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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피영민 목사
구약의 선지자들은 단순히 언어로만 메시지를 증거 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시청각 방법을 활용해서 메시지를 증거했는데 때로는 자녀들의 이름을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의 이름은 ‘스알 야숩’입니다. 이 이름에는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다른 아들의 이름은 ‘마할살랄 하스바스’입니다. 이 이름은 ‘노략이 속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방의 나라가 속히 와서 유다를 노략할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들의 이름을 널리 알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
셨습니다.
또한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시청각 방법을 많이 사용했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너는 행구를 준비하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이사하라”(겔 12:3)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이 이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사람들은 에스겔에게 왜 이사를 가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에스겔 선지자는 “내가 이사를 가는 것처럼 앞으로 당신들도 바벨론으로 이사를 가게 될 것이오. 그 때에는 그냥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갈것이오”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사’라고 하는 시청각 교육을 통해 메시지를 증거 하였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유다 백성들이 먹고 마시는 것도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390일 동안 좌편(북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있으라고 명령하시기도 했고, 또 우편(남쪽)을 향해 40일간을 누워 있으라고 하시기도 했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지 말고 인분(人糞)을 말려 그 불로 구운 떡을 먹으라고 명하시기도 했습니다.
에스겔이 괴로워서 인분으로 구운 떡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인분을 쇠똥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쇠똥으로 떡을 구워서 먹는 것은 앞으로 유다 백성들이 이처럼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겔 4:12-17).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노래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보통 노래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자면 랩송과 같은 노래입니다. 랩송은 본래 과거에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고통 받을 때,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중얼거리던 소리에 리듬이 실리고 흥이 돋우어지자 랩송이라고 하는 독특한 장르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랩송은 노래도 특이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의 제스처도 특이합니다.
이사야서 5장도 마치 랩송과 같은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는 왜 노래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증거하고자 했을까요?
바로 이사야가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면 말로 하고 말았겠지만, 중요한 메시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자 노래라는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는 스스로 좋아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사야가 전하는 메시지도 매우 인기가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메시지는 ‘유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고, 유다의 백성들은 이 메시지를 들을만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사 6:9)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는 노래라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무리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올 것이라고 선포해도 유다 백성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고,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설령 우리를 치시더라도 아마 심하게 치실 리는 없을 것이다. 그저 한두 대 때리고 마시겠지.’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와 같은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포도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신앙인과 불신앙인 중에서는 먼저 신앙인을 징계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와 그 친구들이 도둑질을 하다가 적발되었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혼내고 때리시겠습니까?
아마 다른 집 아이는 그 부모들에게 맡기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몹시 꾸짖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아들이 아니라(히 12:8)고 기록된 것처럼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집을 먼저 심판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은 S로 시작하는 네 단어를 통해 모든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Song’, 즉 ‘이사야의 노래’입니다.
둘째로 ‘Sentences’, 하나님의 ‘심판선고’입니다.
셋째로 ‘Specific sins’,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신 근거가 되는 ‘구체적인 죄악들’입니다.
마지막으로 ‘Significance’, 이 본문이 현대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1. Song: 포도원의 노래
이사야서는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만드셨습니다. 배수가 잘 되도록 땅을 팠고, 뿌리가 깊이 내리도록 돌도 골라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와 술틀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을 잘 보호하고, 포도가 열리면 맛있는 포도주스를 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갖춘 후에 4년을 기다렸습니다. 4년을 기다린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무슨 수목을 심던지 간에 3년은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라는 레위기 19장 23절의 말씀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무려 4년을 기다리는 동안 포도원 주인은 포도나무에 알도 크고 맛도 좋은 거봉포도가 열리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맺힌 열매는 향이 좋고 알이 굵은 극상품 포도가 아니라 향도 없고 모양도 보기 흉한 들포도 열매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만약 당신이 이런 포도나무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3절).
이사야 선지자는 이 비유에 대한 해석까지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며, 포도나무는 유다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7족을 모두 멸하신 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최고의 환경 속에서 최상의 기적과 축복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관리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최고의 포도원과 같은 나라로 만들어주시고 그들에게 단 두 가지만을 요구하셨습니다. 바로 공평(justice)과 의(righteousness)라는 열매입니다.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
다”(7절).
2. Sentences: 포도원을 향한 하나님의 선고
유다는 하나님의 소원대로 좋은 포도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거민들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직설적으로 물으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4절).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포도원에 행할 것이 없을만큼 모든 것을 다 제공해 주셨기 때문에, 들포도 열매를 맺은 책임은 전적으로 유다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들은 들포도 열매를 맺은 것에 대해 변명할 수도,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질책을 던지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선고(sentence)를 내리셨습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5-6절).
4년 동안 정성을 다해 가꾸었던 포도원의 나무들이 들포도를 맺었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년 동안 쌀농사를 열심히 지었는데 추수한 낟알 마다 모두 빈 낟알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분노하며 논과 밭을 모두 갈아엎고 말 것입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수고하여 지은 농사가 헛된 열매를 거둔 것에 대해 실망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포도원의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타리를 모두 헐어버려서 멧돼지 같은 짐승이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시는 가지치기도 하지 않으시고 북을 돋우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북’은 뿌리 근처에 있는 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북을 잘 돋우어야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줄기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신경 쓰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포도원에는 형극, 즉 가시나무가 자라게 되고, 비도 내리지 않아 모든 나무가 말라버리게 되는 비참한 신세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보호막과 축복을 유다에서 거두실 때, “기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26절)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침공을 두 번이나 당하였고,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아 결국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3. Specific Sins: 유다의 구체적인 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과 선고가 부당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의 구체적인 모든 죄를 알고 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구체적인 죄 가운데
첫 번째는 탐욕의 죄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8절).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모두 가지려는 욕심은 위험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욕심내지 말고 나눠주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눠주는 것이 어리석은 일 같아도 영혼을 위해 장래의 좋은 터를 쌓는 것입니다. 탐심을 쌓으면 후대에 욕심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로 이와 같은 탐욕의 죄를 행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술취함과 방탕함의 죄입니다.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11절).
유다의 백성들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독주와 포도주를 부어 마시며 취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빈정거리는 죄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9절).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죄가 있어서 우리를 심판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죄를 좀 더 지어볼까요?
그러면 당연히 심판이 빨리 오겠군요. 하나님! 빨리 심판해보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말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빈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sarcasm). 요즘 인터넷을 보면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빈정거리는 글을 올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빈정거리는 글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빈정거리는 사람들은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로 가치관이 전도되고 도덕이 왜곡되는 죄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20절).
세상이 잘못되면 가치관이 전도되고 도덕이 왜곡됩니다. 악한 사상과 행동을 옳은 것이라고 하고, 오히려 선을악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은 주장과 논리가 난무합니다.
다섯 번째로 교만의 죄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21절).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명철하다고 자만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죄입니다.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23절).
악인이지만 뇌물만 주면 죄가 없다고 판결하고, 의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주지 않아서 유죄 판결을 받는 불공정한 재판이 유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타락하고 부패한 국가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여섯 가지 죄의 특징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들포도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공평과 의의 열매를 요구하셨는데, 그들이 이와 같은 들포도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심판의 선고를 내리신 것입니다.
4. Significance: 메시지의 현대적 중요성
그렇다면 무려 2,700년이나 지나버린 유다 백성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대단히 중요한 강조점을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바로 2,700년 전에 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유다라고 하는 견본을 통해 모든 시대, 모든 국가, 모든 인류에게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비록 2,700여 년 전에 쓰인 이사야서이지만 여전히 현대적이고 첨단을 달리는 책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이전 세대에 비해 교육열도 굉장히 높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무지합니다. 대단히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불합리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5장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선포하는
첫 번째 진리는 현대인들도 2,700년 전의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하였으며, 타락과 부패에 관해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의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5장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구체적인 여섯 가지 죄목을 지적하셨는데, 마찬가지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증거를 매우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로 항변을 합니다. “하나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좀 말리지 그러셨습니까? 왜 그걸 방치하시고서는 그 죄를 나에게 물으십니까? 잘못은 오히려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가룟 유다는 훌륭한 일을 했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도록 팔았으니 얼마나 큰 인물입니까?”
그러나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봅시다. 밭에서 잡초를 베는 사람이 있습니다. 낫을 가지고 잡초를 베는데 잡초 한 포기가 갑자기 “여보시오. 나는 본성이 잡초요. 내가 잡초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아는 사실일텐데 왜 우리를 베어서 버리는 것이오? 불공평하지 않소?”라고 항변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일꾼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마 “그래. 네가 본성이 잡초고 열매를 못 맺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니까 베어서 내버리는거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죄 지은 것 뿐인데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항변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항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잡초 베는 사람과 같이 “네가 죄성을 가지고 죄를 지었으니 너는 지옥에 가야겠구나. 그것이 너의 형벌이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타락된 본성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본문이 가르쳐주는
두 번째 진리는 인류에게 존재하는 모든 비극과 고통이 우리 영혼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막을 철폐하셨기 때문에 악령들도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담을 헐어버리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악신들이 횡행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외국여행을 다니실 때마다 기도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동남아의 한 국가에 여행을 다녀왔다가 귀신에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평강도 없습니다. 사방 곳곳에서 전쟁의 소문이 들려오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난리를 치는 시국입니다. 가뭄과 쓰나미 등 자연재해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지진과 태풍의 두려운 소문도 들려옵니다. 이 세상에 평강이 없는 이유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우리가 참포도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평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죄는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일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취하는 도적질이나 남의 아내를 빼앗는 간음을 합리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이 말하는
세 번째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는 점입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4절).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것을 거저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들을 위해서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마지막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만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으며 저주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 요구할 수도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평과 의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포도 열매같은 죄악을 맺고 말았습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도, 빈정거릴만한 조건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들포도를 맺은 인생을 참회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어리석은 바보였습니다. 내 죄성을 따라 들포도만 맺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회개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하나님께서 더 하실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아준 아버지처럼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우리를 맞아주실 뿐만 아니라 영생과 축복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의 보호막도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벌이 임하겠느냐고 자만했던 유다의 백성들처럼, 내가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등록했으니 어떻게 산들 하나님께서 벌주실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거없는 낙관주의입니다. 들포도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의 권징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권징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권하기 이전에 들포도 열매를 맺은 우리의 인생을 먼저 돌아보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는 아무런 존재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2007년에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기도와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공평(justice)과 의(righteousness)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의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