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정 율리아나의 투병 단상
고통 앞에서 생의 소중함을 노래하다
36주 태아 사망 사건을 두고 낙태인지 살인인지 논하는 사회, 노동자의 목숨보다 자본의 이윤을 더 중시하는 기업, 올해 초 한날한시에 손잡고 동반 안락사한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를 미화한 언론, 또 고개를 드는 조력존엄사법···.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 생의 모든 순간이 침해당하는 시절이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기도 하지만, 이미 자신의 몸속에서 심장박동 소리를 내고 있는 태아의 생명마저도 타인의 결정으로 생사가 갈린다. 생의 고통을 직면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수명 단축이나 종결이 아니다. 생의 순간들이 기쁨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생명을 무한히 연장하고, 그 반대의 처지에 있는 이들은 그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할까.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을 마무리했을 때 받는 선물이다. 죽음 같은 고통 앞에서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존엄하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은 부활의 희망과 맞닿아 있다.
여기, 뮤지컬 배우로 삶의 청춘을 꽃피운 삼십대 청년이 있다. 느닷없이 찾아온 ‘암’을 손님처럼 마주하며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더 깊이 묵상하는 삶을 살게 됐다. 일상이라는 순간을 맑고 투명하게 길어올리고 있는 황수정(율리아나, 사진)씨의 투병 단상을 3개월간 연재한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퇴근하고 돌아온 동생이 종종 “오늘은 뭐 하고 지냈어?”라고 묻는다. 그럼 괜스레 마음이 뜨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가 떠오른다.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하루. 시간을 떠밀고 떠밀며 버틴 하루.
지난 2017년 제17회 cpbc 창작생활성가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찬양 사도로서의 화려한 데뷔를 알렸던 나는 다음 해인 2018년 2월 ‘침샘암’이라는 희귀암 판정을 받고 현재까지 7년째 암 투병 중이다. 당시엔 굉장히 초기 상태에 발견되어서 수술만으로도 완치 가능하다는 교수님의 소견하에 수술 이외의 치료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 이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한지 정확히 2년 만에 암은 재발했고, 다발성 폐 전이 진단까지 함께 받으며 나는 순식간에 4기 암 환자가 되었다.
수술과 방사선치료, 항암치료와 임상실험까지. 암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희귀암인 침샘암에 잘 맞는 항암제는 없었고, 독한 약제에도 암세포는 끈질기게 되살아나며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쳤던 나는 투병 중에도 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았다. 본래 직업이 뮤지컬 배우였기에 공연 무대에 오르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초·중·고등학교 예술강사로 수업을 나가며 가르침에도 열성을 다했다. 틈틈이 수어 공부를 하며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하고, 찬양 봉사 또한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겁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다 보면 분명 암도 다 사라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작년 봄, 원발부위였던 입천장을 시작으로 폐·척추·골반·뼈·근육, 심지어 뇌까지 빠른 속도로 암이 전이되면서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그제야 나는 이루기 위해 쉼 없이 달렸던 삶을 멈추고 무기한 휴식에 들어갔다.
내일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였다. 주어진 오늘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절실했다. 너무 당연해서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먹고, 자고, 싸고, 숨 쉬는 일이 이토록이나 버거운 일이었다니. 절망스러웠다. 당연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생존하기 위한 나의 하루는 단조롭다 못해 지루했고 특별할 것 하나 없이 무기력했다. 그런 때에 정말로 오랜만에 가슴 뛰는 일이 찾아왔다. 바로 가톨릭평화신문에 기고할 ‘글쓰기’ 의뢰를 받은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날을 막연하게 기다려왔기에 글쓰기를 통한 주님의 부르심이 무척이나 기뻤다. 물론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내 힘으로 해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는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마음속으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부디 내가 주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는 맑고 투명한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오늘 저녁엔 퇴근한 동생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다. 어서 오렴, 동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