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가 일어나고 전두환이 집권한 80년대 초반 서울 극장가는 어떠했을까? 내 기억으로는 그해 <취권>과 <007 문레이커> 등이 극장가에서 관객을 끌어모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중1'이었던 나로서는 한국영화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이듬해 열린 19회 대종상에서는 어떤 영화가 상을 받았을까? Alternative Mov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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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양하 (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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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기록에 따르면 그해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가 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이대근), 여우주연상(정윤희), 촬영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미술상, 녹음상, 조명상,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참고로 그해 '최우수영화상'은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에게 돌아갔고, 아역 출신의 안성기가 군대 갔다와서 출연한 <바람불어 좋은날>로 신인상을 수상했었다.
별다른 뾰족한 오락수단이 없었던 한 시절 온 국민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영화는 6~70년대 영화의 황금기를 보낸 후 80년대 들어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범람으로 대변되는 쇠퇴기로 전락한다. 하지만 '유지인-장미희-정윤희'의 이른바 '트로이카 시대'가 도래되면서 한국영화의 명맥은 유지된 셈이다. 당시 한국영화제작자들은 '외화수입쿼터'가 보너스로 주어지는 문예영화 제작에도 열을 올렸었다.
이 영화는 적어도 그 당시 한국영화의 수준을 가름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될 만하다. 원작은 정비석 선생의 단편소설 <성황당>이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산골마을에서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 읍내에 내다 파는 무지렁뱅이 돌이와 순진한 야생 처녀 순이를 중심으로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줄거리
강원도 산골마을. 돌이는 어머니와 단 둘이 적적하게 살고 있다. 매일 산에서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 읍내에 내다 파는 돌이를 장가보내지 못한 것이 어머니의 한이다. 그런데 어느 날 12살 먹은 순이가 산에 허기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숯막으로 데려와 키운다. 순이는 남사당패인 엄마에게 떨어져서 그만 길을 잃은 것이었다. 순이가 무럭무럭 자라 돌이와 혼례를 치른다. 어느 날 멀리 평양으로 경성으로 전라도로 떠돌아다니던 친구 칠성이가 오랜만에 찾아온다. 칠성이는 순이에게 반한다. 게다가 산림주사인 김 주사도 순이에게 반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갖은 선물공세에도 끄떡없자 산림법 위반으로 돌이를 순사에게 고해 바친다. 그리고 김 주사는 순이를 겁탈하려하고 칠성이는 그런 김 주사를 절벽으로 던져버린다. 하지만 김주사는 살아서 돌이를 감옥에 보낸다. 칠성이는 순이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지만 순이는 결국 숯막에 돌아온다. 세월이 흐른 뒤 돌이가 출감하여 숯막에 오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칠성이. 칠성이는 "김 주사 놈이 순이를 덮쳤고 순이는 김 주사를 껴안고 숯막의 불길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전해준다. 돌이는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순이의 옥가락지를 찾아낸다.
◇ 정윤희, 매력적인 배우
최근 영상자료원에서는 정윤희 회고전을 열었다. 첫날 정윤희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군과 딸이 참석하였다. 이날 100여 석 규모의 영상자료원 시사실에는 50대 이상의 나이든 올드팬들이 정윤희의 영화에 쏙 빠졌었다. 사실 그 동안 극장가에서 버림받은 것이 '원로 영화인'들뿐만 아니라 이들 '원로 영화팬'이기도 하다. 초특급 롤러코스터같이 정신없는 요즘 영화에서 멀어져간 존재들이다. <뻐꾸기>에서 '물씬' 풍기는 정윤희의 매력은 정말 황홀하다. 1954년생. 그의 나이 스물 일곱에 찍은 이 영화는 그의 짧은 영화인생에서 최고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대형 스크린(영상자료원 시사실은 사실 대형 스크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좌석도 불편하고 앞사람 머리 때문에 화면 하단부는 포기해야만 할 정도이다!!!) 만나는 젊은 시절의 정윤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녀는 올해 이미 48살이다!!! (심은하도 곧 그렇게 나이 들겠지. 나라고 나이 들지 않을까 마는...)
산속 깊은 곳 개울물에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헤엄치고 목욕하는 장면은 요즘 보아도 숨막힐 것 같은 농염함이 묻어나온다. 게다가 당시 심의에 맞서 정진우 감독이 연출해낸 상투적인 카메라워킹이란 고답적이기면서도 애정이 간다. 남녀가 서로 껴안으면 다음 장면은 어김없이 황토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숯막이고, 정윤희가 미역이라도 감으면 냇가의 바위가 그렇게 성가시다!!! 산골소녀 순이에게 바랄 수 있는 천성적 순박함과 가릴 수 없는 관능성이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사실 정윤희의 그러한 매력은 당시 정윤희의 최대약점르로 지적되던 연기력의 부족, 발성의 문제까지 모두 커버하고도 남는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시절 그녀의 영화가 그렇게 인기 있었으리라.
◇ 옥가락지와 박하분의 유혹
깊은 산 속의 돌이와 순이의 원색적 사랑과 평온은 칠성이와 김 주사의 개입으로 갈등구조로 치닫는다. 칠성은 우정때문에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며 열정을 삭힐 뿐이지만, 김 주사는 자신의 권능적 지위를 이용해 순이를 차지하려한다. 돌이 따라 장에 나갔던 날, 순이는 40전 짜리 거울에 반하고 옥가락지에 미혹된다. 그리고 김 주사는 동동 구리무와 박하 분을 들고 선물공세를 펼친다. 하지만 순이는 그 위험한 치장과 유혹을 이겨내는 심성을 내놓는다.
◇ 성황당의 전설
정비석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토속적인 욕정과 그 해결은 가슴 저미는 사랑이다. 모시적삼 저고리 사이로 살폿 보일 것 같은 순이의 육감적인 몸매를 추스르게 하는 것은 타자의 등장이요, 그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것은 산림 주사라는 권력인 것이다. 오가며 성황당에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빌며 행복을 기원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감옥에서 나이 들어가고, 자신은 자신의 순정을 더럽힌 존재와 불꽃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성황당 나무는 여전히 울긋불긋 꾸며질 것이며 산속 뻐꾸기는 오늘밤에도 구슬피 울 것이다.
<뻐꾸기 는 밤에도 우는가>는 사실 문학적인 타이틀이다. 남사당패 혹은 무녀의 어린 딸 순이는 자다가 문득 눈을 떠보면 엄마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엄마는 그렇게 한밤에 몰래 빠져나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엄마는 뻐꾸기 소리만 나면 밖으로 나가는 것일까. 순이는 엄마처럼 뻐꾸기 소리가 나면 어딘 가로 갈까? 돌이가 순이의 옥가락지를 손에 쥐고는 절망에 사로잡혔을 때, 깊은 산속 울창한 숲의 적막을 깨는 것은 뻐꾸기 울음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