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고!
참 형편없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딸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지난 월요일입니다.
주책없이 속에서 울컥 뭐가 올라왔습니다.
느닷없이 추풍령이 그리워집니다.
일 년에 한두 번 겪는 증세입니다.
가을이면 그랬는데 이번엔 철을 가리지 않고 울컥 했습니다.
추풍령! 어린 시절 살던 곳입니다.
바람도 쉬어 넘어간다는,
그 어느 겨울,
눈 펑펑 내리고 나무 가지가 부러졌던 기억이 생생한 곳입니다.
아버님에게 혼나고, 반항하느라고 저녁 밥 먹지 않고 자다가 배가 고파서, 고파도 너무 고파서 밤을 꼴딱 세웠던 추억이 새록거리는 곳입니다.
어머님은 아들 배가 고픈 걸 어떻게 아시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제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아들의 자존심을 살려 주시려고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디밀던 어머님의 따뜻한 손이 서러울 만큼 그리운 곳입니다.
배탈이 나서 밤새 화장실을 들랑거리다가 탈진해 버린 저를 엎고 들판을 뛰시던 어머님의 숨소리도 만지고 싶습니다. 왜 그게 그리도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월요일, 11시, 혼자서 차에 올랐습니다.
혼자서 톨게이트를 지났습니다.
오래된 모습이 역력한 경부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여기 저기 땜질을 해서 울렁거리는 곳이 많은 고속도로입니다.
영동을 지나고, 그리고 황간입니다.
‘아니? 혼자서 이게 무슨 짓이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전화가 옵니다. 영혼없는 대답을 하고 끊었습니다. 추풍령 톨게이트를 빠져 나갔습니다.
아! 배가 고팠습니다. 12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추풍령 할매집’간판이 확 들어옵니다.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누가 저를 알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문을 열었습니다.
유명한 집인가 사람들이 바글거렸습니다.
“일인분도 되나요?”
된답니다. 하이고, 저만 혼자입니다.
혼자 식당 밥 먹는 게 얼마나 벌쭘한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된장국도 맛있고 김치도 맛있고,
뱃 속에 거지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돼지갈비라고 두 쪽이 일인분이라는 데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습니다. 2인 분은 시켜야 한다네요. 아니 시골 음식값은 왜 이리 비싼 걸까요?
추풍령초등학교에 갔습니다.
아! 저쪽 교실에서 제가 공부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바로 앞에 구멍가게가 저희 집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추풍령을 서성거렸습니다.
정처 없는 바람처럼 말입니다.
추풍령 역이 깔끔합니다. 옛날 모습은 간데가 없습니다. 그 옛날, 아버님은 예전의 초라한 간이역을 보면서 자신을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아버님의‘역’이라는 시입니다.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
비가 오고 ……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한성기, 역)
그러다가 돌아왔습니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그날 저녁입니다.
아내는 회식이 있다고 하고, 딸 아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느닷없이 딸애가 묻습니다.
“아빠, 점심 뭐 드셨어요?”
“으응? 으으, 밥 먹었지.”
“어디서? 집에서?”
“으으응, 그렇지 뭐?”
아! 왜 그랬을까요?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혼자서 추풍령 다녀왔다,
거기서 혼자 벌쭘하게 점심 사 먹었다,
왜 말을 못했을까요? 아빠도 외로울 때가 있다,
그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었을까요?
60 넘은 남자에게도 감추고 싶은 게 남아 있는 걸까요? 딸 앞에서 말입니다.
언제나 그 놈의 울컥 올라오는 증세가 문제입니다.
부끄러움이 손등을 타고 올라옵니다.
개나리는 그것도 모르고 신이 났습니다.
필까 말까, 그래도 수줍은 철쭉이 괜찮습니다.
봄이니까 활짝 정신 차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