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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24) 전례에 쓸 수 있는 악기는 오르간뿐이다?
악기 연주는 하느님 찬미 '노래' 도울 뿐
성당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있습니다. 전례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오르간입니다. 큰 규모의 성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성당에는 오르간이 설치돼 있습니다.
교회는 오르간 축복 예식도 따로 거행하는데요. 오르간 축복 예식은 「축복 예식」 중에서도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 축복 예식’ 항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례대나 감실, 성당문, 성화상, 십자가의 길 등 성당 안에서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축복하는 예식서들을 모은 곳에 오르간 축복 예식서도 있는 것이죠.
교회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전례 거행에 가장 어울리는 악기는 오르간”이라면서 오르간을 “적당한 자리에 놓아 성가대와 교우들이 노래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악기만 연주하는 경우에는 모든 이가 잘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명시할 정도로 오르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393항, 313항 참조)
이처럼 교회 안에서 오르간의 위상은 특별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라틴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은 전통적인 악기로서 크게 존중돼야 한다”면서 “그 음향은 교회 의전에 놀라운 광채를 더하고,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이 힘차게 들어 올릴 수 있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전례헌장」 120항 참조)
이처럼 교회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오르간이지만, 사실 교회가 처음부터 전례에 오르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전례에 악기를 도입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오르간 역시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9세기 무렵부터 하나, 둘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교회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이 설치된 곳은 독일의 아헨주교좌성당(812년)이라고 하는데요. 이후로도 오르간은 여러 성당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교회 전례를 위한 중요한 악기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전례 중 악기 사용은 오르간만 가능한 것일까요? 오르간 말고 다른 악기들도 전례 중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르간과 달리 다른 악기들은 일종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전례헌장은 오르간 외의 다른 악기들은 지역 교회의 판단과 동의에 따라 거룩한 용도에 적합하고 성당의 품위에 맞으며 신자들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전례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한국 교구들도 오르간 외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를 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전례 중 관악기와 현악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악기는 특별한 경우에 신중하게 검토해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오르간이지만, 그렇다고 전례 음악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전례 시기 중 대림 시기에는 오르간과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절제하고, 사순 시기에는 노래 반주에만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주에만 쓸 수 있다는 것은 악기만으로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례 음악에서 오르간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알기 쉬운 미사 전례] (24) 평화를 기원하는 그리스도인
바로 옆의 이웃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평화
제1차 세계 어린이의 날(2024년 5월 25~26일)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린이들은 ‘평화의 창조자’가 돼야 합니다”라고 하시고, “고통받는 또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에게 기도해달라고 당부하시는 교황의 말씀은 평화가 어느 특정 그룹이 아닌 모두의 과제이며,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부터 시작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교회는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주님의 기도 이후에 평화 예식을 배치하여 평화는 바로 옆의 이웃부터 시작해서 널리 퍼져가야 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예식은 예수께서 산상 설교에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려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가르침(마태 5,23-24 참조)에 따라 이미 2세기부터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155년경 기록된 유스티노의 「호교론」 제1권 65장에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빛을 받은 이와 모든 곳의 다른 모든 이를 위해 함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 기도가 끝나면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곧 지금의 ‘보편지향기도’를 하고 ‘평화 예식’이 뒤따랐고 ‘예물 봉헌’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식 순서는 동방 전례에서 아직도 유지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5세기 초엽, 대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해 오늘날의 자리인 ‘감사 기도’ 후 ‘평화 예식’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성직자 중심으로 거행되던 전례 경향에 따라 이 예식은 성직자들끼리만 나누는 평화 예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고대 전통에 따라 평화 예식을 빵 나눔과 분리시키고, 신자 모두가 참여하여 이웃과의 화해를 통한 영성체 준비 성격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평화 예식은 세 부분, 기도 초대문을 포함한 ‘평화의 기도’, 공동체를 위한 ‘평화의 기원’, ‘평화의 인사’로 진행됩니다. 사제는 평화의 기도로 이끄는 초대문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는 평화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을 확인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샬롬)는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평화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것과 같이 미래의 구원자,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평화로서 하느님과 인간 및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를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당신의 현존과 관련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요한 복음 주해」에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 영혼은 언제나 평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는 평화의 인사는 아우구스티노 시대 이전부터 전례에 들어왔습니다. 이 인사를 통해 교회는 자신과 온 인류 가족의 평화와 일치를 기원합니다. 또한 사제가 교우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자세는 기도 권고나 주례 기도 때와 달리 교우들을 포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과 평화를 연결시킵니다. 2~3세기 교부들인 유스티노와 히폴리토 등의 저서에서 이미 전례 예식으로 소개됩니다.
평화의 인사는 민족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정할 수 있는데, ‘한국 교구들에서는 평화의 인사로 가벼운 절’을 하기로 했습니다(「로마미사경본 총지침」, 82항). 평화 예식은 주님과 함께 그분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마중물입니다.
[기도하는 교회] 미사에 이어 삼종기도를 바치는 것이 맞나요?
삼종기도는, 단순한 구조와 성경에 근거한 내용으로 평화를 빌며, 아침, 낮, 저녁 시간을 성화하는 전례 리듬을 따라 성자의 육화로 시작된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교황 바오로 6세, 「마리아 공경」 41항, 1974년)
중세 수도원 시간전례에서 기원한 이 기도는, 라틴어를 몰라 시간전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배려해 모국어로 간단한 고정 후렴과 성모송을 바치게 한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11~13세기에 공식화되었습니다. 14~16세기는, 아침, 낮, 저녁 시간전례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이 기도를 바치는 관습이 정착되었습니다. 현재와 같은 형식은 16세기 말 이후로 나타나는데, 성모송을 세 번 낭송하면서 육화신비와 관련된 세 개의 성경구절(루카 1,28; 1,38; 요한1,14)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삼종기도는 전례로 선언되지 않았으며, 시간전례에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이 따로 바치는 기도이기에 시간전례에 이어 삼종기도를 바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중복’입니다.(전례헌장 50항)
미사에 이어 삼종기도를 바치는 것도 원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삼종기도는 시간전례 대신 바치는 것이며, 시간전례는 미사의 은총을 하루의 각 시간으로 확산하여 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그 자체로 온전한 기도이며, 미사 전후에는 침묵 속의 개인 기도로 전례와 일상을 연결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교우들의 기도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미사 전후에 삼종기도를 함께 바치는 것은 사목적 판단에 속할 것입니다. 다만 미사에 바로 이어 삼종기도를 바칠 때는 파견과 강복을 뒤로 미루는 것이 예식의 의미를 살리는 좋은 방법입니다.
[전례 일반과 미사의 Q&A] (2) 입당송
성가 없는 미사 봉헌 시에 저희 본당은 해설자가 입당송을 혼자하고 있습니다. 신자분들과 합송하는 건 안 되나요? (영성체송은 합송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모인 다음 사제가 (부제와 봉사자들과 함께) 들어올 때 입당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미사 거행을 시작하고, 함께 모인 이들의 일치를 굳게 하며, 전례 시기와 축제의 신비로 신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그들을 사제와 봉사자들의 행렬에 참여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7항). 가톨릭대사전에서 “입당송”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입당송은 시편이나 예언서에서 발췌한 짧은 구절로 교송과 함께 로마 전례의 미사에 있어서 집전 사제가 제단으로 나오는 동안 불려진다.”
우선 입당 성가는 성가대와 교우들이 교대로 부르거나 비슷한 방법으로 선창자와 교우들이 교대로 부르거나, 노래 전체를 모두 함께 부르거나 또는 성가대만 부를 수 있다고 전합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8항). 이러한 의미에서 입당 때 성가를 부르는 것이 권장되어집니다. 그러나 입당할 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입당할 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로마 미사 경본’에 실린 입당송을 신자들이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독서자가 낭송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제가 직접 낭송한다.”
이 지침을 해석해 보자면, 신자 전체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 곧 독서자, 해설자가 낭송하거나 또는 사제가 낭송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해설자가 혼자 낭송한다고 해서 지침을 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입당 성가가 가지고 있는 목적을 바라본다면, 신자 전체가 사제를 맞이하며 입당송을 부르는 것이 가장 권장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입당송은 5세기 로마의 대성전에서 교황이나 주교가 미사를 집전할 때 성당까지 긴 행렬을 했는데 이 행렬 동안 모든 신자가 다함께 시편 하나를 외우는 데서 유래합니다. 7~8세기에는 성당 구조의 변경으로 인해 긴 행렬이 없어지고 짧은 행렬이 이루어지면서 시편 전체가 아닌 그날 축제의 의미와 부합되는 한 구절로 간략하게 바뀌게 되었는데, 이러한 점이 오늘날의 입당송의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입당송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의 입당을 환영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환호소리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환호라고 한다면 어떠한 모습이 더 합당하겠습니까?
[교회 상식 팩트 체크] (23) ‘약식 제의’는 없다?
‘제의’와 다른 ‘예절 장백의’는 이럴 때 입어요
신부님 여러 명이 함께 미사를 집전하시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럼 제대 가운데 계시는 주례 신부님과 함께 집전하시는 신부님들의 복장이 다를 때가 있다는 걸 알아채셨을 것 같습니다.
주례 신부님은 품이 큰 반원형의 옷을 입고 있는 반면, 다른 신부님들은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흰옷에 긴 띠를 목에 걸치고 계시기도 합니다. 일단 주례 신부님이 입으신 옷은 ‘제의’입니다. 그럼 다른 신부님들이 입고 계신 옷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신부님들의 이 옷을 두고 ‘약식 제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옷은 사실 ‘약식 제의’가 아니라 장백의에 영대를 걸친 것입니다.
장백의는 사제가 미사 때 갖춰야 할 육신과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이름 그대로 옷자락이 긴(長), 흰(白)색의 옷(衣)입니다. 그리고 장백의 위로 목에 걸쳐 두르는 폭이 넓고 긴 띠는 영대라고 부릅니다. 영대는 사제의 직책과 의무, 권한과 품위를 드러냅니다.
여러 전례 봉사를 하면서 신부님의 전례복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어? 장백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제의 안에 입는 장백의는 더 얇고 목 부분의 모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대만 걸쳐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백의를 일반 장백의와 구분해서 ‘예절 장백의’라고 부릅니다.
제의는 장백의와 영대 위에 걸쳐 입는 옷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상징하는 전례복입니다. 무엇보다 “미사나 미사와 직접 연결된 다른 거룩한 예식 때 주례 사제가 입어야 할 고유한 옷”(「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37항)이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신부님들은 반드시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절 장백의는 어떤 경우에 입을까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는 “공동 집전자들 수는 많고 제의가 부족할 때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주례자를 뺀 공동 집전자들은 장백의 위에 영대만 메고 제의는 입지 않아도 된다”(209항)고 설명돼 있습니다.
미사 중 우리에겐 신부님의 제의만 보이지만, 신부님은 제의 안에도 여러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장백의와 영대 외에도 악마와의 투쟁, 극기, 금욕생활을 의미하는 ‘띠’, 어깨에 걸치는 장방형의 아마포로 ‘구원의 투구’를 상징하는 ‘개두포’도 착용합니다. 이 5가지 전례복에는 각각 전례복의 의미를 담은 기도문이 있는데요. 신부님들은 미사 전 이 전례복들을 하나씩 입을 때마다 각각에 해당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미사 때마다 겹겹이 옷을 입고 제대에 오르십니다. 물론 이 모든 전례복은 신부님들의 평상복이라 할 수 있는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 위에 입습니다. 신부님들이 항상 전례복을 갖춰 입는 것은 거룩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겠지요. 날이 점점 더워져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성당을 찾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신부님만큼 옷을 여러 겹 껴입지는 않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옷차림을 단정히 한다면 더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알기 쉬운 미사 전례] (23) 영성체를 위한 준비 기도인 주님의 기도
그리스도와의 일치 준비하는 공동체 기도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는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특히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자기 자녀들의 이런 마음을 잘 헤아리는 부모는 자녀가 행한 결과에 대해 인정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좋은 결과가 있을 때만 ‘칭찬’해 주는 부모보다, 자녀가 어떤 일을 해 나가는 과정의 노력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격려’해 주는 부모의 자녀가 훨씬 자존감이 높다고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격려를 잘 드러내는 것이 ‘주님의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로 가기 위한 여정에서, 하느님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며 무엇보다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현행 미사에서 교회는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기도, 곧 마태오 복음(6,9-13)과 루카 복음(11,2-4)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주님의 기도를 평화의 인사 전에 바칩니다. 이미 4세기에 로마 교회는 이 기도를 대부분의 동방과 다른 서방 교회에서처럼 빵을 쪼갠 후에 낭독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년)은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감사 기도 다음으로 배치했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기도가 감사 기도의 완성을 이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미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일상생활에 필요한 양식 외에 천상 양식인 성체로 여겼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훌륭한 청원을 영성체 준비로 간주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주례자의 기도’로 삼아 사제 혼자 바쳤으며, 신자들은 마지막 청원인 “악에서 구하소서”만 함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1964년 「전례 헌장」의 올바른 실천을 위한 첫째 훈령 「세계 공의회」 48항은 이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복귀시켰고, 기도 끝에 부속기도가 이어지기 때문에 “아멘”은 삭제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자세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부속기도는 이미 초세기 동방과 서방 전례에서 나타납니다. 부속기도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주님의 기도 마지막 두 청원인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악에서 구하소서”를 확대한 내용으로, 모든 악으로부터 해방과 현세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와 근심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는 권고에서 알 수 있듯이 초 세기부터 주님의 기도는 오직 세례받은 신자들만이 바칠 수 있는 신자 전용 기도입니다. 2세기 초에 작성된 「디다케」 8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세 번’ 바치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성무일도의 아침과 저녁기도, 그리고 미사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배치했습니다.
또한 신자 전용 기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옛 전통인 ‘주님의 기도 수여식’을 현행 「어른 입교 예식」에 복구시켜서 ‘정화와 조명의 기간’의 세례 전에 뽑힌 이들에게 ‘수련식과 수여식’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뽑힌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정신을 더욱 깊이 깨닫고, 이 정신으로 특히 성찬 모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어른 입교 예식」 25항)
[기도하는 교회] 미사 시간과 시간전례 시간이 ‘겹칠 때’는 어떻게 하나요?
시간전례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는 주님의 명에 따라 교회 공동체가 하루 전체를 성화(聖化)하기 위해 각 시간에 맞게 바치는 기도입니다. 과거에는, 이것이 성직자와 수도자에게만 의무로 주어진 기도임을 강조하여 ‘성무일도’(聖務日禱)라 불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간을 성화하는 이 기도의 본질을 복구하고자 ‘시간전례’라고 명명하였고, 하느님 백성 전체의 기도로서 본당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평신도 역시 이 기도를 바치도록 매우 권장합니다.(전례헌장 100항, 성무일도총지침 270항)
한편, 미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시간전례는 성찬례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간전례의 본질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 전체의 중심이요 정점인 미사성제”(전례헌장 83~84항)의 은총을 하루의 여러 시간으로 확산하여 그 시간을 성화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성무일도총지침 12항)
따라서 시간전례를 바칠 시간에 미사를 거행하는 경우가 생기면 이때는 시간전례를 생략합니다. 예를 들어 성목요일 저녁 주님만찬미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저녁기도를 바치지 않습니다. 또한 부활성야미사에 참례한 이들은 초대송을 생략합니다.
다만, 미사를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시간에 항상 거행해야 한다면 시간전례를 미사와 함께 거행하는 양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성무일도총지침 94항, 9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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