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1899~1988)선생은 안동권씨 후손으로 휘는 용현(龍鉉) 자는 문현(文見)이고 자호(自號)가 추연(秋淵)이다. 추연은 『주역(周易)』에서 잠룡(潛龍)의 뜻을 취한 것이다. 부친이 태몽(胎夢)에서 용을 보았으므로 이름을 용현으로 지으니 끝의 현(鉉)은 항렬자이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 중후(重厚)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음이 적고 또래 아이들과 장난치는 일도 없었다. 말을 배우면서 천자문(千字文)을 익히고 10세에 통감(通鑑)과 사략(史略)ㆍ사서(四書)에 통하고 시문(詩文)을 철(綴)하였다.
신장이 크고 용모가 수려하며 귀도 희고 크며 눈동자가 빛나고 집중되어 있는데 그 풍채가 시원스럽고 밝았다. 성품이 과묵하되 덕스러운 기국(器局)이 자연의 순수함으로 이루어진 듯했으며 멀리서 보면 닭의 무리 속의 학(鶴)인 듯하고 앞에 다가서 보면 봄볕처럼 따스하였다고 그의 행장(行狀)에서는 묘사하고 있다. 그의 훈도(薰陶)를 거쳐간 사람이 4백여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추연의 학맥(學脈)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산맥 중 율곡 이이(李珥)와 우암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기호(畿湖)'에 속한다. 그 학통(學統)은 우암의 9대손으로 구한말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자진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門人)이자 족형(族兄)인 각재(覺齋) 권삼현(權參鉉)에게서 이었다. 처음에 그 서실 이름을 운화당(雲華堂)이라 했는데 이는 마을 뒤의 운현산(雲峴山)과 마을 이름 유화(柳華)에서 딴 것이면서 운곡(雲谷)과 화양(華陽)을 앙모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러다가 만년에 문생들이 새로이 서실을 지어 수양할 곳을 마련하자 이를 태동서사(泰東書舍)로 편액(扁額)하였다.
생전에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고 불렸던 추연(秋淵)은 시류(時流)를 따르라는 주위의 권고에 “죽을지언정 다른 뜻을 가지지 않겠다” 며 전통 유학자(儒學者)의 길을 고집했고 평생을 은거(隱居)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추연의 만세(晩歲)후 편간된 『추연문집(秋淵文集)』은 15책 45권으로 방대하다. 주로 성리학에 관한 저술과 5천여 편의 묘비문 및 문집 서문(序文) 등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추연은 안동권씨 문중이 배출한 큰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대가(大家)이다.
1979년 산청에서 중재(重齋 金榥 1896~1978)의 장례가 있은 후 10년 만인 1988년 합천 초계에서 추연의 장례가 있었는데 강우(江右)지역에서 시행한 유월장(踰月葬.별세한 달을 넘겨 다음 달에 치르는 전통 유가의 장례)이였다.
태고에 운석충돌로 형성된 초계분지 태암산(泰巖山)의 동쪽이라는 뜻의 태동서사(泰東書舍)는 2012년 후학들이 뜻을 모아 태동서원(泰東書院)으로 완성되어 선생을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유하리(柳下里)에 위치한 태동서원은 왜정 이후 유학자를 배향(配享)하기 위해 서원을 지은 예는 중재(重齋)를 기리는 도양서원(道陽書院) 이후로는 처음이다.
태동서원은 전통 서원건축 양식에 따라 교육장소인 강당(講堂)과 기숙사인 서재(書齋)를 갖추고 있다. 위패(位牌)를 모신 사우(祠宇)를 제외하곤 단청이 없다. 궁궐이나 사찰과 달리 유가(儒家)의 건물에선 꾸밈없는 소박(素朴)함과 고고(呱呱)한 선비정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