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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토요일. - 우리 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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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 집
지난달 한 젊은 부부의 집 축복식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만든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둘이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결혼할 때 제가 주례를 서고, 아이 세례도 제가 준 부부인데
처음으로 자기들 집을 마련하여 입주하면서 제게 집 축복도 청한 것입니다.
이혼이 많은 요즘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만도 대견한데
누구 도움 없이 자기들 힘만으로 집까지 장만하니 대견스럽기 이를 데 없었지요.
어쟀거나 그날 집 축복을 해주면서 제가 축복식의 의미를 얘기해줬는데
그것은 집 축복이 집에 부적을 다는 그런 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집 축복식을 할 때는 주님께서 우리 집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집에 영원히 계시도록 모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모시는 것도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수문장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주인으로 모시며,
우리 집 방 한 칸을 내어드리고 골방지기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사이에 사랑으로 함께 계시는 분으로 모시는 것이어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이 우리 집에서 이루어지겠지요.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거처인 우리 집,
주님의 성전인 우리 집,
하느님 백성인 우리,
이것을 꿈꾸고 이루는 우리 집이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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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9일 토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요한 11,49)
무의식적인 예언의 권위
‘그해의 대사제’라니 무슨 말입니까? 이 문제에서도 다른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당시엔 직위가 돈 주고 사는 것이 되어서, 사제들은 평생 사제가 아니라 한 해만 사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태에서도 영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슬러 손을 들자, 영은 그들을 떠나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이제 필자는 아마도 그대가 한번도 생각에 떠올리지 못한 한 가지 신비를 말하려고 한다. 성경의 가장 보잘것없는 말씀의 의미는 역사의 마지막 인간이 자신 안에서 긴 시간 그 말씀을 경청하고 그에 응답했을 때에만 환하게 또 충만하게 밝혀질 것이다. 한 그리스도인 세대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인 세대로 이어지면서. 말씀의 의미는 끊임없이 그 목록을 새로 작성하면서 풍요로워지고 가지를 쳐나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제 몸을 불려가는 강과도 같을 것이다.(108)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1주간 온유 /절제✝️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 1토요일 이웃 종교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
이 스라엘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일반 독자들에게 이러한 인용문은 다소 닌해할지도 모르겠다. 전승, 부족 동맹, 성소, 법궤, 남왕국, 북왕국, 야훼 기자, 신명기 역사 등 마치 외국어 서적을 읽는 듯한 매우 낯선 단어들과 접하면서 총체적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독지의 느낌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 인용문은 적어도 약 2천 년 가까운 이스라엘 역사의 우여곡절을 그 정신사의 맥을 따라 짚어 내려가는 것일 뿐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낯선 단어들은 18세기 이후 성경에 대한 학문적 비평 연구 결과를 부분적으로 나타내는 어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의 보충 설명을 덧붙여 본다면 그 전모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복잡다단한 구약성경.의 세계를 한눈에 꿰뚫어보는 지혜의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연대기적 흥망성쇠에 대한 간략한 예비 지식이나.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고대 비빌로니아제국의 영웅 함무라비 대왕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사실은 언급한 바 있다. 이 시기는 대략 기원전 1850년 전후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구체적으로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히브리 족속이 팔레스타인의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로 이주한 뒤 , 고센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다가 이 집트 19왕조 람세스 2세 치세 때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여 고생한 후 이집트를 탈출한 시기가 기원전 1250년 전후이니까, 이집트에서 약 600년 동안 거주한 셈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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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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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구상에는 인간처럼 뇌가 있는 생물이 많을까요? 아니면 뇌가 없는 생물이 많을까요? 실제로 뇌가 없는 생물체가 월등하게 많다고 합니다. 생물체의 총중량을 따져도 압도적입니다. 이는 뇌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동물들은 대부분 뇌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처럼 큰 뇌를 가진 동물은 많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유일하게 뇌를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한 유일한 종족이라고 합니다.
생물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뇌 개발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라고 합니다. 뇌는 방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비효율적인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심한 두통이 생겼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요. 바로 모든 에너지를 뇌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 뇌의 크기를 줄이고 때로는 없애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치와 의미를 따지면서 진정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많이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서 사는 삶입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는 생물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서 인간다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들의 고발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억지스러운 정치극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내버려 두면 사람들이 믿게 되어서 왕으로 추대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로마의 군사력을 자극하게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민족을 짓밟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신 적도 없고 또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예상대로 40년 후에 예루살렘 멸망을 현실로 맞이하게 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허위적인 전제에 나온 것으로, 이 말 이후 예수님을 죽일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을 제거하려는 모습에서 참 인간의 모습을 찾기 힘듭니다. 그보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참된 가치와 행복을 찾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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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낮춤’은 잘못을 고백하는 겸손한 행위입니다. 낮춤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의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에 맡긴다는 뜻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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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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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요한 11,50)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가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는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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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나로 모으기 위한 일에 동참해야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라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카야파는 의회의 결의를 독려하고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은 카야파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이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궂은일은 내가 하고 생색나는 일에는 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지요?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모으기 위한 노력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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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백성이니라
사순시기가 막바지에 접어 들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성주간이 시작되고, 그 주간 안에 파스카 성삼일을 보내게 됩니다. 이 성삼일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부활성야미사를 통해 부활시기로 넘어갑니다.
에제키엘이 예언한 메시지는 세 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는 말씀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 즉 신앙적 정체성이 분명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 다음,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한 민족이 되리라.”는 말씀은 본시 하나였으나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통합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신앙과 통합이 가능해질 수 있게 하는 표지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신앙적 정체성이 뚜렷해져서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가시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면 더 이상 흩어져서 반목하지 않고 서로 통공을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성전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더욱 뚜렷이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위가 신앙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또한 제도적이고 법적으로 구분된 종교집단을 넘어서 갈라진 겨레를 한데 모을 수 있는 공동선으로 뭉친 하느님 백성입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에게 열려진 미래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구심점은 그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게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는데 그 목적은 바로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힘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일으키신 기적들 중 마지막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는 당대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하신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모인 예루살렘 군중 안에서 퍼져나가자, 이에 불안을 느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대책회의를 열어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경건하게 믿어온 사람들이라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적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당신이 신적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따라서 믿는 이들의 미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온전히 이끄실 수 있는 하느님이심을 나타내어 주신 바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2장에서 11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이 모두 일곱 가지의 기적이 그 표징들이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요한 2,1-11)이 첫 번째요, 헤로데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요한 4,43-54)이 두 번째입니다. 3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고생하던 앉은뱅이를 벳자타 못가에서 고쳐주신 기적(요한 5,1-9)이 세 번째요, 오천 명도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요한 6,1-15)이 네 번째이며,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구하시러 급히 오시고자 갈릴래아 호수 물 위를 걸으신 기적(요한 6,16-24)이 다섯 번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이를 보게 해 주신 기적(요한 9,1-12)이 여섯 번째이며,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요한 11,38-44)이 마지막 일곱 번째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기적으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신 가운데에서도 특히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능력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결정적으로 우리의 신앙의 목표와 희망이 되셨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하여 신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목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며, 그 신앙적 정체성을 통해서 믿는 이들이 서로 통공하게 될 것이고, 이렇듯 믿는 이들의 통공으로 이룩되는 새 하느님 백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새 성전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은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을 알아보기 위한 표지가 다섯 가지나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과 성찬, 서로 섬기는 삶,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기 그리고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 다섯 가지 양식을 모르고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통공 그리고 우리의 성전이 그 양식들에 들어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다가올 성주간 전례에서 십자가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파스카 신비를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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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로마는 제국을 이루면서 식민지를 통치했습니다. 로마의 통치 방법은 직접 통치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에서 엘리트들을 선발하였고, 그들이 식민지를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에서 2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는 로마에 대한 충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금의 납부였습니다. 로마는 반란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진압하였습니다. 반란을 주도하는 사람은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대사제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는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배층을 새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누리던 특권과 권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에도 이스라엘의 지배층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친일파’라고 불렀습니다. 친일파에게는 대한민국의 독립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너무나 강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현재 누리는 부와 권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율법과 안식일의 규정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죄인들, 이방인들, 과부들, 고아들, 병자들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처럼, 마카베오 가문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와 희망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에게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율법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배층은 로마의 힘을 빌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로마에 반란을 도모한 반역자로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에 반란을 꾀한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하느님의 뜻은 로마라는 강력한 제국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과 계명을 잘 알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로마의 힘에 의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서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나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들춰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 원하는 일을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파수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등대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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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9.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一致의 중심
-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
삶은 반복입니다. 이 또한 진리입니다. 사실 반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문득 말씀 묵상중 코헬렛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코헬1,9-10)
매년 반복되는 일년 사계절이요, 계속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톨릭교회의 전례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 현실은 안타깝게도 때로 보복의 악순환의 반복처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사화士禍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느낌입니다. 어제 받은 카톡의 짧은 글귀도 생각납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은데(年年世世花常似)
사람은 해마다 달라지네.(世世年年人不同)”
세월흘러 육신은 노쇠해 가도 내면은 낡아지지 않고 늘 새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에겐 단조로운 일상의 평면적 반복이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내적여정중의 반복이요 거룩한 반복이겠습니다. 이래야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수도사제로서 33년동안 강론을 해오면서 체험하는 바, 반복의 진리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조했고 지금도 반복하여 강조하는 강론 주제는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 ‘일치의 중심’등 참 많이 반복한 주제였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강론 주제는 “일치의 중심-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실 참 중요한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중심을 잃었을 때 무질서의 삶에 복잡 혼란한 삶이요 내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해 방황하고 표류하는 삶은 얼마나 많은 지요! 이래서 우리의 정주서원이 고맙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고 고백하며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라 고백합니다. 예전 피정자들에게 자주 강조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마음이 맞아서, 이상이 같아서, 성격이 같아서, 취향이 같아서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아야 일치이다. 바로 일치의 중심은 하느님이요, 일치의 중심인 주님이 없이 다양성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 삶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수도원의 가시적 중심인 성전에서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를 반복하여 바치기에 비로소 공동체의 일치와 유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반복이지만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 말씀이나 복음 말씀도 일치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남북으로 갈라진 남북 왕국의 통일을 예언합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한반도의 남북의 통일은 언제나 올런지요. 통일에 앞서 우선적인 것은 평화의 정착이요 부단히 일치의 중심을 모색하여 실천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대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서 모든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죄악이 일소되어 모두가 정화될 때 비로소 공동체의 일치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마침내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또 매일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평화의 계약입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미사를 거행하는 주님이 계신 이 성전이 공동체 일치의 중심임을 밝혀주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일치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오늘 복음은 보여줍니다. 대사제 카야바의 예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에 대한 복음 사가의 해석이 핵심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카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 예언한 셈이라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카야바는 주님의 예언의 도구가 된 셈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 바로 이것이 카야바 자신도 모른 예언의 진실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모두가 하느님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한 평화의 계약을 실현하셨고 지금도 평화의 계약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실현됨을 봅니다.
명실공히 온 인류의 일치의 중심이 되시어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우리의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평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수도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중심의 견고하고 평화로운 일치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사순 제5주간 지난 한 주간 내내 복음 화답송 후렴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일치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미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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