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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가장 강한 감정을 끌어내는 주제는 무엇보다도 잔인함이다.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 오랫동안 남는 것은 항상 그 전쟁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각인된 장면들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내전 기간 동안 수많은 잔인한 만행을 목격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또한 대중 선전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최초의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스페인 내전은 외국 특파원을 끌어들이는 자석이었고, 언론 담당 장교가 설명하는 적군의 만행은 선정적인 제목과 함께 널리 퍼져 나갔다. 전쟁 초기에는 특파원들이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진실 여부를 가리거나 배경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탄압과 학살의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피난민들은 자주 과장되고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자신들의 공황상태를 정당화했다. 7월 19일 대학살로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고 소문난 바르셀로나의 한 노동자 집단은 사실은 군사 반란에 항의하기 위해 가축도살장에서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사망자 수도 과장되기 일쑤였다. 국민 진영은 당시 공화 진영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5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말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 5만 5천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사건이 혼란스럽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기자들이 전쟁의 만행 이면을 조사하여 기사를 작성하기보다는 상투적인 무구에 의존했던 것 같다. 유럽인들은 대체로 스페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스페인 전 국토에서 폭발한 억압과 반란의 전통적인 폭력의 순환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화군에 붙잡힌 치안대원들
전쟁 초기에 확실한 증거도 없이 기자들이 성급하게 전파한 부정적 인상은 공화 정부의 대외 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으며, 공화 정부가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해야 할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 정부의 발목을 잡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신문이나 잡지들이 앞 다투어 게재한 (공화 진영에서 일어난) 과도한 폭력에 대한 기사는 영국 보수층 혹은 외교관들이 보인 혁명에 대한 혐오감을 정당화했다. 레옹 블룸이 이끄는 프랑스 좌파 정부는 스페인 공화 정부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정심을 억눌러야 했고, 게다가 그해 봄에 히틀러의 라인란트 점령에 화들짝 놀라 공화 정부와 국민 진영 모두에 지원을 거절해야 한다는 영국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는 결국 국민 진영만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1937년 4월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세계 여론이 공화 정부 진영을 동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공화 진영은 이미 전쟁에서 패배로 치닫고 있었다.
카사데캄포는 '파세오'(처형하기 좋은 인적이 드문 곳) 장소로 유명했다. 공화군 병사들이 자신들이 막 처형한 것으로 보이는 2명의 민간인 시신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 장면은 공화 진영의 최악의 이미지였고, 외국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여러 차례 소름 끼치는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주로 종교적 의미가 있는 사건들이었다. ‘적색분자들’이 사제들을 죽이고, 수도원 내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꺼냈다는 따위의 소문이 그런 것들이었다. 심지어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한 사제의 목을 내리쳤다느니 혹은 카를로스파 의용군이 공화주의자를 십자가 모습으로 땅에 눕힌 다음 “그리스도 왕 만세!”라고 외치고 나서 칼로 그의 팔다리를 잘랐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런 소문을 듣고 17세기에 벌어진 30년 전쟁이나 암흑 시대의 종교적 박해를 떠올리거나 또는 이 ‘새로운 야만 행위’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하더라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살이 양편에서 똑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국민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적색분자들과 무신론자들’을 가차 없이 소탕하는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공화 정부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최악의 폭력이 대개 그동안 억압되었던 공포에 대한 갑작스러운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거나 아니면 과거에 자신들이 당한 원한을 복수하려는 열망으로 악화된 것이었으며, 얼마 안 가 수그러들었다.
공화 진영의 성직자와 교회 공격은 스페인 교회의 막강한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외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에서 가톨릭교회는 보수 세력의 성채였고, 우파가 스페인 문명으로 정의하는 어떤 것의 토대였다. 외부 세계가 스페인을 지극히 종교적인 국가로 바라보는 고정관념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스페인에서는 심지어 무신론자도 가톨릭교도다.”라는 바스크 출신의 철학자 우나무노의 농담이 단순히 빈말만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종교 재판소에 의해 수 세기 동안 강요된 광신적 미신이 유럽인들의 마음에 스페인의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각인했다. 그런데도 외국 신문들이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종교적 탄압과 19세기에 나타난 폭력적 반(反)교권주의 간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거의 지적하지 않은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몇몇 지역에서 그런 과격한 행동을 불러일으킨 분노는 하나의 확고한 신념에서 촉발되었는데, 그것은 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약속은 부자나 권력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상에서 그들의 작은 몫에 만족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오래되고 케케묵은 사기라는 것이 그것이다. 적어도 아니키스트들에게 교회는 국가가 벌이는 심리전의 지부(支部)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에게 치안대 못지않게 중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내전 중 성당의 석상을 파괴하는 공화파 의용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 진영은 2만 명의 사제가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전쟁 후에는 7,937명의 성직자가 살해되었다고 말했다. 이 수치는 여전히 실제로 살해된 숫자보다 1천 명 정도가 더 많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 전체 성직자 11만 5천 명 가운데 13명의 주교, 4,184명의 교구 사제, 2,365명의 수도교단 사제, 283명의 수녀가 살해되었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이 1936년 여름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소름 끼치는 학살이었다. 그러나 외국의 자유주의 성향의 가톨릭 교도들은 후세 사제들의 피살은 우파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해한 좌파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스페인 교회는 이런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러나 그 스페인 교회는 몬드라곤의 수석 사제를 포함하여 16명의 바스크 출신 사제들이 국민 진영에 총살당한 사실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직 비토리아의 주교만이 분명한 입장을 취하여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코 장군에게 항의하도록 설득하려 했고, 프랑코 장군은 이에 분노하여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주교들을 로마에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약 20명의 개신교 목사들도 국민군에게 피살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항의가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프로테스탄트 세계협의회 사무총장 게를하르트 올레뮬러(Gerhard Ohlemuller) 박사는 1936년 11월 28일 이에 대해 빌헬름 슈트라세에 항의했고, 독일 외무부는 스페인 국민 진영에 이 사건의 조사를 요청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외신에서 가장 선정적인 선전용 기삿거리가 된 것은 수녀들을 겁탈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간행된, 국민 진영이 공화주의자들의 범죄 행위를 기소한 문건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그런 사실이 오직 한 건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사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특히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지에서 사제들에게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그들을 살해한 경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떤 사제는 교회 안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고, 성기를 거세당하기도 했으며,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만행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사제는 공화군의 명령으로 자신의 무덤을 직접 판 다음 산 채로 묻히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방화를 당하고 파괴되었다. 성직자의 망토가 거리에서 투우를 조롱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공화주의자는 장난으로 톨레도 대주교의 예식 집전용 사제복을 입었다가 진짜 대주교로 오인한 술 취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성배를 꺼내 성체 성사용 포도주를 마시기도 하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깨뜨리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성수반에서 면도를 하기도 했다.
공화 정부 지배 지역에서 법과 질서가 무너지자 대중의 분노는 우선은 반란군 장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에게로 향하였고, 이어서 계급의 적들, 즉 성직자, 지주와 그들의 아들들, 공장주, 지역의 정치적 보스(카시케), 전문 지식인, 상점주들을 겨냥했다. 전쟁 초기의 폭력은 갑작스러운 폭발과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런나 대중의 복수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차별적이거나 맹목적이지는 않았다.
카시케를 풍자한 그림
성직자 살해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교회들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바스크 지역을 예외로 하면 지역적 편차도 거의 없었다. 활기없는 농촌 지역에서는 사제들이 지역 교구민과 마찬가지로 가난에 찌들고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전쟁 전에 부자들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제들은 대개 살아남았다. 상점주나 전문 직업인 살해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갈취하지 않고 거만하게 굴지 않은 법률가나 상점주는 대개 죽음을 면했다. 노동자들을 공정하게 대우해준 것으로 알려진 공장주나 지배인도 대부분 살아남았으며 많은 경우 새로 구성된 협동조합의 일원으로 계속 남기도 했다. 그러나 ‘악명 높은 착취자’는 전쟁 초기에 공화군에게 사로잡힐 경우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런 일반적 양상에서 예외적인 경우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중절모를 쓰거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총살을 당하곤 해다는 소문은 중간계급 사람들의 불가피한 피해망상의 산물이었다.
좌익 정당과 노동조합은 건물을 강제로 징발하고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조사위원회는 보통 체카(Checa)라고 하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알려졌다. 프랑코측의 공식 보고서에는 마드리드에만 200명 이상의 체카 요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결 처분을 면한 반란 지지자들은 대개 혁명 법정인 조사위원회에 끌려 나와야 했다. 반란에 관여한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는 만일 기록이 파기되지 않았을 경우 그 집단의 공식 부서나 각 당 본부로부터 확보할 수 있었다. 하인, 채무자 또는 사적인 앙심을 품은 적들에게 고발당해 희생된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격앙된 의심의 분위기와 급박한 상황에서 많은 잘못이 저질러졌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36년 스페인 체카 멤버들의 모습. 이 기구는 반란 활동과 사보타주를 타도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위원회였다.
이처럼 합법을 가장한 재판은 주로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이 지배적이었던 대도시나 지방 도시에서 주로 나타났다. 때로는 재판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려고 가짜 팔랑헤당원증을 만들기도 했다. 피고가 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덮어씌워서 쉽게 유죄를 입증하려는 속셈이었다. 유죄를 선고받으면 그대로 밖으로 끌려 나가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파시스트였다고 적힌 플래카드와 함께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전시되곤 했다. 아나키스트들은 합법을 가장한 이런 ‘연극’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어서 보통은 이런 절차 없이 즉결 처분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한 책임은 그 당사자에게 있다고 보고 관리들이 그 뒤에 숨어 책임을 면해보려고 했던 모든 형태의 조합적 ‘국가주의’를 거부했다. 즉결 처분을 채택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지은 자’를 가장 상징적 의미가 강한 국가 기구인 감옥에 보내는 데 거부감을 있었기 때문이다.
체카 창설은 활발한 스파이 활동과, 군사 반란에 대한 정부의 허약한 대응이 초래한 분노를 감안할 때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중 일부는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단체가 되었다. 마드리드의 린콘(Rincon) 백작의 저택에 설치된 체카는 공산주의청년단 서기장을 역임한 가르시아 알타델이 이끌었다. 그런데 알타델은 자신의 전리품을 챙겨 아르헨티나로 도망치다가 도중에 국민 진영에 체포되어 나중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페인 체카의 창설을 주도한 가르시아 알타델(중앙)과 그 동료들
공포와 혼란을 틈타 수많은 범죄자들이 편의상 정치적 깃발을 내걸고 범죄 활동을 저질렀다. ‘말 태우기(당시 유행하던 영화 속 은어로 공개 처형을 의미)’를 위해 진짜든 아니든 간에 ‘파시스트’를 체포하러 돌아다닌 다수는 10대 노동자들이거나 가게 점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적 극단주의자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권력을 손에 넣어 잔뜩 흥분한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자신의 모친과 함께 마드리드의 병원에서 일하던 여배우 마리아 카사레스(전임 총리의 딸)는 어느 날 아침 두 모녀가 자신들의 차 시트에서 핏자국을 발견한 일을 떠올렸다. 운전수인 젊은 파코(프란시스코의 애칭)는 차 시트에 묻은 핏자국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어깨를 가볍게 움찔거리고 나서 ‘새벽에 말 태우기를 하려고 한 놈 붙잡았습지요. 그러느라고 핏자국을 지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해명했다. 나는 백미러로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가벼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득의만면한 미소 같기도 했고 약간은 부끄러워서 흘리는 미소 같기도 했다. 또한 잔인하고도 순진무구한 미소이기도 했다. 그것은 손이 피범벅이 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마리아 카사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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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개 처형등을 비롯해 내전기간동안 상당히 끔찍한일들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