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역사 - 신해방지구 개성, 남북교류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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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3.04. 17:43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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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신해방지구 개성, 남북교류의 공간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고, 다만 남북의 경계가 38도선에서 휴전선으로 변경되었다. 강원도에서 북진한 남측은 점령지역을 유엔군 관할 아래 두었다. ‘수복지구’로 불린 이 지역에서, 주민들은 ‘인민’에서 ‘국민’으로 재편되었다. 반면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남진한 북측은 점령지역을 ‘신해방지구’로 부르면서 그 지역 주민을 국민에서 인민(공민)으로 개조했다. 신해방지구는 특별한 관리 대상이 되었으며, 그 중심지는 개성이었다. 개성은 195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개성시와 개풍군, 판문군을 포괄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1960년 황해북도에 있던 장풍군과 강원도 일부 지역이 또 개성직할시에 편입되었다.
1951년 상반기까지 개성은 전선지구였다. 개성 사람들이 말하는 ‘톱날전쟁 시기’이다. 낮에는 남쪽 군대가 개성시에 들어오고, 밤에는 북쪽 군대가 들어왔다. 그러다가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정전회의가 열려, 개성은 비무장지대로 선포되었고 폭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쟁기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개성은 남북 간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설치된 판문점은 지금도 북한군과 유엔군의 교섭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 개성시는 38선 획정 이후 남북 간 물자와 인구 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는데, 전시하에도 남북 간 교섭 창구의 역할이 계승되었다.
북한 정부는 개성을 점령하여 신해방지구로 개편하면서 그 주민을 북한 공민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북한 정부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부 인사보다는 개성 출신으로 행정 간부들을 임명했다. 전시하에 개성시 인민위원회 조직위원장 리정렬, 조선노동당 개성시 당위원회 위원장 리기혁 등 개성시의 정권기관 당 단체들과 사회단체, 경제문화기관, 공장, 기업소의 책임 일꾼들은 거의 모두 개성 출신들로 채워졌다.
전후 개성의 북한 체제 편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김명호였다. 그는 대지주 김정호의 4촌 형제였으며 윤치호의 손녀인 윤자희와 결혼한 개성의 유력자였다. 해방 후 개성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질 때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전후인 1952년에 『개성신문』을 창간하여 초대 주필이 되었고, 그 뒤에 개성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위원장까지 지냈다. 김명호의 출신성분 문제로 시비가 붙었을 때 김일성은 “김명호는 내가 보증하니 누구도 그를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북한 정부는 개성을 북한 체제에 동화시키기 위해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의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각종 경제 정책을 펼쳐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킴으로써 체제에 대한 지지를 유도했다. 김일성은 개성을 경공업도시로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개성에서 북한 정부의 지원 아래 최초로 조업을 시작한 공장은 개성방직공장이었다. 1952년 초 력직기 14대와 수십 대의 수직기를 차려놓고 국가에서 대주는 면사로 천을 짜는 직물공장이 예전 송도고등보통학교 실업장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1953년 9월에 개성방직공장은 4개의 분공장으로 확장되었고, 그 이름을 개성직물공장으로 바꿔 국영 중앙경공업공장으로 발전시켰다. 1962년 말에 이 공장은 다시 개성방직공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일성은 이 공장을 1954년 1차 현지 지도한 것을 포함하여 1972년까지 네 차례나 현지 지도할 만큼 중시했다. 개성방직공장이 세워진 곳은 일제하 (소년)형무소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