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문화유산 -윤두서 자화상 조선시대의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의 자화상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9. 1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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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문화유산 -윤두서 자화상 조선시대의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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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3. 05:48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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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
조선시대의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의 자화상.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며 1987년 12월 26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지본담채(紙本淡彩)이며, 가로 20.5㎝, 세로 38.5㎝이다. 1710년(숙종 36) 제작되었다. 가로 20.5㎝, 세로 38.5㎝ 내면의 얼굴을 그리다, 자화상
윤두서 자화상│가로 20.5㎝ X 세로 38.5㎝│국보│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소장
‘미완성인가, 작가의 의도인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 속에 의문을 품은 그림!
한 눈에 봐도 특이한 그림이다. 모자의 윗부분은 잘려나갔고, 몸통은 생략되었으며, 자세히 보면 귀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그리다 만 그림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미완성이라고 보기엔 한 올 한 올 살아 움직이는 듯한 수염과 탕건 속에 그려진 머리카락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또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들은 대개 측면을 보고 있는데요. 이 그림은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마치 화폭 밖의 감상자에게 도전을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미스터리한 그림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조선의 천재 화가, 삼원 삼재 중 한 사람인 공재 윤두서
주인공은 바로 조선 시대 화가인 공재 윤두서이다. 윤두서는 조선의 천재화가를 일컫는 3원 3재(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그림은 윤두서가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이 그림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됐을 뿐만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초상화 중 유일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금수저’ 윤두서, 격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윤두서는 대대로 해남 지역의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윤두서의 증조부는 시조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로,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오우가(五友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바로 윤선도의 대표 작품이다. 그리고 윤두서의 외증손자는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었다. 이처럼 해남 윤씨 가는 경제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명문 가문이었고, 그런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난 윤두서는 그야말로 명가의 타고난 자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완벽한 배경의 가문이 윤두서의 발목을 잡게 된다. 윤두서가 활동한 시기는 역사상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숙종 시기였다. 숙종의 재위 기간에만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정권이 3번이나 바뀔 정도였다.
윤두서 또한 여타 사대부가의 자제처럼 과거에 급제하지만, 윤두서가 진사에 급제한 다음 해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남인 세력에 속해있었던 해남 윤씨 가문과 윤두서 또한 당쟁의 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윤두서의 셋째 형은 거제도로 유배를 갔고, 윤두서 본인도 서인의 음모로 역모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훗날 다행히 무고로 풀려났으나, 세상에 환멸을 느낀 윤두서는 이후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입신양명을 포기한 선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다
조선 시대 사대부는 관직에 올라 출세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 최고의 명예였다. 하지만 윤두서는 당쟁에 휘말려 그러한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이다. 벼슬길이 막힌 윤두서는 전과 다른 길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림이다.
어렸을 적부터 시서화에 능했던 윤두서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중국의 화보집과 여러 이론서들을 섭렵하며 그림의 묘리를 터득했고, 여기에 자신만의 생각과 색깔을 담으며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갔다.
윤두서는 "그림을 그리기 전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털끝만큼도 그 참모습에 의심이 들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붓을 들었다" 고 한다. 그래서 윤두서의 그림을 보면 화폭 속의 대상들이 모두 살아있는 것처럼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대를 앞서나간 윤두서의 극사실주의적 화법은 자화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수히 그려진 수염은 한 올 한 올 그 굵기와 길이가 모두 다르다. 심지어 코 속의 털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냈다. 눈 주위에는 붉은 자국이 둥글게 둘러져 있는데 이는 안경에 눌린 자국이다.
김홍도보다 앞선 풍속화의 선구자!
윤두서는 정물화, 말그림, 용그림 등 두루 여러 분야의 그림을 잘 그렸지만 가장 빛을 발한 건 인물화, 그 중에서도 풍속화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풍속화가로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있지만, 윤두서는 이들보다 반세기 가량 앞서 서민을 화폭에 담은 풍속화의 선구자였다.
명문가 사대부 출신의 선비가 서민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조선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과도 같았다. 이처럼 윤두서는 서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 윤두서는 자기 집 노비를 부를 때도 ‘이놈 저놈’ 하는 일 없이 항상 이름으로 불렀으며,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는 염전 사업을 펼쳐 백성 구휼에 앞장서기도 했다. 윤두서는 단순히 서민을 그림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위했던 것이다.
윤두서의 인생 위로 드리워진 이별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재능을 발휘하고, 여기에 군자로서의 인품까지 갖춘 윤두서,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유독 죽음이 잦았다.
공재공은 30여 세부터 이미 머리에 백발이 나타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 상중에 있을 때 갑자기 형마저 여의게 되니,
비록 감정을 억제하고 슬픔을 참는다고 할지라도
머리에 백발만은 어쩔 수 없어 거의 절반이나 허옇게 되었다.
- 공재공행장 중에서
윤두서의 나이 스물 둘이 되던 해,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26년 동안 가족과 친구를 포함해 무려 9명이 세상을 떠났다. 윤두서의 일생을 적은 <공재공행장>에는 30여 세부터 이미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는 기록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는 주변인들의 죽음 속에서 굉장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한 폭에 정리하다
당쟁에서 밀려나고 세상에 뜻을 펼칠 기회조차 갖지 못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이어 잃어야했던 윤두서. 그는 1713년에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해남으로 낙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은 자화상을 그리며 삶을 정리한다.
조선시대 초상화 정신을 표현하는 일호불사一毫不似 편시타인便是他人이라는 말이 있다.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 라는 뜻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소중히 여겼던 시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윤두서는 대체 무슨 의도로 신체 일부를 과감히 생략하고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과감히 생략한 탕건의 윗부분은 당시 문인 선비들이 관모를 쓰는 부분이었다. 두 귀를 그리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윤두서는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세상의 어떤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자화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암울했던 현실,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한 의지와 다짐을 간직했던 윤두서의 자화상은, 변함없이 우리를 당당하게 응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두서 자화상 (KBS 천상의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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