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한반도기 / 이향규
RBL(Royal British Legion) 뉴몰든 담당자 잰의 이메일을 받았다. RBL은 영국군 참전 장병과 그 가족을 돕는 자선단체다. 지난해 6월에 런던한겨레학교가 주관했던 ‘6·25전쟁을 기억하는 평화행진’을 하면서 잰을 알게 됐다. 6·25전쟁에 영국군 약 8만 명이 참전했고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6·25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감수한 국가다.
“RBL이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이해서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 경마장을 빌렸어. 전쟁에 대해서 네가 짧게 발표해 줄 수 있을까? 그날은 무료로 음식을 나누고, 경마도 할 거야. 한국인들이 많이 오면 좋겠어. 퍼레이드를 하려고 해. 혹시 태극기가 있니? 국기를 흔들면서 걸으면 멋있을 것 같은데.”
6·25전쟁 정전 70주년 행사를 RBL이 한다니 반갑고 기뻤다. 내가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망설이긴 했지만, 그건 전쟁에 참전했던 내 친구 브라이언과 함께하면 될 것 같았다. 브라이언은 1953년 7월 27일에 서부전선 참호에 있었으니 휴전 당일 전선의 경험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테고, 나는 전쟁의 맥락만 짚어주면 될 터이다. 전쟁은 분단의 소산이고,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결과이고, 피식민지 국가의 원치 않은 운명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할 것 같다.
문제는 깃발이다. 잰은 “국기를 흔들면 멋지겠다”고 말했고, 그건 당연히 태극기를 의미한 것일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참가자 중에는 북한이 고향인 사람도 있을 테고, 어린이들 중 절반은 그들의 자녀일 거다. 더욱이 이 행사는 휴전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종전과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꾸는 것이 돼야 할 텐데, 그러려면 일방적으로 태극기를 흔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공기를 들기도 어려운 일이다. 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태극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대신 남북을 아우르는 깃발로는 한반도기가 있어요. 공식적인 국기는 아니지만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에서 남북 단일팀의 깃발로 사용해요. 그걸 들면 좋을 것 같아요.”
“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해 줄 수 있으면 정말 좋지. 그런데, 구하기 힘들면 아무 깃발도 안 들어도 좋아. 깃발은 중요하지 않아.”
한국에 가서 한반도기를 만들어서 올 참이다. 남과 북을 아우르는 깃발. 언젠가 통일국가의 깃발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은 그것뿐이니.
이향규 테오도라(전 런던한겨레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