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지 하우스
그 영화관은 조선일보 건물 속 한 귀퉁이에 있다.
영화관인지 카페인지 작은 음식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문 앞을
몇 년을 지나면서도 그곳이 영화관인줄 몰랐는데
이제는 길다랗게 놓인 광고판이 영화인 것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남극의 쉐프?
그건 또 뭐야하는 궁금증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코 앞에 카운터가 있고 상냥한 두 처녀의 눈과 마주친다.
돌아서 다른 곳으로 걸어 갈 공간이 없는 그곳에서 뻔뻔스러워보이거나 말거나
팜플렛 몇 장을 뽑아 들고 나왔었다.
남극에선 물을 이렇게 만들더군!
南極料理人
그렇다면 우리도' 남극요리사;라고 제목을 붙일 일이지 쉐프는 왜 튀어나온 건지....
화면에 미어터지게 제목이 뜨는 순간 어느날부터인지 우리 귀에 익숙해진 쉐프라는 말이 거슬린다.
스폰지 하우스는 작고 탄탄한 영화관이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상영관.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영화를 예매하는데 삼 주가 걸렸다.
주말이면 오는 곳이니 당연히 원하는 날 볼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번번히 빗나가고
인터넷 예매에서조차 거기 열거된 카드가 나는 없었다.
쟁취하듯 표 두 장을 예매하곤 승전가를 부르듯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샀어, 시간 맞춰 나와.
대원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중책이다.
남극기지를 살피고 연구하고 보고하는 그 어떤 임무보다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임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끼니때 모여드는 식탁의 그 자리에선 계급장도 일의 무게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본능에 충실한 순수의 모습으로 달려들어 입맛을 다시고
보는 이가 침을 삼키도록 맛있게 먹는다. 그들의 식사는 끼니 해결이 아니라 즐거운 오락이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일상에서도 사람 사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진다.
욕심, 다툼, 그리움, 배신, 허탈함, 막막함, 막무가내, 무질서, 뻔뻔함
화면 가득 펼쳐지는 식탁과 게걸스레 먹어대는 배우들의 희화된 모습 간간이에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상을 양념처럼 끼워넣은 구성력
누구는 이런 것이 일본 영화의 매력이라고도 하더라만
그들의 외로움이나 절망까지도 깔끔하게 정돈된 동화 한 편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게 하는 것이
또한 연출자? 시나리오? 감독의 재주인 건지 아니면 일본 영화의 맛이 그런 건지
여하튼 상큼하다. 물론 많이 웃었고.
주말마다였지만 젊은이들로 넘쳐나서 표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내에선 스폰지 하우스에서만 개봉한 영화라는 소개를 어디선가 읽었는데
그 이유는 또 뭘까도 싶다.
먹을 것을 향해, 먹고 싶은 것을 향해, 기대한 밥상을 향해 뛰어오는 저 모습.
짐짓 점잖은 척하는 어른들조차도 저 모습의 주인공이 되어 본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어른임을 내던지고, 사회적 지위를 훌훌 벗어던지고 먹을 것 앞에서 내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뭔가 대단한 삶의 철학을 안겨주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생각도 든다만
이 영화 역시도 에세이집을 영화화 한 것이라니 그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오른다지?
감히 요리사의 영역을 넘보더니 이런 일을 만들고야 마는군.
배를 쥐고 웃게 한 이 장면도 돌아서 생각하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실제 남극대원의 요리사였다던 원작자는 단순한 일일기록으로만 글을 남겼을 거라고 생각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더 그 책이 궁금하다.
일본으로 돌아온, 가정으로 돌아온 남극요리사.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인지 제 자리를 잃은 것인지
미미한 한 존재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남자로 돌아온 남극요리사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뭔가 새콤한 것으로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날 다시 꺼내보고픈,
참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참 별 것으로 만들어 놓은
새콤발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첫댓글 스폰지하우스...역시 사람은 서울에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문화행사조차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면서...ㅎㅎㅎ
서울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문화라는 과장된 포장의 인위적인 것이지요. 자연 속에서 삶을 찾는 분들이 늘 부럽답니다. 아마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원리는 아닐까도 싶습니다만, 아마도 그건 아니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