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곁에 꽃이 핀다
박미정
산책길에서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앞에 걸음을 멈췄다. 껍질은 거칠게 갈라졌고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는 커다란 옹이가 남아 있었다.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곁에 흰 꽃이 피어 있었다.
커다란 꽃잎을 활짝 펼친 모습이 눈부시게 환했다. 한쪽에는 오래 견딘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제 막 열린 하루가 있었다. 거친 나무와 흰 꽃이 나란히 있으니 서로가 더욱 선명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처를 지우려 애쓴다. 흉터는 감추고 싶고 실패는 잊고 싶다. 지나간 슬픔까지 말끔히 정리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은 꼭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
나무는 잘려 나간 자리를 숨기지 않는다. 갈라진 껍질도 제 몸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상처가 있다고 성장을 멈추지도 않는다.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잎을 내고 햇빛과 바람을 맞는다. 지난 흔적을 지우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시간을 보탠다.
사람의 마음에도 저마다 옹이 하나쯤 있다. 이루지 못한 일, 떠나보낸 사람, 돌아보면 아쉬운 선택도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처는 희미해지고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 한쪽에 남는다.
그러나 흉터가 반드시 삶의 결함인 것은 아니다. 넘어져 본 사람은 넘어지는 사람의 손을 조금 더 빨리 잡는다.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은 타인의 기다림을 함부로 재촉하지 않는다. 아파 본 시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깊이가 되기도 한다.
흰 꽃이 유난히 환해 보이는 것도 오래된 나무 때문인지 모른다. 매끈한 나무 곁이었다면 그저 예쁜 꽃 한 송이로 지나쳤을 것이다. 거친 상처 곁에 피어 있으니 꽃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상처와 꽃은 서로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한 풍경을 완성한다.
꽃 주변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봉오리도 보였다. 먼저 핀 꽃을 따라 서두르지 않는다. 제 시간이 오면 저마다 꽃잎을 펼칠 것이다. 사람에게도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가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었다고 모든 계절을 다 산 것은 아니다. 오래 접어 둔 꿈을 다시 펼칠 수도 있고 낯선 길을 새롭게 걸을 수도 있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가능성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피울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돌아서며 다시 나무를 바라본다. 상처는 그대로이고 꽃도 그대로다. 꽃은 나무의 상처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그 곁에서 제 몫의 꽃을 피우고 있다. 삶도 그러하리라. 상처가 모두 아문 뒤에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흔적을 품고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오래된 나무 곁에 흰 꽃이 피었다. 상처가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바로 그 곁에서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