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편집: 묵은지
며칠있으면 2018년 무술해가 지나고 2019년 기해해가 시작되면서 또 묵은지에게 반갑쟎은 나이가 한 살 더 얹혀집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과민하게 여기거나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전보다도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막상 뒤를 돌이켜보니 묵은지는 그동안 세월이 차곡차곡 착실하게 쌓아 만들어준 '연륜'이라는 소중한 재산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것은 물론이요 전보다 매사를 사려깊게 대하는 진중함과 시야를 넓혀준 안목까지 후하게 덤으로 얹혀 준 것을 감사히 받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몇년 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조선 역사에 관한 일단의 글들에 그동안 소소히 받은 덤을 보태며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였으며 그런 노력이 열매가 되어 미력하지만 가끔씩 졸작으로나마 세상에 내놓게되니 그때마다 느끼는 묵은지의 성취감과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묵은지의 글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역사물이 주된 내용인데 그것은 묵은지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연관성이 많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풍습과 관습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랜 과거의 일로써 거의 기록에만 의존해야하는 역사의 속성으로 보다 현장감있게 진실을 알리고자했던 묵은지의 바램과는 달리 아직 턱없이 부족한 능력과 현실적 한계로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그렇게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묵은지로서는 적어도 자신의 글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에 대해 스스로 최소한의 역사적 책임의식을 갖고자 노력했으며 지금까지 묵은지의 글 속에 관련자료나 사진 이외에도 자신의 얼굴을 쑥스럽게도 굳이 올린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해 쓴 자신의 글에 나름대로의 소신과 자신감을 나타낸 상징적 의미로 이해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이 글에서 언급하려는 '오가작통법'이란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도서벽지 지역에서 흩어져 살고있는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세조 때 만든 법이었는데 그 주된 내용을 보면 다섯집을 모아 1개의 '통'이라 하고 다시 그 5개의 통이 모여 1개의 '리'로, 다시 3~4곳의 리가 모여 1개의 '면'을 구성한다는 내용입니다. 처음 한명회가 오가작통법을 도입하려했던 의도는 주로 원할한 세금 징수, 부역 동원, 범죄자 색출 등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후세에 가서는 뜻하지않게도 이 법은 '연좌제'로까지 이어지면서 아무 이유도 모른채 이웃에 살았다는 것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죄없이 죽음으로 내몰리거나 호된 고통을 당했던 악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오가작통법은 이같은 연좌제의 발단이 되어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하였지만 '면리제' 만큼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우리 사회의 체질에 맞춰지고 다듬어져 오늘날까지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지역 단위로 활용되고 있어 그 옛날 오가작통법과 면리제의 도입은 새삼 한명회의 탁월한 능력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한명회는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5대에 걸쳐 임금을 보필한 관료로써 오랜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의 왕비로 앉히는 등 그 시대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리에서 국가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한명회는 조선 초기의 불안정하게 이어가는 왕조시대에 정국과 정사에 관여한 인물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실록이나 각종 역사서의 기록상으로도 그의 이름이 상당히 많이 올려져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이성계의 아들들은 서로 왕의 자리를 탐하며 형제들끼리 죽기살기로 싸움을 벌였는데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켜 피를 튀기듯 난리를 피우더니 태종대에 까지도 임금의 자리승계가 무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다소 안정을 찾는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기간을 2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을 하게되자 임금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나이어린 조카인 단종을 유배끝에 죽이고 자신에게 반감을 지닌 많은 대신들을 몰살을 시켰습니다. 이런 잔악한 쿠데타의 모든 과정을 수양대군의 오른팔이 되어 특유의 비상한 두뇌로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한명회였는데 사실 이러한 쿠데타 성공 이전까지 한명회는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던 평범한 관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평소 야심에 차있던 수양대군과 인연이 되어 계유정난에 가담한 것은 한명회의 인생을 극과 극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에 등극시킨 공신으로서 졸지에 기세가 등등해져 자신의 두 딸을 왕비로 들이며 임금의 외척이라는 권력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임금인 나이어린 조카를 죽이고 수많은 신하와 친족들까지 잔인하게 죽인 금수보다도 못한 세조를 적극적으로 도와 계유정난과 반정의 주역이 되었던 한명회는 후대에 많은 비판과 질타 또한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한참을 건너뛰어 300여년이 흐른 1800년으로, 이때는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가 죽고 나이 12세의 어린 순조가 23대 임금으로 보위에 올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는 세도정치가 아직 시작되기 직전으로 그동안 계속된 당파싸움에 막바지까지 다다른 사림들의 붕당정치는 노론계로 이루어진 '벽파'와 남인과 소론계로 이루어진 '시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권력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파와 벽파가 나뉜 것은 정조의 부친인 사도(장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세자의 죽음을 두고 자업자득으로 받아들이자는 벽파와 모함에 의한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애석해 하는 시파로 나뉘었는데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자기 부친의 죽음을 애석해하고 자신의 탕평책을 지지해주는 시파를 주로 중용하면서 권력의 주도세력은 시파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보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에 나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자신의 오라버니 김귀주가 속해 있었던 벽파를 두둔해 주었고 이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벽파는 때마침 시파 내에 천주교 신자가 많음을 알고 이를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재임기에 전파되던 천주교에 대해 온화한 정책을 펼쳤는데 그런 영향으로 조선 사회에서는 실학과 서학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특히 정조의 비호를 받는 시파쪽에는 천주교가 주류를 이뤄 심지어는 시파와 가까운 왕가의 일부에서도 천주교를 종교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같이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그것도 집권세력안에 알게모르게 천주교의 전파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런 가운데 정조가 죽고 새롭게 순조가 등극하니 이참에 세력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벽파에게는 천주교가 시파를 없앨 더없이 좋은 빌미가 되어 주었습니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즉각 '조선의 유교를 침해하는 천주교를 발본 색출하여 없애라'는 명을 내려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켰는데 정순왕후는 이때 한명회의 오가작통법을 언급하며 다섯집 가운데 한 집이라도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라는 연좌제를 명하여 실제로 이 연좌제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수 백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연좌제는 굳이 한명회의 오가작통법을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오래전부터 유사한 연좌제로 그 유래가 깊었는데 조선의 건국시기에는 살아 남아있던 고려의 왕씨들을 모두 잡아 죽이는데 적용되었으며 이후에도 범위와 경중의 차이는 있었지만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과 같은 참혹한 때죽음을 몰고온 사화나 이 괄의 난, 이인좌의 난과 같은 반역죄 등에도 어김없이 연좌제가 적용되어 봉건사회의 왕조국가에서 왕권에 대한 위협적 대상은 모두 제거하려는 권력자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가까운 현대에 이르러서도 세계적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던 연좌제는 이를 적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공포정치나 스탈린의 대숙청,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홀로코스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연좌제로 생각됩니다. 또한 북한에서는 최근에 알려진대로 장택상의 처형과 맞물려 그의 주변인들 모두를 처형시키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고 갔다는 사실 등은 북한 주민들 역시 대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거의 모든 것에 연좌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명회는 조선의 개국공신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부모를 일찍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져 청년기까지는 비교적 불우하게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친구 권 람과 어울리다 우연하게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 역전을 꿈꾸게 되었는데 두뇌 회전이 빨랐던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바꾸어 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명회는 자신의 계획대로 수양대군에게 제왕의 야욕을 부추겨 정난을 도모하였고 곧이어 그들의 계획에 맞춰 권 람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 인 등 세조의 앞길을 막는 반대파의 수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수양대군을 보위에 올리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한명회는 그 공로로 일등 공신이 되었으며 세조는 자신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한명회를 전폭적으로 신임하게 되었고 한명회 역시 정국에 피바람을 일으키며 임금이된 세조의 입장을 헤아려 빠른 시간내에 안정된 통치를 위한 갖가지 도움이 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가작통법의 도입이었으며 오가작통법의 도입은 겉으로는 면리제를 실시한 행정구역의 개편이기도 하지만 묵은지 생각으로는 조선 전역을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편에 무게가 더 실려 보였습니다. 오가작통법 자체가 정권의 출발이 불안정했던 세조의 잔재해 있는 반대파들이나 어느 지역에선가 있을 법한 또다른 역모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오가작통법은 후세에 독재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공포의 통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어 한명회가 세조를 위해 고안한 이 제도는 앞으로도 어떤 권력자가 어떤 방법으로 악용을 하게될지 항시 불안한 후유증을 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