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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램시에 따르면, 한 가지 언어를 안다는 것은 당신이 그 원어민의 문화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 언어의 문화적 짐 덩어리를 들고 다니는 것이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이 언어로, 또는 저 언어로 말하려고 선택하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는 뜻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지적한 핵심은 귀중한 것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는 상당 부분 우리 삶의 경험적 직조물의 일부분이게 마련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몇 가지 언어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은 어디까지나 질문의 절반만 물어본 셈이에요. 당신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해요. '당신은 몇 가지 언어 속에 사십니까?' 물론 당신의 삶 속에 더 많은 언어를 가질수록, 당신의 경험은 더 풍부해지게 되지만, 그 모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여행과 접촉이 필요하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너덧 가지의 언어밖에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는 새로운 문법을 모조리 배우고, 손 닿는 범위에 있는 낯선 사전을 모조리 공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네." 그의 말이다. "나는 항상 새로운 단어를 머리에 채워 넣었다네. 새로운 이방인이 볼로냐를 지나갈 때면, 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을 이용했으며, 경우에 따라 내 발음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친숙한 단어와 표현법을 배우기 위한 목적에 이용했다네."
메조판티나 버턴 같은 사람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인다면, 현대의 교양인조차도 네 가지 이상을 터득하는 것이 드문 일인 반면 어제의 이 초다언어구사자들은 마치 수많은 언어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능동적인 언어 기술(말하기와 쓰기)과 수용적인 언어 기술(읽기, 듣기)을 이야기할 것이다. 수용적인 언어 기술의 경우에는 습득하고 사용하기가 대체적으로 더 쉬워서, 심지어 단언어구사자조차도 다른 언어에 대한 이런 기술을 상당 부분 갖고 있을 수 있다. 메조판티와 버턴의 시대에는 학자들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도, 텍스트 읽기와 번역에 -다른 말로 하자면 수용적 활동에- 들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에 외국어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까지는 물론 아니다. 내 말은, 그 당시에 자기가 x나 y라는 언어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 이들의 타당한 언어 활동이란 읽기와 번역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읽기와 번역은 부담도 덜하고, 두뇌에 미치는 스트레스도 덜하다. 아울러 사전과 문법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부끄럽지 않은 정도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들은 내용이며 말하는 내용을 실시간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뿐 아니라, 실제로 듣는 목소리에는 억양과 주위의 잡음이 덧붙여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는 화용론 비중이 높은 활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메조판티의 시대에는 언어를 배우기가 지금보다는 비교적 쉬웠을 것이며, 그 정도만 가지고도 타당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우리는 말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가리켜 한 가지 언어를 '안다'는 보증서로 간주한다.
속설에 따르면, 여러분이 모국어가 아닌 한 가지 언어로 꿈을 꾸게 되면, 그때부터 여러분은 유창함으로 가는 길의 문턱을 넘어선 셈이다.
언어의 '통달'에 관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현행 기준에 따르면, 최상급에 속하는 사람은 '관용적 표현과 구어체를 능숙하게 사용해야만' 하고, '의미의 미세한 차이를 정확하게 전달해야만' 하며, '어려움이 있을 경우에는 대화 상대가 차마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가고 재구성해야만' 한다.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문장을 만들어야 할 때는 그 구조가 -어떠한 구조든지-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선까지 도달했다. 이제는 단지 어휘를 아는 것, 그리고 그 어휘를 그 구조 안에 채워 넣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여러분은 "그 언어가 사용되는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언어를 안다는 것은 섞여 드는 것이고,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며, 실제로 한 공동체에서 또 다른 공동체로 이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 머물러야 할 의무는 없다. 언어 사이로 흘러가고, 세계 사이로 흘러가는 것이다. 다언어구사자 사이를 오가는 내 여행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지속적인 테마가 될 것이었다.
2008년 롬브의 [나는 어떻게 언어를 배웠나]가 영어로 간행되었고, 덕분에 헝가리 바깥에 있던 사람들도 비로소 이 유명한 헝가리인에 관해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롬브의 문장은 활기차고, 종종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이 책을 쓰면서 내 목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언어 학습에 대한 '타고난 능력'이라는 발상을 에워싼 신화의 안개를 걷어 내는 것이다." 그녀는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서론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어 학습의 신화를 깨뜨리고 싶었으며, 다른 언어를 학습하는 일에 수반되는 영웅적인 지위를 제거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 언어 학습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동기 부여에 의해 촉진되는 관심, 인내, 근면이라고 주장했다. 여러분 자신을 추켜올리는 것도 중요한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처럼 보인다. "여러분이 언어 천재라고 단단히 확신하라."
롬브는 일단 독자를 천재라고 격려한 다음, 특유의 조언을 조금씩 나누어 준다. "훌륭한 언어 학습 방법이란, 여러분이 가장 믿을 만한 패턴을 비교적 신속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해 주는 방법이다." 그녀의 말이다. 그다음에 여러분은 그 형태를 내면화해서 자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형태를 최대한 자주 접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독백을 연습하는 것, 또는 자기만의 언어 게임을 창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의 동의어를 몇 개나 찾을 수 있나?" 하는 게임도 가능하다. 기차를 오래 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이 게임을 혼자서 해 보았다.
크레션이 처음에 묘사한 것만 보면 롬브는 읽기를 주로 하는 사람같아 보였지만 회고록에서는 말하기 연습도 강조했다. 물론 말하기 연습은 주로 그녀 혼자서 했다. "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경우에는 오히려 안도할 수 있었다. 오랜 머뭇거림이라든지, 또는 다루기 힘든 문법적 일치라든지, 또는 모국어에서 완전했던 어휘의 간극 같은 것에 상대방이 짜증을 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울러 이런 독백은 소리 없이 하도록 제안하고 싶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에게 오류 수정을 시도하라고 조언했다.
아울러 롬브는 문법 규칙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했다. "나 같으면 여격이나 주격 보어를 보느니, UFO를 보는 편을 택하겠다." 그녀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려운 전문 용어가 앞을 가로막더라도, 연연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에서 문법을 배우는 것이지, 문법에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헝가리에서 나온 이 조언에 세계 각국의 언어 교사 수천 명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이들이 특정한 언어 구조에 각별히 투자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다언어구사자들은 언어에 대한 감정적 반응 때문에 어떤 언어에 대해 매력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앨릭잰더의 말에 따르면, 그는 표준 중국어의 소리 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언어의 공부를 중단하기가 쉬웠다. 한 여성은 대학에서 네 가지 언어를 전공하고, 훗날 러시아어 통역가로 군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 그녀는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랍어를 배울 수 없었는데, 적군의 언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 남자는 자기가 중학교 때 프랑스어 대신에 독일어를 선택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어는 '계집애 같은' 언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으며, 이런 인식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나이의 제약을 피하는 그녀의 기술 가운데 하나는 디지털 언어 반복기라는 장치였다. 중국산인 이 기계는 테이프 재생기가 달린 정사각형의 은색 상자였다. 테이프를 직접 재생하는 대신에, 디지털 버퍼에 소리를 저장해 놓았다가, 그중 일부를 여러 가지 속도로 거듭해서 재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디오 자료가 첨부된 언어 학습 자료를 찾아보거나, 아니면 그 지역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텍스트를 읽게 해서 녹음한 다음, 최소한 15회 이상 거듭해서 청취하는 방식으로 그 어휘와 문법 표현 모두를 이해했다. 그녀는 또 다른 기술도 이용했다. 구형 소니 PDA와 아이팟이었다.
그녀가 이용하는 또 한 가지 전략은 '정기적인 복습'이었다.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이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억 일과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핌슬러 언어 학습법의 창시자인 폴 핌슬러도 개발한 바 있다. 그는 자기가 배운 내용(단어, 문법 규칙 등)을 각각 5초, 25초, 2분, 10분, 1시간, 5시간, 하루, 5일, 25일 4개월, 2년 단위로 복습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간격은 기억 감퇴의 자연적 속도에 의거한 것이었다. 연이은 복습을 실시할 경우, 복습과 복습 사이의 시간 간격이 더 늘어나는데, 왜냐하면 복습을 한 번씩 더 할 때마다 전박적인 기억 감퇴 속도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앨릭잰더와 헬렌은 자신들의 언어를 대부분 예비 상태로 간직하고 있었다. 헬렌은 이 가운데 다섯 가지를 매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앨릭잰더는 영어, 한국어, 프랑스어를 매일 사용했으며, 정해진 시간 동안은 또 다른 언어에 집중했다. 두 사람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덕분에, 나는 이들의 삶이 에릭 군네마르크가 이야기한 바 있던 헌신적인 언어 학습자의 삶과 마찬가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이 매일 실시하는 연습은 세 가지 목적을 겨냥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 언어의 소리에 대한 친숙성을 향상시키고, 또한 그 소리를 재현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둘째는 문법 패턴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기억의 감퇴를 저지하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었다. 메조판티도 분명히 이와 똑같이 했겠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또 한 가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언어에서 언어 사이로 손쉽게 옮겨 다닐 수 있었는데, 이런 능력은 연습을 통해서도 그리 많이 향상될 것 같지는 않다.
메조판티가 삼십 분 동안에 무려 일곱 가지 내지 여덟 가지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떻게 당신은 그 언어들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혹시 초록색 안경을 끼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메조판티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있습니다." 상대방이 말했다. "그렇다면." 메조판티가 말했다. "그 안경을 끼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초록색으로 보이셨을 겁니다. 제 경우도 딱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한 가지 언어를, 예를 들어 러시아어를 이야기할 경우, 저는 러시아어의 색안경을 낀 것과 ㅁ찬가지여서, 그사이에는 모든 것이 러시아어라는 색깔로 보입니다. 제 생각도 오로지 그 언어로만 보입니다. 다른 언어로 넘어가려 한다면, 저는 그저 색안경만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그 언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나는 앨릭잰더와 헬렌과 다른 모든 사람이 어딘가 전문가적 실력을 넘어선 경지에 있다는 느낌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들은 사실 전문가적 실력을 추구하지 않는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언어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나 시인이 어떤 구절을 좋아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운율이나 각운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신 이들은 언어를 대상으로서 사랑했다. 또는 그 대상과의 접촉을 (가끔씩이거나 지속적이거나 간에 모두)사랑했다. 그렇다면 외과 전문의는 메스를 사랑하고, 또 메스가 가르는 신체 조직을 사랑할 것인가? 프로그램 전문가라면 코드를 사랑할 것인가?
"지적 노력의 경우... 그러니까 유사하기 때문에, 또는 필요하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고, 아울러 그 문화에 대한 관심까지 수반된 경우. 내가 아는 한 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교양 있는 엘리트 사이에서 그런 경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인 것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서양에서는 다언어구사의 가장 오래된 근원이 바로 기독교에 있었다. 기독교는 최초부터 전도를 하는 종교였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했다. 아울러 기독교의 핵심 텍스트는 여러 가지 언어로 변역되어 전파되었다. 다언어구사 문화는 또한 유럽의 탐험, 식민지 개척, 제국 건설 과정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지식가인 계층의 주된 관심사는 공무원이 되거나, 또는 거기서 더 승진하려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문자 해독 능력을 지녀야 했으며, 다시 말해 무려 10만 자에 달하는 한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여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나아가 중국에서는 한 가지 문자 체계가 여러 시대와 장소를 가로질러 지적 문화를 연결시켜 주었기 때문에, 굳이 유럽에서처럼 여러 가지 언어를 유창한 수준으로까지 배울 필요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인이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기 때문에, 야만인의 언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야만인이 중국어를 먼저 배워야 마땅했다.
나는 로렌 콜먼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구절을 반복했다. 그는 빅푸트에서부터 최근에야 새로 발견된 개구리 종에 이르는 갖가지 숨어 있는 동물, 또는 알려지지 않은 동물에 관한 연구에 관해서 열심히 기고하고 논평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콜먼은 이처럼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생물, 즉 이른바 미확인 생명체를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한 바 있었다. "시간 초월, 장소 초월, 규모 초월." 실러캔스의 경우처럼, 그런 동물들은 살아 있는 화석이며, 이미 멸종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시간 초월인 것이다. 그런 동물들은 동물원에서 탈출해 교외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목격된 원숭이의 경우처럼 장소 초월인 것이다. 그런 동물들은 아마존왕뱀이나 마스토돈의 경우처럼 규모 초월인 것이다. 이 표현은 초다언어구사자에게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일반인이 언어를 가지고 하는 일에 비하면, 그들이 언어를 가지고 하는 일은 그야말로 규모 초월이다. 그들은 보통 다른 초다언어구사자와 함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장소 초월이다. 그중 일부는 과거의 느낌을 뚜렷이 지니고 있거나, 또는 미래의 느낌을 발산하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시간 초월이라 할 수 있다. C.J.와 메조판티, 앨릭잰더와 헬렌, 켄헤일과 크리스토퍼 이들 모두는 시간 초월, 장소 초월, 규모 초월이다. 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그리고 이들을 측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척도를 볼 수 있어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어는 오늘날 인도에서 유일하게 중립적인 언어로 간주되고, 사실상 이 나라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2006년 달리트(Dalit), 즉 '불가촉천민' 저술가이자 활동가인 찬드라반 프라사드는 달리트들을 향해 인도어를 버리라고 촉구함으로써 언론의 집중 포화를 야기했다. 그는 영어가 자신들의 모국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인도어를 비롯하여 인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카스트 차별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반면 영어는 기회의 열쇠였다.
이 사실은 영어가 사실상 중립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생각은 프라사드가 문제의 연설 직후에 공개한 [영어의 여신] 이라는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는 자유의 여신상이 분홍색 펜을 하나 들고 컴퓨터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의 공사는 방카라는 마을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곳을 찾아간 BBC 기자의 말에 따르면 여성들이 벌써부터 [영어의 여신이여, 만수무강하소서]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영어의 여신은 철저한 해방을 의미한다." 프라사드의 말이다. "영어의 여신은 카스트 질서에 저항하는, 힌디어와 마라티어와 타밀어와 텔루구어와 방글라어 같은 언어적인 악에 저항하는 대중 운동이다. 인도어는 오히려 편견과 차별과 증오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는 반면, 표현과 의사소통과는 더 적게 관련되어 있다." 인도어는 그야말로 "시들어 없어져야" 한다.
영어는 여러분에게 더 많은 교육, 더 나은 직업, 코스모폴리탄적 생활 방식, 그리고 첨단 기술 산업을 제공할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카스트의 출신 여부는 부적절해지기 시작할 것이었다. 한 달리트 소년의 말마따나 "컴퓨터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브라만이라고 사람들은 믿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할 때, 내가 힌디어로 말을 하면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나는 깡그리 무시된다." 프라사드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똑같은 말을 영어로 하면,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박수를 친다. 아울러 여러분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련된 옷차림은 여러분의 위치를 상승시키고,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다."
일부 초다언어구사자는 여성이지만, 그보다는 남자가 훨씬 더 많다. 비록 언어 능력 관련 시험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높은 점수를 기록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말이다. 내 설문 조사에서는, 여섯 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언어들을 배우기가 남들보다 더 쉬웠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 75퍼센트가 남성이었다.
나는 한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언어가 몇 개까지인지를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혼란 없이 왔다 갔다 전환할 수 있는 언어가 몇 개까지냐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답변에 따르면, 한 사람이 배울 수 있는 언어의 가짓수에는 이론상 한계가 없었다. 한 한계 요인에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인식이 아니라 시간일 것이었다. "언어에 대한 인간의 역량에는 정말로 한계가 없겠지만, 어떤 언어에 충분히 노출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거죠." 이중언어구사와 삼중언어구사를 연구하는 MIT의 심리 언어학자 수전플린의 말이다."
★만약 여러분이 언어를 잘 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자신만의 고유한 위치를 찾아야만 (또는 구축해야만) 한다.
히포 클럽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언어적 외부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부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거기 소속된 구성원과 모두 함께 외부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었던 것이야말로, 내 어리석은 사춘기 이전의 자아가 프랑스어 구사자의 '실패자'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이상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은 또한 내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언어를 계속 보유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만의 목표로부터 동기 부여를 받는다면 더 좋다. 나는 일본 '아니메'의 팬이라는 이유로 일본어까지 배우게 된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다수의 언어가 사용되는 곳, 그리고 다수의 언어를 배우고 학습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보상이 되는 곳에서 살아가고 일하는 것이야말로 큰 자산이 되며, 특히 그 장소가 언어에 대한 '조금 그리고 조금' 견해를 존중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곳에서는 한 사람의 언어 능력이-어느 정도 수준이든지 간에-의미 있는 다중언어구사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찰은 초다언어구사자의 삶에서 나온 것이다. 메조판티는 도서관과 포교성성에 고유한 위치를 구축했다. 아바드지는 세계은행에서 고유한 위치를 구축했다. 그레이엄 켄스데일은 유럽연합 집행 위원회에서 고유한 위치를 구축했다. 내가 처음 앨릭잰더 아르겔레스를 만났을 때, 그는 딱히 고유한 위치가 없는 상태였으며, 약간은 목표를 상실한 상태였다. 인습 타파주의자였던 그는 자기만의 다언어구사자 대학을 운영하고 싶어했다. 이제 그는 싱가포르에서 자신의 언어와 진지함을 인정해 주는 다중언어구사자들과 어울려 살면서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교훈은 내가 인도 남부에서 직접 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사회의 일부 층이 워낙 유동적으로 다중언어적이었기 때문에, 그것 말고는 살아갈 만한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언어를 더 잘하고 더 알고 싶다면, 원어민을 실력 향상의 척도로 이용하기는 하되, 그렇다고 해서 목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이중언어구사자들이 그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하라. 여러분이 언어적 외부자임을 받아들여라.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니까.
★만약 여러분이 언어를 향상시키고 싶다면, 여러분은 도파민을 관리해야 한다.
도파민은 두뇌의 보상 회로에서 작용하는 신경 전달 물질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경우, 우리 두뇌에서는 도파민이 조금 분비되면서, 우리가 방금 뭔가 즐거운 일을 했다고 알려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바로 그 즐거운 일을 또다시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언어를 배운 사람들은 그 일의 즐거움에 애착을 갖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수행한 온라인 설문 조사의 응답자 가운데 95퍼센트는,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언어를 더 손쉽게 배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언어가 좋다."라고 대답했다.
앞에서 나는 이런 애호가 두뇌와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언어를 공부할 때 내 두뇌에서 벌어지는 일이 좋아서' 그런다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좋다'고 말한 사람 중에는,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지위가 좋다고 은밀하게 시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실시한 온라인 설문 조사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한 사람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극도로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인간의 말소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라든지, "두뇌 운동의 즐거움 때문에 그 일을 한다."는 답변도 있었다. 이러한 답변을 보면, 사람들은 단지 사회적 신분 상승으로부터 동기 부여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학습의 신경학적 보상을 즐기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두뇌 가소성을 촉진시키고자 원한다면, 여러분은 몰입을 찾아야만 한다.
온라인 설문 조사의 응답자들이 마치 두뇌의 화학 물질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그들이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몰입 상태를 촉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앨릭잰더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언어를 공부하는 필사 작업실 밖으로 나오는 일을 어딘가 탐탁찮아 했다고 기억한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공부를 열망했다. 데릭 허닝은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물리적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헬렌 아바드지는 연습을 하고 언어 녹음 테이프를 들었으며, 이로써 그녀는 언어를 배우는 동안 몰입의 느낌을 더욱 고조시켰다. 다른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이런 몰입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신체 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두뇌 가소성에 가해진 억제 수단을 벗겨 내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상업적인 언어 학습 프로그램들이 그토록 인기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프로그램들은 단순성과 반복성을 통해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언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여러분은 집행 기능을 구축하고 작업 기억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
집행 기능과 같은 인지 기술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런 기술이 집안 내력이라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유전학자 나오미 프리드먼은 같은 성의 쌍둥이 약 300쌍에게 집행 기능 과제를 부여하는 실험을 했다. 그녀는 각 개인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차이는 그들이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바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프리드먼은 훈련을 통해서 집행 기능이 향상될 가능성도 물론 있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훈련의 원재료 그 자체는 물론이고,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개인의 능력 역시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를 가리켜 누군가의 가소 가능성이라고 명명해 보자. 작업 기억 역시 훈련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훈련을 통한 향상이 별로 극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의 과제를 거듭해서 수행함으로써 그 한가지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더 나아질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기술이 다른 영역으로 전이되어 새로운 능력 향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언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여러분은 언어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초다언어구사자들은 자기들이 '언어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레이엄 켄스데일의 말을 들어 보자. "아랍어 수업 시간에 유독 몇 사람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언어에 대한 감각이라곤 근본적으로 없는 사람들이요." 우리는 그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한손을 내밀더니 손가락을 문질러 보였다. 언어에 대한 이런 '감각'을 그는 '슈프라헤게퓌일'이라고 불렀다. "각각의 언어마다 당신은 그런 감각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의 말이다. "만약 당신이 '왜?'라고 물으면, 당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 '왜?'라는 질문조차도 그 언어 나름의 방식으로 물어보아야 하는 거예요."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롬브 카토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매일 언어를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라." '만지작거리다.'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이런 '슈프라헤게퓌일' 가운데 일부는 언어의 습성에 대한 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어에는 명사와 형용사가 있을 것인데, 과연 어떤 순서로 배열되는가? 어쩌면 전치사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후치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언어마다 발견되는 일반적 구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까닭에, 초다언어구사자는 같은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공부할 때 공통점을 모으고 예외를 분리할 것이다. 서로 다른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배울 경우, 초다언어구사자는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형용사가 명사 앞에 오는가, 아니면 명사 뒤에 오는가? 형용사의 성은 명사의 성에 따라서 바뀔 것인가? '슈프라헤게퓌일'을 얻는 방법은 곧 언어의 습성을 배우는 것이며, 다시 습성을 배우는 방법은 곧 언어를 많이 공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손과 말하기에 관해 잠시 짚고 넘어가 보자. 심지어 단언어구사자 중에서도 팔의 움직임과 구어는 두뇌에서도 똑같은 부분에서 제어된다는사실을 과학자들은 관찰한 바 있다. 손가락을 문지르는 그레이엄의 몸짓은 단순한 몸짓 이상의 것일 수도 있다. 이것 역시 두뇌의 바로 그 부분이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고 있다는 암시일 수 있다.
패턴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초다언어구사자는 구조로서의 언어에 집착하는 것뿐 아니라, 그 구조와 접했던 기억에도 집착한다. "저는 프랑스어를 모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상은 정말 불가능해요. 저는 평생 동안 프랑스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정말 텅 빈 느낌일 겁니다." 앨릭잰더의 말이다. 일단 언어를 알게 되고 존경하게 된 다음부터는, 지금처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언어 공부를 줄어야 했다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또한 초다언어구사자는 자기가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한때 알았던 것과 결코 알았던 적이 없었던 것에 관한 메타 기억이라 할 만했다.
"어떤 단어를 보면,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인지, 아니면 알았다가 잊어버린 단어인지 딱 알게 됩니다." 내가 브뤼셀의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그레이엄 캔스데일은 이런 말을 했다. "예를 들어 '토끼'라고 해 보죠. 저는 아랍어로 '토끼'에 해당하는 단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토록 저는 그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다시 기억해 내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악어'에 해당하는 단어의 경우, 제가 아랍어로 그 단어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뛰어난 언어 실력을 지니고 싶다면, 여러분은 자기 종족을 찾아야만 한다.
초다언어구사자 종족은 그들 스스로를 찾고 있으며, 점차 소외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종족은 여러 블로그며 포럼에 실존하는 온라인 공동체로서 응집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자신들이 여러 언어를 꿰뚫고 있는 공통분모를 건드린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자기들에게 존경을 표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유튜브인데,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다중언어로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올리고 있다. 그런 곳에 있는 공동체는 아직 미성숙 상태지만, 그래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런 비디오에는 결투 상대에게, 또는 어떤 지망생에게 내보이는 전사의 으름장 같은 의도가 드러나 있다. 즉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당신이 이 종족에 가담하고 싶다면, 당신은 바로 이와 같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여러분이 언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지금 여러분이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그 한 가지 방법에 계속 매달려야 한다. 레이너 가날의 말을 빌리면, 결국 이런 뜻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여러분은 성공을 빨리 이룰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찾아낸 플래시 카드는 대부분 메조판티의 필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꾸러미는 그루지야어라고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다음 꾸러미는 더 얇았고 헝가리어라고 나와 있었다. 사서들은 이 발견물 앞에서 나 못지않게 깜짝 놀랐고, 내가 그 모든 꾸러미를 단번에 열고 사진을 찍으려 하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한 번에 꾸러미 하나씩만 풀어 보라고 손짓 발짓까지 해 가며 설명했다.
종이는 바스라지기 쉬웠고, 노끈은 말라붙어 있었으며, 또 다른 카드 꾸러미의 봉인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모두 합쳐서 나는 열세 개의 꾸러미를 늘어놓았는데, 모두 크기가 서로 달랐다. 그루지야어, 헝가리어, 아랍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알곤킨어, 러시아어, 타갈로그어, 그리고 아랍어가 적힌 세 개의 라벨이 붙여지지 않은 꾸러미도 있었다. 일부 꾸러미는 얇았다. 예를 들어 아르메니아어 카드는 겨우 스물두 장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어 카드는 무려 25센티미터 높이의 탑을 만들 정도로 두꺼웠다. 타갈로그어 카드는 7.5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두꺼웠다.
메조판티가,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사람들이 워낙 매혹적이었던 까닭은, 마치 그들이 방법의 진부함을 훌쩍 뛰어넘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어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그냥 주워들은' 것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단어 목록을 읽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단어를 그냥 흡수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방법이 일종의 마법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만약 그 방법을 채택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대단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진실은 무엇인가 하면, 메조판티와 다른 사람들 역시 방법의 진부함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방법의 진부함을 좀 더 생산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의 정신은 진부함을 '즐긴' 것이었다. 그 방법 자체의 본성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요한 판데발러가 내게 해준 조언에는 뭔가 거듭해서 강조할 만한 핵심이 들어 있다.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그 한 가지 방법에 계속 매달려야 한다."
출처:blog.naver.com/kwonwheemoon/221756878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