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정신은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굳건히 서 있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만해에 대한 연구는 문학, 독립운동, 불교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시도되어, 만해 관련 연구자료도 수 백 편에 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만해정신의 근원, 본질, 특성 등에 대한 연구는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끊임없이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만해 탐구에 있어서 1차적으로는 만해와 관련된 제반 사실의 총체적, 세부적인 분석이 최우선일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물론 만해가 살았던 당대의 동향, 사상 등에 기반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만해의 입적 후 그의 사상, 행적, 연구, 시각 등에 관련된 종합적인 분석도 매우 긴요하다. 여기에는 만해 연구의 동향, 만해에 대한 우호성과 배타성, 만해의 계승 문제 등이 구체적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과 관련하여 필자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만해의 제자는 누구인가 이다. 만해의 제자로 칭할 수 있는 범주와 그 대상자의 범위 문제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상좌, 법제자만을 그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만해를 직접 만나서 감화, 영향을 받았던 대상자들 전체를 제자로 보아야 하는가 이다. 예컨대 일제시대에 불교청년운동을 하였던 청년 승려들은 만해의 제자인가, 아닌가? 이런 문제는 만해의 계보, 만해정신의 계승이라는 문제에서 한 번은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에 본 고찰에서는 만해의 제자로 널리 알려진 춘성스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춘성스님은 만해의 상좌(시봉)로서 1903년부터 만해가 입적하였던 1944년까지 만해를 뒷바라지한 승려로 알려져 있다. 만해의 제자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자료는 1967년 서울 탑골공원에 세워진 ‘만해용운당대선사비’이다. 이 비문을 쓴 인물은 운허스님인데, 그는 봉선사를 거점으로 수행, 포교, 역경 사업에 전념하였던 한국 현대불교의 큰스님이다. 운허스님는 춘원 이광수의 6촌간 형제이며, 불교에 입문하기 이전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며, 일제하에서는 강원의 학인들을 이끌고 청담스님과 함께 불교개혁에 앞장서고, 60∼70년대에는 역경사업에 헌신한 승려이다. 때문에 그가 쓴 이 비문은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문에는 춘성 창림(春城 昌林), 동파 연하(東坡 延夏), 용담 초안(龍潭 初眼)을 만해의 법윤(法胤), 즉 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이 대상자 중에서 춘성창림이 바로 춘성스님이다. 동파 연하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필자도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며, 용담 초안(법정스님이 최고로 잘 된 번역이라 칭찬했던 '선가귀감'의 번역자이며, 전강스님과 만공스님의 원상법문 현장에 있었던 스님, 또 김구선생이 마곡사로 출가했을 때 삭발을 해주고 기본교재를 가르쳐 준 스님)은 해방공간의 불교계에서 불교혁신운동을 하다 월북한 용담스님이라는 인물이다. 이제 춘성스님과 만해와의 인연의 실타래를 풀면서 춘성스님을 만나 보자.
만해와의 인연 만해와 춘성스님의 인연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춘성스님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행장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만족스러운 기록이 부재하다. 지금껏 춘성스님에 대한 대중적인 글은 몇 편이 있지만, 그 글에서 말하고 있는 춘성스님의 행적에 대한 근거와 그 확인이 애매하여 신뢰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필자가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 춘성스님이 세수 87세로 입적하였던 1977년 8월 22일 직후의 조계종단의 기관지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710호(1977. 9. 4)에서 〈춘성대선사 열반〉, 〈춘성스님 행장기〉라는 간략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 의하면 춘성스님은 강원도 신흥사 입구의 설악동 출신으로 1891년 3월 30일생이었다. 춘성스님은 그의 나이 11세에 1901년 백담사로 입산하였으며, 1903년에 만해를 은사로 득도하였다고 한다. 일단 여기에서 그가 만해와의 인연이 백담사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해를 은사로 득도하였다는 1903년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지금껏 만해의 입산, 출가설은 다양한 설이 있었지만 그의 자필 이력서에는 그를 1905년 1월로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만해가 27세로 정식의 승려로 득도하기 이전에 어떻게 그의 제자가 득도할 수 있는가? 물론 만해의 입산도 1차 출가, 2차 출가로 구분할 수 있고 현재 〈건봉사 염불만일회연기비〉(1904)에는 ‘용운 봉완’이라는 이름이 전한다. 이 비문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이춘성의 1903년 득도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던 1910년 여름 무렵, 그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만해가 춘성스님에게 하였던 말을 보면 춘성스님과 만해와의 인연은 1910년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만해는 춘성스님에게, “마침 내가 이것을 마무리할 때 너는 나의 시봉이 되었다. 그러니 너는 내 정신을 이어서 장차 이 땅의 산문을 새 시대에 맞게 활짝 열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일단 이 글에서는 춘성스님의 득도 시점의 신뢰에 대한 시비는 접고자 한다. 1910년 8월 만해는 백담사에서 그의 불교사상을 대표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였다. 이 때 춘성스님은 그 작업을 보좌하였으며, 당시 그 정황을 우리에게 자세히 전하고 있다.
'스님은 그 때 여름 내내 쓴 글을 나에게 다 맡기고 “이것을 네가 잘 간수하되 그냥 두지 말고 밤마다 조금씩 읽어 보아라. 앞으로 새시대의 불법은 이 글 가운데에서 찾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노스님이나 여러 큰스님들이 가르치는 바를 업신 여겨서는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어. 스님은 늘 밤에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 하고 혼자 욕설을 퍼붓는 일이 많았지. 나에게 글을 맡긴 다음 날 새벽에 바랑도 놓아둔 채 보따리를 하나 들고 백담사를 떠나셨지.'
《조선불교유신론》의 원고 뭉치를 춘성스님에게 맡기고 백담사를 떠날 때의 사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만해가 백담사를 그리 급히 떠난 것은 이른바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친일승려 이회광의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전라도로 가기 위함이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기던 그 즈음에 만해는 불교개혁의 청사진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바로 그 현장에 춘성스님이 있었다. 그해 그 무덥던 여름, 백담사에는 이따금 소나기가 맹렬하게 내렸다. 이 때 만해는 베 잠방이만 걸친 몸으로 글을 쓰고 있었는데 춘성스님은 그 소나기를 맞으며 갑자기 옷을 집어 던지고 마당으로 나아가,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이에 갑작스런 소나기를 구경하던 노승들은 옷을 다 벗고 불알을 흔들면서 춤을 추는 춘성스님을 보고 망연자실하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그치자 만해는 춘성스님에게 “옷을 벗으라고 하였지, 옷 벗고 춤을 추라고 하였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춘성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옷 벗으면 춤밖에 출 게 있습니까? 스님의 불사가 회향하려는 때, 그리고 때마침 기다린 비가 오니 기쁘지 않겠습니까?”이로부터 만해와 춘성스님의 진하디 진한 인연은 깊어 갔다. 파격의 계승, 선의 구현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수행은 어떠하였는가? 춘성스님은 만해의 제자로서 어떤 수행을 하였는가? 만해의 제자였기에 특별한 공부를 하였는가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불교근대사를 개척하였던 박경훈은 이 점에 대하여 평소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만해 스님이 상좌인 춘성스님에게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과 만해 자신은 결혼을 하였으면서도 당신의 제자인 춘성스님에게는 결혼을 하지 않고 청정비구로 살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박경훈(동국대 교수를 역임)은 환속하기 이전에는 금오스님의 제자로 출가하여 스님 생활을 하던 1950년대 후반 조계사에서 춘성스님을 만나 그 의문점을 물어보았다. 당시 박경훈은 총무원장을 하던 금오스님을 시봉하면서 조계사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승려들이 서울에 오면 머물 곳이 적당하지 않아 조계사의 대웅전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때 승려들은 조계사 대웅전에서 방석을 두세 개 깔고 눕고, 배 위에 방석을 올려 놓고 잠을 자기도 하였다. 춘성스님은 말년을 보낸 망월사에서도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잠을 자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아무도 모르게 담요를 불태워 버렸다. 수좌가 안락한 잠자리를 하면 결코 참다운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 때 불태워진 것은 담요와 함께 두터운 오버나 사치품도 포함되었다. 그 후 춘성스님은 조계사 대웅전에서 장좌불와를 하면서 참선으로 밤을 지새곤 하였다. 물론 그 때에도 방석 몇 개만이 춘성스님에게 필요하였다.
이 때 박경훈은 춘성스님에게 만해 스님은 상좌인 스님에게 왜 글공부를 못하게 하였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다. “그거야 내가 하기 싫어서지. 하지 말란다고 하고 싶은 것 내가 안 하나.” “스님이 가지고 계신 조선어독본을 빼앗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했지. 어떤 궁녀가 나에게 글을 배우라고 책을 주었지. 그것을 스님이 빼앗았지.” “그 때, 무슨 말씀이 없었습니까?” “어설픈 글은 왜놈의 앞잡이밖에 될 게 없다는 게야. 차라리 무식한 편이 왜놈 앞잡이도 피하고, 그 편이 낫다 이 말씀이야.” “글공부는 그렇다 하지만, 왜 장가드는 것은 막으셨습니까?” “우리 스님 말씀이, 무식한 놈이 권속은 무슨 재주로 먹여 살리느냐 이거야. 당신도 권속을 못 먹였으니 옳은 말씀이야.”
이런 대화(《월간 불광》, 1995년 12월호, 〈스님의 그늘>)을 발간하면서 박경훈은 만해의 독단과 이율배반을 더 진하게 느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정황을 전해 듣고서 춘성스님이 글공부를 안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한용운평전>을 펴낸 고은은 그 평전 작업을 위해 춘성스님을 만났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기록하였다. 즉 만해는 춘성스님에게 중노릇 잘하라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내 중노릇은 세인들이 대승이니 뭐니 보살이니 나한이니 말하고 있으나 중노릇이라고 할 수 없다. 돌아다보건대 증상만(增上慢)으로 가득한 업로(業路)였구나. 부디 임자나 중노릇 잘해라. 중노릇은 나나 만공한테 배우지 말고 심산의 무명화, 심산의 이름 없는 계행 납자(戒行 衲子)한테 가서 배우도록 해라. 부디 중노릇 잘해라.'
자신의 중노릇, 즉 수행자로서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솔직 담백의 고백이다. 나아가서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도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실패한 중노릇이지만 제자에게는 좋은 중노릇을 해야 한다는 간곡한 권유를 하였던 것이다. 좋은 중노릇을 하려면 불교 교학에 정통하고 투철한 강사는 아니어도 기본적인 글공부는 하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일제시대 관련 자료를 살피면서 춘성스님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0 : 조선불교청년회 발기인 1928 : 건봉사 강원, 기신론과정 수료, 건봉사 봉명강우회 망년회에서 강연(주제, 고진감래) 1929 : 개운사 강원 제2회 졸업식, 대교과 삼현부(三賢部) 수료 1930 : 각황교당(조계사 전신) 동화대회 연사(주제, 화수분 맷돌)
이를 유의하여 보면, 춘성스님은 일제치아의 불교라는 상황 아래 글공부는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만해가 강조한 교학, 선학, 불교대중화, 역경 등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춘성 스님 열반에 전하는 행적에는 이외에도 1915년에 석왕사 강원 대교과 수료, 1920년 신흥사 주지, 1925년 석왕사 주지, 1930년 만공회상에서 수행 등이 전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절대적인 수긍은 할 수 없다. 예컨대 춘성스님은 만해가 3·1운동 민족대표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하였다. 당시 춘성스님은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는데, 그 과정에서 만해가 독립에 대한 자부심을 쓴 명문인 〈조선독립의 이유서〉의 초고를 받아 외부로 유출한 당사자가 바로 춘성스님이었다. 만해는 조선독립에 대한 명분, 당위성 등을 일체의 책을 참고하지 않고 집필하여 일제의 재판관에게 제출하였다. 만해는 바로 그 원고의 저본을 나누고, 돌돌 말아서 옥 밖으로 나가는 자신의 옷의 갈피에 숨겨 내보냈고, 춘성스님은 항일 불교청년운동을 철저히 수행한 김상호에게 전달하고 김상호는 이를 상해의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런 시절에 신흥사 주지를 하였다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시절에 신흥사에서 일정한 책임(소임)을 맡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한편 위에서 나온 ‘글공부는 전혀 안 하였으며, 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만해 제자라고 지칭할 정도의 글공부만 안 하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해가 글공부를 권유하지 않은 이면을 되새겨 보는 것이 만해 정신을 찾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해 정신의 계승은 어디에서 춘성스님은 만해 정신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글공부가 미진하였다면 어떤 측면에서 만해 정신을 계승하였는가? 그것은 선(禪)의 철저한 구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춘성스님은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파격, 보시, 무애행, 거침없는 삶을 산 대명사로 불리는 큰스님이었다. 이를테면 춘성스님의 삶은 곧 선이었으며, 그의 삶은 선방이나 절 안에 갇혀 있는 좀스러운 참선은 결코 아니었다.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선도 아니었으며, 알듯 모를 듯하는 법문을 하면서 부처를 파는 싸구려 선승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삶을 선으로 실천하였으며, 자신이 곧 부처임을 알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면 만해는 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만해에 대한 호칭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는 선사도 분명하게 있다. 탑골공원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는 분명 ‘선사’라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해의 선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해는 1907년 건봉사에서 최초의 선 수행인 참선을 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번잡한 독립운동, 불교대중화의 일선에서 치열한 활동을 하였기에 제도권에서의 선 수행은 하지 않았다. 간혹,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면서 참선을 하였지만, 이 때의 수행도 제도권에서의 수행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도회지 인근에 세운 자신의 집인 심우장에 칩거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수행을 하였다. 때문에 만해의 선은 생활선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는 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적지 않은 선 관련 글을 남기었다. 만해는 〈선과 인생〉(《불교》 92호, 1932. 에서 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선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을 일종의 종교적 행사로만 아는 것은 오해다. 선은 종교적 신앙도 아니요,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도 아니요, 심적(沈寂)한 회심(灰心)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동시에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다.'
만해는 선을 이처럼 지극히 생활 차원으로 내려 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선을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중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만해는 선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선학자는 고래로 대개는 산간 암혈에서 정진하게 되었으나, 선학을 종료한 이후에는 반드시 출세하야 입니입수(入泥入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뿐만 아니라 수학할 때에도 반드시 산간 암혈이 아니면 아니되는 것은 아니다.'
즉 선 수행의 궁극에는 중생 교화가 있는 것이며, 선 수행도 산간 암혈에서만 행하는 것도 아님을 설파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선의 이해는 인간이 세간에 머문다 할지라도 마음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 소요 자재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해의 선은 생활선이었다. 나아가서 그 생활선은 생활의 현장에서, 삶의 모든 행적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만해는 ‘활선(活禪)’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러한 만해의 선 이해는 아래의 글에 잘 나오고 있다.
'선이라는 것은 고적(枯寂)을 묵수(墨守)하는 사선(死禪)이 아니요, 기봉(機鋒)을 활용하여 임운등등(任運騰騰)하는 활선(活禪)이다. 선은 능히 위구(危懼)를 제하고, 선은 능히 애상(哀傷)을 구(驅)하고, 선은 능히 생사를 초(超)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수양이냐.'
만해의 생활선, 활선을 계승하고 나아가서는 그를 뛰어넘었던 인물이 바로 춘성스님이었다. 그는 만해를 시봉하다 자신만의 수행을 위하여 1930년에는 만해의 곁을 떠나 수덕사 만공스님에게로 갔다. 만공스님은 만해와도 절친한 사이라 수덕사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덕사 선방에서 본격적으로 선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만공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치열한 수행을 한 그는 그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참선을 하다, 경기도 양주의 흥국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개오(開悟) 이후 전국 각처의 선방을 순방하면서 자신의 선을 탁마하였다. 그러나 만해가 입적하였을 적에는 심우장으로 달려와 만해의 마지막 가는 여정을 정성껏 치렀다. 춘성스님은 1960년 이후에 망월사·보문사 주지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말년에는 성남의 봉국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가 종단의 소임을 보았다는 기록은 없고, 전국 각처의 선방에서 수행을 하였다는 풍문만은 전한다. 그에 관한 기행과 비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비록 승복은 입었지만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삶을 살았고, 원초적 자유를 누렸으며,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언어와 법문을 구사하였다.
한번은 그가 머물던 화계사에서 새벽에 문을 꽝꽝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젊은 스님이 나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어 보니, 춘성스님이 팬티 바람으로 서 있었다. 춘성스님이 “왜 문을 늦게 열었느냐!”고 호통을 쳤다. 문을 연 스님이 옷은 어찌하였는가를 물으니, 지나가는 거지에게 주었다는 것이었다. 춘성스님은 남루한 옷을 입은 승려를 보면, 자신의 옷을 자주 바꾸어 입었다. 특히 새 옷을 입으면 더욱더 자주 바꾸어 입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자신은 시주를 받을 곳이 많기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조계사 대웅전에서 수행을 할 때에는 신고 있는 양말이 흰 것과 검은 것, 색이 맞지 않는 짝짝이를 신고 있었다. 이에 옆에 있던 스님이 그것을 보고 웃음을 띠자, “별놈 다 보겠구나. 따로 따로 보지, 두 발을 함께 보고서 분별심을 낸다.”고 하였다. 그는 망월사 주지를 맡고 불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망월사는 돌로 법당을 지으려고 준비중이었다. 그 때 신도가 불사에 쓰라고 건네준 봉투가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병이 든 수좌가 와서 약값을 달라고 하였다. 이에 춘성스님은 그 불사 봉투를 그냥 통 채로 주어 버렸다. 수좌가 내려간 후 옆에 있던 스님이 아니 불사할 돈을 그냥 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짜증을 내었다. 그러나 춘성스님은 돌부처보다 생불(生佛)을 공양하는 것이 더욱 낫다고 하였다. 망월사 시절의 파격은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우리에게 준다. 한번은 불사에 쓰려고 절 인근의 나무를 베었는데, 그것이 산림법 위반으로 걸렸다. 이에 경찰이 와서는 춘성스님을 취조하였다. 경찰이 춘성스님의 인적사항을 조사하였다. 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춘성스님은 “우리 아버지 현두(賢頭)요.”라 하였다. 경찰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춘성스님이 “그 물건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부활을 자재하는 자지요.” 하였다. 경찰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직후 경찰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어머니의 보지 속이요.” 하였다. 이처럼 춘성스님은 신선, 파격, 진실의 선, 격외도리를 보여 주었다.
춘성스님의 탈속한 무애도인, 무집착, 무소유 정신은 다양한 행적에서 나타난다. 특히 그의 욕쟁이 법문은 유명하다. 춘성스님이 기차를 타고 지방을 가는데, 기독교의 전도사가 기차 안에서 전도를 하였다. 그 전도사는 춘성스님에게도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춘성스님은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 나는 여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내 자지밖에 못 보았어.”라고 하니 주위의 승객들이 박장대소하였고 그 전도사는 얼굴을 붉히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생일날이라 하여 열린 법회에 가게 되었다. 그 법회에는 고관대작과 승려, 여성불자들이 가득하였는데 법석에 오른 춘성스님은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어미의 뱃속에 들어 있다가, 응아! 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야.” 하였다. 듣고 있던 대중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어찌 할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의 순수, 가식 없는 선의 본질은 그가 입적하기 6개월 전 그가 입원하였던 병원을 찾은 당시 <대한불교>편집국장 향봉(요즘 유투브에 나와 말을 많이 하는 분)과의 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신문에는 무애도인, 대자유인, 해탈경계를 넘나드는 춘성스님이라고 소개하였다. 당시 그 대화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 : 큰스님! 스님은 낳아 길러 주신 세속의 어머님이 뵙고 싶지 않으세요. 답 : 그럴 때 부처님을 생각해라. 부처님을. 문 : 아파 계신 스님께서도 화두가 성성하십니까? 답 : 여시여시(如是 如是)다. 문 : 스님, 몸이 아픕니까, 마음이 아픕니까? 답 : 뼈가 썩어 든다. 이 자식아! 문 : 언제쯤 이 세상을 떠나실 것 같아요. 답 : 당장이라도 옷 벗고 싶다. 문 :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그림자를 거두시며 웃으시겠어요, 울겠어요. 답 : 미친 놈! 별것 다 묻네. 문 : 저는요, 요즈음 매우 흔들거리고 있어요. 저처럼 젊은 스님들의 방황을 차단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하나 주시죠. 답 :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다. 일체가 환몽(幻夢)이야. 문 : 가시면 어디로 가시나요. 답 : 모든 것이 한구멍으로 빠진다. 문 : 한구멍이 무엇을 뜻합니까? 쉽게 말씀해주십시오. 답 : 한구멍에 빠지되 털끝만큼이라도 빠진다는 생각이 있으면 십만팔천 리야. 문 : 스님께서는 죽음 뒤의 저쪽의 세상(來世)을 믿으시나요. 답 : 필요 없다. 군더더기다. 문 : 사후세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매우 큰데요. 그럼 내생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답 : 필요 없어. 미친 놈아! 문 : 스님께서 90평생에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 가장 슬픈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여인을 사랑한 이야기라든지……. 답 : 미친 놈이 별것 다 묻네. 문 : 죽음이 막상 다가서면 두려울 것 같은데요. 스님께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답 : 마음이 매우 평화롭다. 문 : 제가 만일 큰스님을 벼랑 위에서 밑으로 밀쳐 버리며, 지금의 경계가 어떠시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 주시겠어요. 답 : 씨팔놈아! 떨어져 보지도 않고 어떻게 답해? 문 : 저는 요즈음 가짜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이 짙은데요. 진짜배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도(道)의 정수를 저에게 남기고 가시지요. 답 : 좃 같은 놈아, 주고받는 게 도인 줄 아냐? 문 :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답 : 필요 없다. 필요 없다. 문 :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하실 테인데요. 답 : 씨팔놈의 자식! 신도 위해 사나? 문 : 인생을 회향하시며 후회 같은 것은 없나요. 답 : 일체가 환몽이야, 다 쓸 데 없다. 문 : 스님의 크신 법의 주장자를 어느 곳에 꽂고 가시겠습니까? 답 : 아무 소용이 없어.
입적 직전, 자신의 입적을 예상하였는지는 몰라도 춘성스님은 1977년 8월 22일 입적하였다. 속세의 나이 87세였다. 그의 다비식은 화계사에서 거행되었는데 종정 서옹스님을 비롯하여 운허, 월산, 월하, 혜정, 성준 등 승속을 막론한 2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당시 서옹 종정은 영결식에서 법어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춘성노사 노니신 곳 삼세(三世)의 불조(佛祖)도 엿볼 수 없도다. 세상에 걸림없이 한바탕 진탕지고 어데로 가시는고? 서울 가두(街頭)에 전신(全身)을 나투시도다. 돌(咄)
춘성스님의 삶은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의 그것이었다. 그의 행장기를 적은 《대한불교》에서도 그를 “일의일발(一依一鉢)로 남북자재 소요(南北自在 逍遙), 무(無)를 부르며 상(相) 남기지 않아”로 표현하였다. 춘성스님의 해탈 자재한 삶은 그가 말년에 머물던 화계사에서 인연을 맺은 숭산(행원)스님의 조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춘성 사숙님 스님의 할(喝)은 때로는 활불활조(活佛活祖)하고 때로는 건곤(乾坤)을 모두 쳐부수며 때로는 삼라만상을 길러 내시었으니 어허! 능사능활 능종능탈(能死能活 能縱能奪)의 활구 도인(活口 道人)의 할이라 아니 하겠소이까? 스님께서 건져 주신 대도무문(大道無門)과 설두무골(舌頭無骨)은 일체 무애인(無碍人)의 발자취였습니다. 방할자성리(棒喝自性裏)에 간류록화홍(看柳綠花紅)입니다. 속환 사바(速還 娑婆)하야 보리도 중생하소서.
당시 이 조문을 쓴 숭산스님은 미국에서 포교활동에 매진하였는데, 춘성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당신이 생각한 춘성스님의 진면목을 표출하였다.
지금껏 필자는 춘성스님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그의 치열한 행적은 만해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그 단상을 제시하였다. 비록 만해로 상징되는 지성의 일부분만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만해 정신의 재창조가 아닌가 한다. 그 일부분은 만해 선으로 요약되는 활선(活禪)이다. 춘성스님은 만해 선의 철저한 구현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해의 활선을 단순히 전달, 이행하는 것에 만족치 않고 자신의 독특한 선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필자는 아직 춘성스님의 선의 세계에 대한 적절한 이름을 찾지는 못하였다. 이 점은 필자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함께 풀어갈 과제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