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3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대답되지 않은 탄식 시편 》
시 77:1~20
〈 인생살이의 난제 〉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수학의 7대 난제”가 발표되었습니다.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수학에서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1백만 달러(한화 14억 상당)를 준다!”
그때 발표된 7개의 난제 중에서 2005년에 하나는 풀렸습니다.
아직 6개가 남아 있는데,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풀 수 있지않을까 기대를 한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수수께끼가 어디 수학에만 있겠습니까?
지뢰밭처럼 인간이 풀지 못하는 문제는 곳곳에 있습니다.
그중에 저는 “시의 해석”이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닌가 합니다.
정말 시를 읽고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구약성경 시편을 시리즈로 설교하는 중입니다.
참 어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험한 길입니다.
☞ 예수님이 그 길을 가라 하셨으니는 기꺼이 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시편 77편입니다.
전체가 다 어렵지만 제가 한 구절을 제시합니다.
(2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인에게 환난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외쳤습니다.
그런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로 맺었습니다.
하나님께 밤새 부르짖어 외쳤으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고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면 위로를 받아야지요!
그런데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하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탁 걸려, 수학의 7대 난제보다 더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 여러분은 어떠세요? 어려움 없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 난외주와 관주 〉
2절의 뒷부분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부분이 “내 영혼이 위로를 받았도다” 그래야 쉽게 넘어갑니다.
한국의 기독교회는 ‘금요 철야예배’가 있습니다. 새벽마다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철야예배에서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나는 위로 받았습니다.”
“평생 새벽 제단을 쌓아 나는 위로도 받고 대답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싫컷 부르짖고 나서,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납득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제가 수학의 7대 난제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77장은 이러한 시입니다. 2절 뿐이 아닙니다. 3절도 보겠습니다.
(3절)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여기서도 “~내 심령이 상하도다”가 아니라 “내 심령이 은혜를 받았도다”
이래야 자연스럽습니다.
불안하여 근심하는 중에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풀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더 꼬였습니다. “~내 심령이 상하도다”
☞ 성경은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은 3천 5백 년 전부터 기록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2천 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니 아무나 읽는 책이 아닙니다. 쉽게 읽히고 이해되는 책이 아닙니다.
더욱이 시편은 말 그대로 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과 씨름을 아니할 수가 없지요!
성경에는 ‘난외주(欄外注, Marginal Note)’와 ‘관주(貫珠 Cross-reference)’가 있습니다.
난외주는 본문 아랫부분에 1) 2) 3)으로 표기되어 이해를 돕습니다.
관주라는 말은 꿸 ‘관’ 구슬 ‘주’를 씁니다. 구슬을 실에 꿴다는 의미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그러니 꿰어라!” 이 말이 관주입니다.
성경 본문에 작은 글씨로 ‘ㄱㄴㄷㄹ’이 끝나면 ‘ㅏㅑㅓㅕ’로 이어지는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그 표시에 따라 성경 본문의 옆이나 아래에 보면 관련된 다른 성경 구절 표시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주입니다. 관주의 사명은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라” 입니다.
〈 위로를 거절한 야곱 〉
시편 77장 2절, 수학의 난제 7가지보다 어렵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2절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에는 관주가 붙어있습니다.
관주의 부호를 따라가 보니, ‘창 37:35’라고 적혀 있어요, 그 구절로 꿰라는 뜻입니다.
창 37:35절로써 이 구절을 풀 수 있다 하니, 찾아봅시다!
창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이 구절이 어떤 대목이냐면요, 야곱이 지금 자기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요셉이 맹수에 뜯겨 죽으면서 남긴 피묻은 옷을 받아들었습니다.
그 옷을 보고 아들이 죽었다고 확신한 아버지 야곱이 목 놓아 우는 대목입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애통입니다.
아버지 야곱을 위로한들, 그 무엇이 야곱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조차 위로가 안 됩니다. 그러니 거절하는 것이지요!
지금 시편 77장을 쓴 시인은 ‘참척의 고통’ 이상으로 탄식하며 괴로워하는 중입니다.
이제 2절 3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3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이제 가닥이 좀 잡힙니다.
시편 77장을 쓴 시인이 어떠한 고난 중에 있는지가 헤아려집니다.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서도 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지 알았습니다.
살다가 이런 고난을 만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때로 이런 고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시편 77장은 이렇게 극한 상황에 처한 시인이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매달리는 시입니다.
그 누구의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위로조차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시인은 누구에게 매달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에게 밤새워 기도합니다. 두 손 들고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위로는 거부합니다!
〈 대답되지 않은 탄식의 기도 〉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하프 타는 노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눈물과 함께 자기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
근심에 찬 여러 밤을 침대 위에서 울며 지내보지 않은 자
그는 당신들을 알지 못하리라,
한마디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라고 말합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립니다.
슬픔 중에는 아무리 나누어도 작아지지 않는 슬픔이 있습니다.
아들 요셉을 잃은 아버지 야곱의 슬픔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식 잃은 슬픔을 ‘참척’이라 합니다.
이 슬픔에 직면하면 세상 그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시편 77장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 시편 77장에는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대답되지 않은 탄식의 기도”
참척의 고통을 지닌 시인이 밤새워 눈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77장이 끝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받았다는 단서가 전무합니다.
그래서 시편 77장은 “대답되지 않은 탄식의 기도”입니다.
시편에는 더러 “대답되지 않은 탄식의 기도”가 있습니다.
{13편, 22편, 28편, 35편, 74편, 77편, 88편, 89편 등 모두 여덟 편}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되지 않은 탄식의 기도”도 성경에 포함시켰습니다.
우리 같으면 “내가 대답하지 않은 기도이니 빼라!” 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 하나님께서 “대답되지 않은 탄식의 기도”도 성경에 포함시키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 대답되지 않는 기도와 신앙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
사람들은 대답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닌 걸로 치부합니다.
대답이 없는 믿음은 약한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편 77장이 있습니다.
“평생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화끈한 대답을 받아 본 일이 없어!”
이렇더라도 실망하지 마시라고 시편 77장이 있습니다.
애써서 전도하면, 몇 달 나오다가 그만 둡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예수 믿어도, 교회 다녀도 달라지는 것이 뭐야?”
“예수 믿었는데, 왜 우환이 사라지지 않아?”
예수 믿었는데, “왜 이래?” 하면서 돌아섭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시편 77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시인이 하나님의 위로를 거부한다고, 하나님이 위로를 거두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짜 위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 고난에서 다시 일어서도록 붙잡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시편 77장을 쓴 시인을 바라봅니다.
그는 대답을 들어야만 바른 신앙이라는 편견에 빠져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래서 위로를 거부하면서도 밤새 하나님께 매달리고 부르짖습니다.
시편 77장을 읽는 이들도 그렇게 하라고, 이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를 성경에 포함시키시고, 자기를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 한편 생각해 봅니다.
대답을 못 들었다고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어도 달라지는 것도 없고, 복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관계를 단절합니다.
달라지는 것이 없어도, 대박이 나지 않아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습니다.
마치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 못 배워 무식해도,
가난하여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하나 없어도 부모는 부모입니다.
못난 부모일지라도,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위로!
그것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끝내 대답하시고, 종국에는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