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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웍이 좋은 교회
출 18: 13-27
현대 교회들이 움직이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첫째, 전통적 방법으로 움직이는 교회, 둘째, 인물이 이끄는 교회(1인 카리스마교회)셋째, 재정과 넉넉한 예산으로 일하는 교회, 넷째, 프로그램으로 이끄는 교회, 다섯째 건물이 이끄는 교회, 여섯째, 역사성 때문에 운영되는 교회, 일곱째, 성령이 이끄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성령이 이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요소는 팀웍이 좋아야 합니다.Teamwork은 모두를 영웅으로 만들고 목적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축구는 개인기보다 팀웍이 좋아야 상대를 이길 수 있고 회사나 국가도 팀웍이 잘 이루어 져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이끄시지만 팀웍이 좋은 교회와 함께 일하십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팀웍이 가장 좋은 교회는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지도자로서 팀웍이 아주 좋았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 유대인과 헬라인,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라 팀웍이 잘 이루어 지므로 세계선교를 최초로 시작하여 성공한 아주 좋은 교회며 오늘날 교회들의 모델이 되는 교회입니다.
켄 플리차드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우리 집 누구도 우리 모두를 합친 것 보다 더 현명하지 못하다.”즉 많은 사람이 합치면 더 현명해 질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상식입니다. 교회가 팀으로 일하는 능력을 배양할 때 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큰 무리입니다. 영토만 없지 한 나라입니다. 그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치안, 법률, 행정이 모두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행정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은 때에 모세 혼자 200만 명의 행정을 모두 처리하다 보니 아침부터 밤중까지 일을 해도 일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뿐 만아니라 하루 종일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 해결을 못 보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고 이렇게 되니 원망과 불평이 생겼습니다. 모세는 모세대로 힘들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속상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지켜보던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빨리 조직을 만들고 행정을 분산시켜 일을 쉽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라고 하였습니다.(출18:16-22)
모세는 현명할 뿐만 아니라 행정의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을 갖춘 것입니다. 200만 백성을 지파별로, 그리고 1,000명 단위로 1,000명 안에 100명 단위로 100명을 50명씩, 50명을 10명 단위로 조직을 짜고 그 앞에 장을 세웠습니다. 천 부장 2,000명(팀) 백부장 20,000명(팀) 50부장 40,000명(팀) 십 부장, 20만 명(팀)으로 조직하고 백부장은 십 부장을 천 부장은 백부장을 지도하고 모세는 천 부장을 지도하며 행정 조직으로 각각 팀을 이루어 일을 하니 서로 편하고 능률이 오르고 책임감이 증대되고 서로가 보람 있고 국력이 강해져 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어떤 고난과 위험도 함께 이겨 나가는 능력이 강해 진 것입니다.
우리는 2009년도를 위하여 오늘 집사님들을 임명합니다. 교역자가 네 명입니다. 장로가 세분이 됩니다. 권사님들이 9명입니다. 시무권사가 10명입니다. 안수집사가 10명입니다. 여 집사 22명입니다. 서리집사 남자가 44명이고 여자가 68명입니다. 합하여 우리교회 모든 제직이 181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수주 중앙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일꾼입니다.
(1) 우리는 한 팀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팀은 개인플레이하면 안 됩니다. 팀이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군대 조직에서 분대와 소대 중대 대대가 있습니다. 가장 결속력이 있는 단위는 분대와 소대입니다. 이 팀은 생사고락을 같이 합니다. 적탄이 비처럼 쏟아져도 대장이 공격명령을 내리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정신무장과 훈련이 잘 돼 있을 때 그 팀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팀웍이 전쟁의 승패를 가름합니다.
기업이나 관공서들도 팀웍이 잘 돼 있을 때 능률이 오르고 생산성을 높이고 조직원들의 사기가 진작되고 목표를 달성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조직에서는 팀웍을 잘 이끌기 위하여 멘토링, 리더십 훈련, 연수교육, 실무교육, 성과급 제도, 조직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얼마 전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팀과 한국의 축구팀의 게임에서 한국팀이 19년 만에 2:0으로 이겼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 성수를 팀 주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박지성이 팀을 잘 이끌고 있어서 소위 빅지성 리더십이 뜨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지성 리더십은 히딩크 리더십에서 왔습니다. 히딩크 리더십은 개인플레이를 배제하고 팀웍을 우선시 하고 수직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인간관계를 중요시 하고 영웅주의를 타파하고 팀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지도력으로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라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 팀이라는 말은 성경신학적으로 말하면 한 몸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전12:4-5)“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제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로2:16)라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고하였으며 교회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4:2-6)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수주 중앙 교회의 한 팀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시고 묶어 주어, 하나 되게 한 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밖으로는 복음전파,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안으로는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엡4:11-12) 한 팀이라는 말은 한 운명체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일터에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경영학 적으로는 이익을 남겨야 하고, 군사학 적으로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싸워야 하고, 영적으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대로 선교명령을 수행하는 교회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영적 전우애, 혹은 강력한 팀웍으로 뭉쳐 악한 영의 세력들과 싸워 이기고 복음전파, 하나님 나라 확장에 전력하는 제직들이 되기 원합니다.
(2) 팀으로 일할 때 능률적으로 일 할 수 있습니다(출18:26)
“그들이 때를 따라 재판하고 어려운 일을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였더라.”모세 혼자 재판 할 때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모세 곁에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출18:13)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행정조직을 한 후 일을 분담하여 하니 엄청나게 능률이 오른 것입니다. 팀으로 일하면 빠르고 강한 효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팀으로 일하면 내가 모르는 것을 팀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고 서로 의견을 교환 할 때 그 일이 쉽게 이루어 짐을 압니다.
저는 컴퓨터를 깊이 모릅니다. 워드 작업과 인테넷 사용하는 하는 정도입니다. 컴퓨터를 배워 보려고 책을 읽어보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내용들이라 알 수 없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은 학교에 가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간단한 것도 책을 찾아 알아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제 아들들이 모두 컴퓨터를 잘 합니다. 그래서 물으면 간단히 끝납니다. 컴퓨터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가장 신속한 것은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것입니다. 팀의 효과와 능률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산삼을 캐면 부자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쩌다 산에 가게 되면 혹시 산삼은 없을까 유심히 살펴보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산삼을 발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마니들의 말에 의하면 산삼은 여기저기 나지 않고 한 곳에 몰려 있다고 합니다. 산삼의 씨앗이 가까운 곳에 떨어져 서식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산삼을 발견하면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살펴보아야지 돌아다니다 보면 산삼을 밟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재도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보면 팀 가운데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 집사님들, 그리고 모든 집사님들과 우리 교역자들이 저의 목회 파트너, 또는 좋은 스태프가 되어 함께 능률적이고 창조적이고 진취적으로 일하기를 원합니다. 화학자 퀴리부인과 그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함께 연구하여 명성을 날렸습니다. 초현실주의 작가 가운데 루이브르넬이라는 사람과 살바도로 달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긴밀한 교류를 통하여 탁월한 미술가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각각 개인플레이 하였으면 위대한 미술가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함께 교류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비틀즈는 음악의 황제 칭호를 듣습니다. 하지만 레논이나 폴 메카티니가 따로따로 있었다면 위대한 작품이 나왔겠습니까? 둘이 같이 있으니까 그런 음악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팀을 통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과 여호수아 갈렙이 한 팀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서 민족을 이끌었지만 르비딤 전투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고 아론과 훌은 옆에서 팔을 붙들어 주지 않았습니까? (출17:8-16)그 전쟁에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은 팀웍이 거둔 승리입니다.
혼자서 열심히 뛰면 개인 속에 있는 잠재력 개발에 그칩니다. 한계에 부딪칩니다. 그러나 함께 하면 100배, 1,000배의 결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 하고 머리도 좋던 친구가 30, 40년 뒤에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인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공부도 잘 못하고 별 볼일 없었는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크게 일하는 사람을 봅니다. 이유는 팀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수주 중앙교회에서 팀으로 함께 섬기고 제자 훈련을 받고 영적으로 성장한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팀으로 함께 일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3) 팀원들의 자격이 있습니다(출18:20-21)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세워”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팀은 좋은 사람들이 뭉칠 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인 것을 팀이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구성원들이 기본적이고 신앙적인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서로 맞고 얼굴을 맞대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아주 기본적이고 신앙적인 자격조건을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말씀으로 잘 훈련 된 사람입니다(출18:21)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그르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대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사원은 회사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공무원은 국가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군인은 부대장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교회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하고 기본적인 임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50세 미만은 성도들은 제자훈련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2)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출18:22)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능력과 실무적인 능력, 둘 다 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영적인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령님께 자신을 맡기고 내 생각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앞세우고 성령님의 인도와 감동하심에 민감하고 자신을 매일 죽이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할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학식을 의지하지 않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있느니라.”(빌4:13)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능력을 다른 말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7명의 집사들의 자격 조건은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하며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 듣는 사람”(행6:3)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이 충만해야 귀하게 쓰십니다. 실제로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설교도 잘 했고 순교까지 했으며 빌립 집사는 에디오피아의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전도여 세례를 주었고 그의 세 딸들은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 모든 팀원들이 성령 충만하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출18:21)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은 경외한다는 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진실하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며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창22:12)아들 이삭까지 바쳤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한 팀을 이루어 일 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2009년도 우리 교회 항존직 제직들과 모든 제직들은 출 애급 광야교회를 본받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했다고 칭찬 듣는 제직들이 되기 원합니다. 목회자와 제직들, 제직들과 목회자, 목회자와 성령 하나님, 제직들과 성령 하나님, 제직들과 모든 성도 모든 성도와 성령 하나님이 팀이 되어 일하는 2009년도에는 놀라운 부흥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이드로의 조언
출 18: 13-27
모세가 반역하는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길을 가느라고 지쳐있을 때 모세의 장인이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찾아와서 모세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었는데, 과거 가장 힘든 날에도 찾아와 주시고 도와주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용기와 위로를 부어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모세의 장인은 얼마 동안 모세와 같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드로가 보니까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자기들의 문제를 고하고 판결을 받고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재판하러 오는 것을 모세 혼자 만나서 듣고 판결하느라고 하루 종일 진땀을 빼고 있었습니다.
이드로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해 주었고, 그 해결책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길만 걸어간 것은 아닙니다. 수백만 명이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교회가 기껏 몇 백명 정도의 성도와 함께 2박3일 동안 수련회를 하면서도 사고도 나고, 다치기도 하고 익사사고도 났다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교회는 500명이나 다녀왔지만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은혜만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 백 만명이 40년을 여행하는데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났겠습니까? 그들은 길을 가면서 서로 싸우고 거짓말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를 당연히 모세에게로 가져왔고, 모세는 그들의 문제를 듣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하나 해결해 주었습니다.
처음 한두 가지 정도였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시간이 감에 따라 사건이 많아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재판하는 날이 되면 백성들은 아침부터 분쟁거리들을 가지고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하루 종일 그들의 문제를 듣고 판결하느라고 시간을 다 소모하고 있었고, 백성들도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하루 종일 줄을 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나 백성들이나 모두가 진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결을 받으려고 모세를 찾아온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고, 모세는 감당 못할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바꾸어야 한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드로가 보니까 일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요?”
모세는 자신만만하게 백성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나아오는 것이며, 그들이 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오면 내가 양편의 말들을 듣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판단하여 준다고 대답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하는 태도였습니다.
장인이 보기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이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지혜 없이 행하는 것과 백성들이 고생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심각하게 잘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모세가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었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요? 과거부터 해오는 그 일에만 집착하는 고집이고, 안일한 습관에 안주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하지 않는 게으름이고, 자기가 하는 일만 제일이고, 다른 사람은 나처럼 일을 잘 할 수 없다는 독선입니다.
15절에 보면 모세는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만 계시고 자기와만 말씀하시고, 자기를 통해서만 선악 간에 역사하신다고 믿는 독선과 아집이 어느새 모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6절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 오나니, 내가 그 양편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나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 할 수 있고, 나만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만 백성의 일을 가장 잘 알며, 자기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알 수 있으며, 자기만이 그들에게 바른 판단을 해 줄 수 있다는 독선이 엿보입니다. 이런 편견과 오판이 정치적인 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인데 모세에게도 그런 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드로가 보니 그것은 일과 책임이 분담되지 않고 모세 혼자서만 모든 일을 다 하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문제점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해왔던 민족입니다. 430년 만에 겨우 해방을 받아서 곧바로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들이 언제 책임을 지는 일을 해 본적이 없었고,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맡고 책임지는 훈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의타적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시키지 않으면 안하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그들은 그런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모세도 그들이 의례 그런 사람들이거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책임과 역할이 분담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모두에게 피곤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판단할 필요 없이 모세에게 가지고 가서 묻고 시키는 대로 하니까 편했지만, 모세는 그 일이 너무나 과중한 부담이었고,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모세의 장인은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대안까지 제시하고 어떻게 고치라고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장인이 모세에게 "그대의 하는 일이 선치 못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선치 못하다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잘못되었다는 말로 책망과 같은 말입니다. 아무리 장인이라고 할지라도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지도자요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장인이라도 너무 함부로 말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장인의 말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모세의 위대한 점은 이런 겸손함에 있습니다. 민12:3에 보면 "이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런 장면에서 모세의 부드러움과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모세는 장인을 사적인 관계로 장인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보낸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인의 책망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남의 의견이나 충고를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한 가정에서 한 자녀만 낳다 보니 아이들이 제 가정에서 왕으로 자라났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해주고, 자식의 말이라면 쩔쩔매며 그 뜻을 다 받아주면서 기른 아이들이 성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남을 존중할 줄 알거나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알겠습니까? 그렇게 자란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는 왕이었을지 모르나, 밖에서는 왕따가 되고 독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어제 시청앞 광장에서 기독교인들과 향군들과 전직 국방장관등 군인들 수만명이 모여 사학법을 재개정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지금은 환수 받아서는 안 된다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대통령과 여당이 너무나 위태로운 길을 가기 때문에 나라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요구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을 왜 가졌느냐 하면, 전직국방장관 15명이 이 문제는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건의하려고 대통령을 만나달라고 해도 끝내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내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북한의 요구대로 한미연합사를 해체하려 하기에 너무나도 걱정되어 모였던 것입니다.
거칠고 막 된 사람은 남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어도 자기주장만 하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남의 충고를 오히려 분하게 생각하지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누가 자기를 책망할지라도 그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고 합니다. 비록 상대가 나보다 어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른 지적을 하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받는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8절에 보면 이드로는 그대로 가다가는 모세와 백성들의 지쳐버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체력과 기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는데, 몸의 유지를 위해서는 식사와 휴식이 필요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어떤 일이건 너무 과중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육체의 병이 됩니다.
그런데 이드로가 보니 이스라엘은 기다리느라 지쳐있고, 모세는 혼자 판단하느라고 지쳐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아주 귀중한 세 가지 권면을 하였습니다.
첫째, 그대는 소송을 하나님 앞에 베풀라고 충고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소송이란 말의 원뜻은 "그 말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들"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해결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모세는 백성들이 문제를 자기에게 가지고 오게 했고, 가지고 오는 문제를 자기의 지혜로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인의 말은 백성들의 일을 자네가 듣기만 하지 말고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이 모세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우선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설교라고 하고, 사람들에 관한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장인이 권고한 것은 모세더러 이제는 네 판단으로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일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민27:5에 의하면 슬로보핫의 딸들이, 자기 기파에는 남자가 없어서 땅을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 억울하다고 호소해 왔는데, 모세가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딸들에게도 상속해 주라고 하셔서 그렇게 판단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장인의 충고를 듣고 그대로 시행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그 사건을 기록하면서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문제를 모세에게 가져왔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로 물어서 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장인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20)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라는 것은, 백성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가르치는 일에 주력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충고입니다. 가르치는 일부터 잘 하면 재판할 일이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딤후3:15-17에 보면, 성경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말씀했습니다.
성도의 인격을 다듬어 세우는 일, 즉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성경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에게 백성들이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라는 말은, 가르치는 일에 좀 더 주력하라는 권면입니다.
딤전 4:11-16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딤후 4:5에서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는 훌륭한 충고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의 행정조직을 갖추라는 권면인데, 각 부장을 세우도록 권면했습니다.(21)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각 부장들을 세워 조직을 해야 하는데,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서 그들에게 백성을 나누어 맡기고, 그들이 자기가 담당한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많은 백성들이 빨리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그들이 해결 못하는 크고 중요한 문제만 모세에게 가져오게 하면, 모세도 다른 중요한 일들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옳은 지적이었습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장로제도가 생기는 최초의 순간입니다.
우리교회는 장로회주의를 채택하는 교회입니다.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성도들이 뽑아 세운 장로님들에게 교회를 책임지고 섬기게 하는 제도입니다.
우리교회는 장로님들이 재정, 구제, 교육, 전도 등 중요한 사역들을 한 분야씩 맡아서 책임지고 일하시기 때문에, 저는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인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고, 전체 방향을 잡아주고 감독하는 일을 여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도 수백가정이니 내가 일일이 다 심방 못하고 사정을 다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목사님 두 분과 전도사님 두 분이 나를 대신해서 성도들의 사정을 살피고 찾아가고 가르치고 도와줍니다. 부목사님이 심방 오면 별로 반갑지 않고 당회장이 가야 반가워하는 분도 있다던데, 부목사님은 나를 대신하여 가는 것입니다. 나를 영접하는 마음으로 부목사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장로교회는 모세의 장인이 제안하고 모세가 수용하여 시작한 부장제도를 시행하는 교회요, 이들이 모여 당회를 구성하여 교회를 책임지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장로제도가 가장 잘 시행되는 교회중에 하나입니다.
10부장은 열 명의 백성을 책임지는 반장 같은 사람이고, 100부장은 10명의 십부장을 관리하면서 백명의 백성들을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이고, 1000부장은 10명의 백부장을 관리하면서 천명의 백성들을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천부장들은 모세의 지도를 받아 백성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천부장이 가지오고는 백성들의 중요한 문제를 하나님께 고하여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모세는 이들 전체를 통치하고, 이들은 모세의 협조자로 동역했는데, 이들은 모세를 대신하여 자기가 맡은 백성들을 돌보므로 일이 훨씬 수월해 졌고, 백성들도 더 자주, 자세히 돌봄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모세의 장인은 어떤 사람을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으로 뽑아야할지, 그들의 자격도 제시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들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줄줄이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일군을 세울 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자를 뽑아 세워야 합니다.
21절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권을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위에 세워...”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나누어보면 다섯 가지의 자격을 검증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백성가운데서 선택되어야 합니다. 외부인사는 백성의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안 됩니다. 장로도 우리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한 분을 뽑습니다.
둘째, 재덕이 겸전한자. 즉 재능과 인격이 구비한 자입니다. 인품과 은사가 있는 사람을 세워야지, 인격이 모나고 은사가 없는 사람은 부적격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신앙도 하나 없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뽑으면 결국 교회나 국가를 망치게 됩니다.
넷째, 진실 무망한자. 즉 진실하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거짓되고 게으른 사람은 일도 못하고 해만 끼칩니다.
다섯째, 불의한 이득을 미워하는 자. 즉 사리사욕을 가진 사람은 자리를 가지고 돈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다이야기’ 사태를 낳은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부장들만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공무원이나, 교회의 일군들에게 똑같이 요구되는 사항들입니다. 딤전3:1-13에 그 자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23절을 봅시다.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장인이 덧붙인 말입니다.
장인은 꼭 이렇게 해야 한다고 무리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모세가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 있다면 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인가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똑 부러지게 지도해 주면서도 겸손하고 정중하게 조언하는 사람이 흔치 않을 텐데, 모세는 정말로 훌륭한 장인을 두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훌륭한 분의 훌륭한 권면을 누가 듣지 않겠습니까?
24절에 보면 "모세가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라고 하는 것을 볼 때, 모세는 이를 기뻐하였고, 하나님께서도 허락 하신 것 같습니다.
모세는 장인의 권고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재덕이 겸전한 사람들을 뽑아 이스라엘의 행정조직을 갖추었고, 통치체계를 세워 그대로 하였더니 매우 효과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지쳐있을 때 누군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고 충고해주십니다. 주의 종들을 보내어 주의 말씀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 권면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고, 마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지혜와 신앙뿐 아니라 관용하며 포용적인 인격까지도 보았습니다. 모세는 옳은 권고를 받아들였고 자격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그들에게 자기의 일을 분담시켜 백성 전체를 유익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온유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삽시다. 우리도 모세에게 선택된 부장들처럼, 신앙과 인격을 갖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읍시다. 딤후 2:15에는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물어봅시다.
나는 남의 의견이나 제안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가?
나는 하나님이 쓰실만한 진실무망하며 재능과 덕이 겸전한 사람인가?
나는 내가 해결 못할 문제를 가지고 가서 상의할 어른이 있는가?
나는 불의한 이익을 바라지는 않았는가?
나는 조언을 들으며 말씀의 권면대로 실천하는, 쓰임 받는 사람인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출 18: 13-27
초등학교 다닐 때 가을 운동회에 단골로 등장하는 경기가 하나 있습니다. 2인 3각 경기입니다. 두 사람이 안쪽 발을 서로 묶고 반환점을 돌아오는 경기입니다. 보기에는 쉽지만 막상 뛰다보면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마음은 급한데 생각처럼 앞으로 뛰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빨리 달려야겠다는 의욕이 앞섭니다. 그러다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뛰게 됩니다. 결국은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넘어집니다.
골인지점을 향해 빨리 뛰어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서로가 몸을 밀착하고, 발의 보폭을 서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외치면 한 사람이 달리는 것처럼 뛰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뛰어난 은사를 가졌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결국 본인도 넘어지고, 다른 사람도 실족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죠? 명심하세요. 당신 혼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동지를 찾으십시오. 없으면 동지를 만드십시오. 성경은 혼자서 고독하게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는 혼자 고독 속에서 수행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도와주고 격려하는 믿음의 동지, 신앙의 동역자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을 향해 나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미학자이신 최재천 박사의 세미나를 통해 들은 내용입니다. 개미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미는 서로 협력을 잘합니다. 개미 가운데 꿀벌개미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먹을 양식을 저장해야 하는데 꿀벌개미는 아직 저장기술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료개미들 가운데 스스로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꿀통이 되어 줍니다. 다른 개미들이 꿀을 가지고 와서 매달려 있는 친구개미에게 꿀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배가 터질 만큼 부릅니다. 이 꿀벌개미는 다른 동료를 위해 자신이 스스로 꿀통이 되어 무려 6개월 동안을 매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친구개미의 꿀이 떨어지면 거의 반사적으로 다른 개미가 스스로 꿀통이 되어 천장에 매달립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꿀벌개미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협력하고 희생함으로 꿀벌개미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고, 협력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감에 있어서 서로 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모세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합니다. 그 숫자가 남자 장정만 60만 명입니다. 아이들, 노인들, 여자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200-300백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사람이 몇 명만 모여도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말이 다른데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불평이 쏟아졌을까요? 그런데 이런 모든 일을 지도자 모세 혼자 감당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재판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모세도 지치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는 백성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본 이드로는 모세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모세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 가져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를 공적인 차원, 전체적인 차원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세상의 법정까지 끌고 가려고 하는데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방적인 차원입니다. 문제가 생긴 다음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시켜서 문제를 예방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를 세워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기 혼자만 일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백성들 역시 모세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지도자라 할지라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업의 원리입니다. 협력의 원리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드로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라고 합니다. 사건의 중요성에 따라서 역할을 분담하여 백성을 재판하도록 합니다. 이제는 모세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할 지도자를 세우고, 시스템을 만들어서 일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할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스템을 잘 만들어 놓아도 좋은 사람을 뽑지 않으면 결국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위치에 적합한 일꾼을 뽑아서 배치할 때만 좋은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모세를 도와 협력할 일꾼들을 선발하는 자격기준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기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지난 번 개역판에는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 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백성 위에 세워” 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자임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일꾼은 지식과 실력만 있어도 뽑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벌과 자격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은 인격적인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탁월해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의 일꾼으로는 부적합합니다. 그러면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일군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인가를 설명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다윗은 시편 14편 1절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불신자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없습니다. 타락한 자신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 결과는 부패합니다. 행실이 가증합니다. 악한 길로 달려갑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이 무신론자 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눈에 안보이니까 없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실제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이론적인 무신론자보다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디도서1:16에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말씀하십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계속 번성하자,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아기를 살려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의 명령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말씀하십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아기들을 살린 것입니다. 잘못하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집을 더욱 왕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죄책감과 죄의식에 눌려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사43:21).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 자신은 이미 영화로우신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대단한 사역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닮은 자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달이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듯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달은 단지 햇빛을 받아서 반사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거울을 가지고 햇빛을 비추면 반사가 이루어지듯이 우리는 단지 열심히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이 나타납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 앞서 먼저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날마다 묵상해 보십시오. 사람은 보는 대로 따라가고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고 언제나 피어나듯이 우리는 언제나 주만 바라보는 주바라기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비결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계1:14) 같으신 주님 앞에서, 민감한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나팔꽃을 영어로 ‘morning glory’ 라고 합니다. ‘아침의 영광’ 멋진 이름입니다. 나팔꽃은 아침 해가 떠오르면 함께 활짝 피어납니다. 식물학자들이 나팔꽃의 연한 순이 어떻게 큰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연한 순이 어떻게 벌어진 공간을 뛰어 넘어 계속 자라는가를 보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때 손을 길게 뻗든지, 건너뛰면 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자라는 나팔꽃의 연한 순이 공간을 뛰어 넘어 아름다운 꽃을 피어낼까요? 조사에 의하면 나팔꽃 줄기에 엄청난 떨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간을 건너가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팔꽃은 계속 자라고, 아름다운 꽃을 피어냅니다.
작은 미물도 아침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는 혼신을 다하는 떨림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부르심을 받은 주의 자녀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진실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일꾼을 기뻐하십니다. 신명기 32장 4절에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시편 117편 2절에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51:6).
하나님은 위선적인 신앙과 삶을 싫어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입니다. 중심에 진실함이 결여된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전에 오실 때 여러분의 모습과 생활 속에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언젠가 우리의 예배가 가면 무도회가 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가면을 쓰고 삽니다. 내가 보는 나의 모습과 남이 보는 나의 모습이 너무 다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일군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힘은 기술과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진실함입니다. 정직의 힘입니다. 잠깐 동안은 실력과 기술이 인정받지만 궁극적으로 진실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맙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신뢰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서로를 감시하고 잘못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시달립니다. 서로가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겨야 할 경쟁 상대로 취급합니다. 그 속에서 서로를 속고 속이는 어리석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진실함을 보일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저 사람은 보증수표야 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진실함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저 목사님은, 저 장로님은, 저 집사님은 진실해, 믿을 만 해’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꼭 건강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다 성공하고, 부자가 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진실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더욱 힘쓰는 주의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욕망의 노예로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쌓아둠으로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죄를 낳게 되고, 죄가 커지면 죽음이라는 파멸로 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군이 되려면 불의한 욕심을 멀리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잠언 15장 27절에는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7장 11절에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어리석은 자고새와 같습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남의 알을 품어봐야 결국은 떠나게 됩니다. 자기의 수고와 노력이 없이 주어진 불의한 재물은 자신의 인생을 물론 가정과 공동체까지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돈돈 하고 돈을 따라가면 돌게 됩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면 돈이 우리를 따라옵니다. 돈을 사랑함으로 악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고, 청렴결백 하자고 외쳤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과 부패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을 봅니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먼저 깨끗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그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드리느냐 액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여 하나를 구별하여 드리면 하나님은 나머지 아홉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막아주십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손이 수고한 대로 얻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거두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고와 노력의 땀을 감사함으로 여겨야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불의한 이를 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주의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한 믿음의 일군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벽돌이 서로 연결되어 벽을 이루듯이 상호간의 협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웅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자 솔로몬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여러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협력합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지체라 할지라도 불필요한 부분은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책임을 감당함으로 우리 몸의 기능을 유지시킵니다. 우리 몸은 가장 이상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몸된 성지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입니다. 어린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생명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협력해야 할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서 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리에 서서, 맡은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서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위해서 협력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러기는 V자 모양으로 무리를 지어 날아갑니다. 이것은 멋있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V자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 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면서 우는 이유는 뒤에 따라가는 새가 앞서 가는 새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꾼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혼자 가는 길은 외롭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가면 재미있고, 더 멀리 더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일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로 협력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가슴이 시리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함께하면 눈물을 닦아주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함께 하면 풍성해 지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우리 성지가족들은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눈물을 닦아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함께 사랑을 나누며 행복이 넘치는 건강한 가정과 지역사회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공동의회를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 아름답게 세워나갈 중직자를 피택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진실한 사람, 그리고 불의한 이를 멀리하는 거룩한 일군들이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일군을 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군들을 뽑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일군이 서로 협력할 때 시너지 효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건물에서 중요한 것은 기둥입니다. 기둥이 바르고 튼튼해야합니다. 기둥을 통해 벽과 벽이 연결됩니다. 그런데 기둥이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둥을 떠받치는 주춧돌입니다. 아무리 기둥이 튼튼해도 주춧돌이 잘못되면 기둥은 쓰러집니다. 결국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춧돌입니다. 그러나 주춧돌은 땅에 묻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은 주춧돌의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기둥을 떠받치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배후에서 일하는 믿음의 일군들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성지교회를 아름답고 튼튼하게 세워갈 믿음의 주춧돌입니다.
하덕규 씨의 노래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기 자리로 돌아 가는 것' 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히 여기며 협력하는 것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우리 모두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