감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처녀도 바람에 쓸려 누웠던 풀처럼 일어나 그때껏 가린 것 없이 펼쳐져 있던 알몸을 깔고 있던 무명 치마로 가렸다. 물에 씻긴 조약돌이 부끄럼 없이 그 깨끗한 속살을 햇볕 아래 드러내듯, 자작나무가 그 희디흰 줄기를 무심히 바람에 내맡기듯, 시인에게 맡기고 있던 그녀의 보얀 속살이었다.
처녀가 처음 그 산수유 아래로 들 때처럼 온몸을 단정히 무명 치마저고리로 여미고 일어났을 때 어느새 떠날 채비를 마친 시인은 그림자처럼 조금씩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럴 때 해야 할 말이 있고 지어야 할 몸짓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멀어 가는 시인을 끝내 그냥 보냈다. 소리치거나 움직이면 허망하게 부서지고 흩어져 버릴 곱고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처녀가 다시 빨래터로 돌아간 것은 한 번 되돌아보는 법조차 없이 멀어지던 시인의 뒷모습이 마침내 영마루 너머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남은 빨래를 마치려고 차가운 계곡 물에 다시 손을 담갔을 때에야 비로소 깨어난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되새겨 보았다 화안하고 고운 봄꿈을 한바탕 꾸었다는 막연한 느낌뿐,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안하고 고운 봄꿈을 한바탕 꾸었다는 막연한 느낌뿐…….
재 너머 내리막길을 늙은 시인이 숨을 헐떡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팽팽하게 부풀었다 꺼진 욕망의 자리처럼 그의 살갗에는 전보다 한층 더 골 깊은 주름이 덮이고 불 꺼진 재처럼 식어 가는 몸은 갑자기 쇠잔해 걸음마저 비틀거렸다. 방금 그가 떠나온 것은 여인과 나눈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었지만, 기억을 거부하는 그의 의식에 남은 것은 그윽한 골짜기에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한 떨기 청초한 나리꽃의 영상뿐이었다.
그런데― 조잡한 민담(民譚)은 이들의 사랑에도 저희 속된 말을 집어넣었다. 민담은 이름 몰라도 좋을 그 산지기 딸에게 ‘간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때로 보아서는 혼기를 넘겨도 한참 넘긴 그 시골 아가씨의 다감함은 마을 사람들이 지어 준 ‘처녀 문장’이라는 별명을 귀띔해 넌지시 설명해 주려 한다. 그리하여 시를 하고 시를 살던 늙은 시인의 감흥이 그녀의 티 없는 갈망에 감응하여 연출된 그 연애시를 비속한 골계(滑稽)로 바꾸어 놓았다.
한바탕 흐드러진 정사를 치른 시인이 너무도 거리낌 없이, 그리고 익숙하게 자신을 받아들여 준 그 처녀의 행실을 의심하여,
수풀 짙은 어귀 접어들며
그윽하다 여겼으나,
골짜기 넓고 물 넉넉히 흐르니
반드시 먼저 지나간 사람 자취 있겠네.
라고 물음 삼아 던진 시를 그녀는 이렇게 받았다고 한다.
앞 골짜기 응달 눈은
봄이 오면 절로 녹아 흐르고
뒷동산 누런 가을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벌어진답니다.
(2008년)
* 「시인의 사랑」은 『시인』(민음사, 2008) 33장에 별재한 단편임.
2016년 12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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