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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백석 '매'와 '국'의 소재를 예로 들어 감년 변법을 재론한다.
以齐白石“梅”“菊”题材为例再谈衰年变法(下)
2020년 12월 24일 10:53 펑펑 뉴스 소스:이페어케이
원제: "화오자화—이제백석"매"국"제재예 쇠년변법 재론"
문/제부
한 시대의 예술 대가인 제백석이 말년에 변법한 깊은 원인은 도대체 이렇다뭐라고요?
학계에서 근년에 정리 출판된 신소재를 빌려, 제백석 연구자.제백석 증손녀 제부, 20년대 변법 기간 중 제백석의 경화를 최근 통과생활을 고증하면서, 동시에이 접점은 다시 한번 잘 살펴보아야 한다백석 "매" "국화"두 가지 전통 문인화의 제재예, 제백석변하고 있다.법로 중의 풍격연다시 빗질 분석을 하여 제백석감년변법의 성과와 동력을 새로운 각도로 분석하려 하였다.
본문은 전문 후반부로, 각각 제백석 "매"와 "국"을 대조한다.변법 전후의 변화는 회화 기법과 시의 함의에 대한 빗질과 분석을 포함한다。
매화의 변
제백석은 스스로 "매화를 그리는 것은 본래 송나라 양보를 본뜬 것이다.(무죄). 동향인 윤화백(김양)이 호남에서 매화 그리기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배운 것을 보충하면 나도 배운다.그의 의중을 헤아려 보자.양보지윤화제외백은 제백석에 거구를 일으켰다.큰 영향 외에 제백석다른 것도 많이 배워서선배 화가의 작품.각고의 모사, 빈틈없는 두 갈고리를 통해 끊임없이 옛사람의 매화 경험을 받아들여 점차 형성되었다자기 스타일.
제백석의 시문과 제화에는 매화에 대한 것이 있다.문장도 대부분 옛 맛과 전통적인 의미에 편중된 표현방식으로, 1902년과 같다앞서 쓴 《과심원정》한사부자: 매화꽃 향기정원 동쪽에 자리 잡으니, 깊은 눈이 그치다.차립 만풍, 미안하지만 내가 길지 않다지기가 적고, 공심이 많으면 옛일을 잊는다.동경좌절형더욱 신중해져서, 시에는 불평 구절이 있어 일손이 부족하다.하우바는 반드시 꿈을 꾸고, 시 원고를 가지고 양웅에게 절해야 한다.
진소번 스승으로 모실 때의 《매화증증소번자》와 같은 약 189.5년 - 1902년 : 얼음처럼 차가운 옥골설 피부, 봄철 강남이 그 씨앗이다.증선생의 소식이 좋으니 남몰래 불러서는 안 된다린포.
'제화매'(1889~1902년)도 있다.흥래마 세 되의 먹이 매화꽃을 일순간에 피운다.비록 뼈가 매우 수척하더라도, 품성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먼지를 쓰다.
뒤이어 1916년 《매화책장》에는 제백석의 친한 벗이 있었다.그 창작의 특징을 김농의 모사라고 착각하여 이 책자의 기사에 적었다.제백석이 기술하였다.창사 윤하께서 계신 곳에서 빌리다.임양보지화매소폭후방 그림책, 꽃 입기간략하게 일을 하는 것이 보탬이 되는 듯, 화국새롭고 기발한 것은 백석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그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다른 사람이 임김동심이라고 오인하는 것을 보면, 이는 바로 이 때문이다.한때는 금농의 매화제백석에 대한 영향은 비교적 현저하다.
(그림1) 제백석, 《묵매도》, 종이본, 1917년 북경화원장
끊임없이 앞사람에게 매화를 그리는 모사와 학습 속에서, 제백석은 점차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제백석(齊白石)을 스승이자 우(友)의 추동 역할을 했던 진사(陳師)는 제백석(齊白石)이 1917년에 그린 《묵매(墨梅)》(사진1)에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제옹의 그림은 시와 같아서 붓 가는 대로 화공을 지을 줄 누가 알았으랴.산한기가 따로 있어 맛만 볼 뿐, 서리서리하지 않는다.일을 시작하여 마음이 속세를 떠나 방방곡곡으로 향긋하게 행차하는구나술을 마신 후 마음껏 말을 할 것이지, 윤화옹에게 발걸음이 필요 없다.
이때 제백석은 모이와 백의 매화를 모사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해에 진사하였다.제백석에게 시를 지어 "오자화자합고(自合古)를 그리는데 왜 머리를 숙이고 동족을 구하느냐"고 가르치기도 했다.앞사람의 영향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라고 권한다.바로 이때, 그는 쇠년 변법을 결심하기 시작하였고, 이 천진박물관은 1919년 《매화축》(그림 2)에 1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기원전 1918년의 구시: 오역고성(小驛古城)은 옛꿈이 없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절름발이 당나귀 잔설한에 피리가 불었는데, 매화만이 나를 미치게 한다
(그림2) 제백석, 《묵매도》, 1919년, 천진박물관 소장
이때는 바로 예술 변혁이 시작될 때 제백석이 겪었던 자기부정과중건 과정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 속의 쓰라린 고독은 외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하나둘씩 엿볼 수 있다.시에는 소소한 여행길, 진퇴유곡(進 进退有谷)에 이르기 까지 꿈조차 생소하게 했던 삶의 고단함이 '꽃이 피어나듯' 일상의 일인데, 이 한겨울의 쓸쓸함 속에서 예술가의 숨겨진 품성과 버팀목을 느낄 수 있는 매화만이 제백석(齊白石)이 되어 시름의 슬픔을 털어놓는 벗이 된 것이다.
1919년은 제백석 예술생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생활이 많은 시기였다.여기에다 시장의 흐름에 발목이 잡히면서 회화 기법의 변혁은 제백석의 내면적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도 고려하게 됐다.변법 과정에서 제백석은 예술적 자기혁신의 정신을 지켰고, 변법에서 얻은 약간의 진보도 그가 견지하고 있는 길을 더욱 긍정적으로 만들었다.이후 제백석은 이 해의 작품을 돌아볼 때 "이렇게 가지를 쳐 본 김동심은 할 수 없다
(그림3)제백석, 《매화도》, 종이본, 1919년, 광주시미술관 소장
초기의 제백석화 매화는 백매를 위주로 하였는데, 먹색이 청아하고 매화꽃이 자주 단독으로 나타나 그 대신그의 사물 조합은 결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다.주제의 대부분은 문인화의 전통이라는 뜻으로 매화의 고결함, 자신의 고결함을 뜻하며 기법과 정신의 함의에서 선인의 뜻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확보한 사진 자료를 보면 1926년 경에 이미 제백석이 완전히 이전되었다고 한다.담백하고 아담한 백매가 홍화묵간(紅花墨干間)의 형태로 바뀌면서 매화가 품고 있던 의미도 바뀌기 시작했다.몇 년 간의 변법적인 시도와 탐구를 통해, 제백석은 매화 제재의 형식 변화가 현저하여, 이전의 묵매에 비해, 1924년 경에는 홍화묵엽에 이르렀다.그 특징은 이미 뚜렷하게 나타났다.비록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시기 그의 시경 변화에서 일부 단초를 볼 수 있듯이, 《홍매》시 몇 편은 "한장고곤은 단하, 저작의 눈앞에는 꽃이 피었다", 또 "단광은 단광고사, 동풍은 매지, 동풍은 매지( "杈)를 부른다"고 한다. 예술가는 구쿤룬의 단하(丹 丹)를 눈앞가지에 그리고 동풍의 손으로는 산홍사(山紅沙山)를 날려 보냈다.동풍은 무심코 깊은 숲으로 가고 연지는 불어도 훌륭하다는 홍매도의 제목 그대로다.천홍에 비길 바에야 매화가 자랑스럽지 않겠소.
더욱 강렬한 색채의 인상을 주어, 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충격적인 붉은색 시각효는 이 시기에 많이 등장한 홍매화 작품과 잘 맞아떨어진다.
제백석도 변법 과정에서, 단번에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쇠락도 있었다.연변법은 길고도 반복되는 과정으로 필묵기법이나 시문 서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백석시초》에서 1925년 제백석의 홍매시 한 수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항상 방자한 태도를 취해 왔으니 대중이 보면 차이가 있다.얼음과 얼굴은 눈 빛깔과 같고, 푸른 꽃받침과 옥에 티가 있다.동풍철골이 있는 곳에 가면 제군들은 복숭아꽃을 잘못 보지 마라.
이 시를 음미하면서, 이 시기의 회화 작품을 대조해 보면, 변법 중의 제백석의 복잡한 심로와 일치한다.그 여정을 알 수 있다.시에서 회화의 변법적 원인을 밝히고, '본진'이라는 초기의 먹색이 '입시(入時)'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때 형식에서는 '연지점점점( 。地點)'을 붙여 '중중견(中見)'의 변화를 미적 취향에 맞출 수 있었다.그러나 예술가의 내면에는 아직도 차갑고 편안한 철골인 줄만 알았던 그가 예술적 표상이 변했다고 해서 자신을 따뜻한 동풍의 요절한 복숭아꽃으로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림4) 제백석, 《매화도》, 종이본설색, 1928년 북경시 문물공사 소장
1928년 전후, 그 이전의 변법을 바탕으로 제백석은 매화의 줄기를 그리기 시작하였을 때비교적 선명한 점태 기법을 사용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강렬한 색채 대비, 이끼의 먹방울이 선의 연결을 끊고 줄기의 변화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제백석홍화묵엽(齊白石紅花墨葉)의 변혁 속에서(그림 4) 매화는 '붉은 꽃먹건(紅花墨 。)'이라는 형식의 기법 혁신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5) 제백석, 《춘풍도》, 종이본설색, 1937년, 개인 소장.
1937년 《춘풍》(그림 5)에 한 노인이 매화에게 독립하여 매화를 매화에게 주었다.가지 첫머리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매화가 가져다주는 것은 봄의 '소식'이다.비록 고의의 새로운 그림이지만, 화면 속의 풍경은 이미 매화를 그리던 거만함, 청아함, 혹은 소아함과 담담한 취미와는 크게 구별된다.과거에는 전통 문인화에서 매화의 기호화 경향을 뚜렷하게 가졌던 원소들이 냉일, 적적, 고분, 황한을 일소하는 대신 건강과 적극, 활기가 넘치는 새로운 화풍으로 자리잡았다
(그림6) 제백석(齊白石), 《매화바위수대조도( 梅花带鳥圖)》, 종이본설색, 1943년 북경시문화재공사가 소장하였다.
제백석은 만년에 변법한 후 화면의 대상을 보면, 팔형·까치·수대조·나비 이 몇 종의 동물이 가지런하다.백석화 매화 매화의 가장 흔한 선택은 모두 아름다운 전통 원소를 상징하는 것이다.1943년 《매화바위수대조》(사진6)에서 매「수(绶)」를 해음( 墨)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묵(墨)돌은 견고하다는 뜻으로 써서 '미수(美壽) 견고함'이라는 직서를 썼다.《시경·유풍》의 《칠월》편에는 "이번에는 봄술을 마시기 위해 미간을 갖자."라고 쓰여 있다.즉, '미수(美壽)'란 사람이 늙었을 때 눈썹에 유난히 긴 몇 가닥의 털이 생기는 장수의 코끼리라는 뜻이다.의례(儀禮)에 사관례(士冠禮)는 '미수만년(美壽萬年) 후복(胡福)을 영원히 누리다'는 말이 있다.그래서 이 그림의 의미는 미수가 튼튼하면 복이 온전하다는 뜻입니다.이런 길상의 축복을 담은 이 뜻은 상형(像形)을 조화롭게 형상화해 제백석 후기 창작의 중요한 수단이 됐다.1951년 '미수(美壽)' 그림(사진 7)에서 새의 모습이 눈가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림8) 제백석, 《희상미두도(喜上美頭圖)》, 종이본에 색칠을 하였는데, 1947년, 구름이 많이 끼었다.
1947년 《희상미미두》(그림8)에서 매가지에 멈춰 선 까치소리처럼'희상미완(喜上美 。)', 청대(淸代) 이鱓(李鱓)이 그린 '희상미완도(喜上美梢圖9)'를 소장하고 있는 진강박물관(鎭江博物館)의 제백석(齊白石) 같은 작품은 선인을 본받을 만한 것이다.그러나 제백석의 눈썹꼬리가 올라가고 까치가 쌍쌍이 나타나는 등 홍매가 사랑스러우며, 화면 전체가 밝고 상냥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씨의 전작들과는 크게 다른 시대의 미적 풍조에 부응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그림9) 청리장어, 희상미초도, 종이본 설색, 진강박물관 소장
반면 제백석 초기의 《매화 까치 그림》에서 쓴 "그래도 참새는 자주 오는 것 같다.가서, 가지에 올라가면 꽃이 자꾸 훼손된다.(백석시초(갑과 을축) 19241925년)는 것도 취향이 달랐다.
여기에서 변법 성숙기 이후, 제백석은 회화 기법과 예술 창작의 주인을 알 수 있다관성에 모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이러한 전환은 후기 제백석 예술이 나타낸 중국 전통 회화의 새로운 독특한 예술 면모를 구성하여, 전통 의미 속의 매화를 대표하는 야일 고결한 정으로, 점차 전아하고 아름다운 인생에 대한 우상으로 전환하였다.말의 뜻.
국화의 변
국화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닌 꽃으로 여겨져 왔다.일찍부터 서주의 《예기》에 "국유황화(國有黃華)"라는 기록이 있고, 《이소》에 나오는 "조음목란(朝食木蘭)이 노로, 유찬추국화( 夕食秋國花)의 낙영( 落英)"이라는 구절이 있어 우리 문화의 초기 단계에서 국화는 고결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의미를 부여한다.《초사》에는 "봄난초와 가을국화, 길기만 하고 끝도 없다"는 말이 더해져, 국화는 몸을 깨끗이 하고 자중자애하며 염세를 따르지 않는 절조의 형상이 확립되었다.이후 채국동울타리의 도연명'은 방국개림요, 청송관암열이다.고결한 정자를 갖고 서릿발 치기를 하다"며 국화꽃을 고결한 선비들의 인격과 연결시켰다.제백석 초기의 국화 소재는 대부분 이런 함축에서 나왔다《영국》《소》'이치와 국'은 애국이는 시(詩) 없이 비웃고, 장안(長安)은 웃고, 너무 싱겁게 웃는다.꽃이 우리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이 허리를 굽히지 않아서이다. 《영국》서풍은 홀로 배회하고 가을 울타리에는 풀이 시들어 버린 것을 말한다.도잠에서 웃으며 허리를 굽히자, 국화는 옛날처럼 피었다.————국화에 대한 울타리
제백석의 작품에서 국화는 매화와 같이 존화가 많은 제재로, 그 기법이다.내포의 변화도 매화와 비슷하고, 붉은 꽃과 먹이 잎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국화는 대표적인 소재 중 하나이다.
(그림10) 제백석, 《묵국도》, 종이본, 1894년 랴오닝성 박물관이 소장하였다.
제백석은 초기 학습 모사 단계에, 늘 옛사람의 묵국 위주였는데, 서위·팔대거를 배웠다.대부분, 국화 잎이 드리우고, 꽃들이 빽빽이 둘러싸고 있으니, 일종의 독특한 생기가 있다.특히 큰 붓으로 칠한 국화꽃잎과 풍성한 꽃잎이 대비되어 찰랑찰랑거리는 모습이 일품이다.서위(徐偉)와 8대 국화 화법을 비교해 보면 그 속에 내재된 유사성이 잘 보인다(그림 10).그 사이 그는 이따금 다른 시도도 했다.친구의 초청으로 만든 송인의 분본 모본(사진 11
(그림 11) 제백석, 《청공도》, 종이본, 1909년, 북경시 문물회사가 소장하였다.
끊임없는 학습 총결산으로 제백석 1919년 전의 국화 양식은 선인을 뚜렷이 나타내었다스타일은 묵필과 구도에서 기이하고, 붓으로 강함과 소박함을 추구한다.가지와 잎이 진득한 것은 가을 말에 싸운 국화의 차가운 기운을 나타내는데, 서위팔대 특유의 호매하고 당당한 개성에 대한 긍정과 격찬을 나타낸다.1919년 한 책장에 실린 국화꽃을 '식기낙영'(그림 12)이라고 쓴 베이징 문물상에서는 이 시기 제백석의 국화(國花)를 소재로 한 문인들의 취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림 13) 제백석, 《국조도》, 종이본, 1920년, 중앙미술학원 소장
중앙미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이 국조도(그림 13)는 1920년 제이다.백석(白石)이 진사(陳師)의 요청으로 모금한 것을 보면, 이 그림은 제백석(齊白石)의 본심에 충실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화면의 전체적인 기질은 여전히 오래전 8대1로 이어진 '차가운' 풍조였고, 화폭에는 칠절(七節) 두 곡의 예술 창작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담았다.첫째, 좋은 새는 둥지를 떠나면 고생이 심하고 활을 당기면 둥지를 튼다.기회를 알면서 입을 세 번 다물고 하늘가와 눈을 감고 사람을 판단한다.둘째: 부평초는 국화에 대해 은수염을 부끄러워하며, 관아에게 쌀 없는 싸움을 구하지 않는다.이 그림은 경화 사람이 싫어합니다. 선생 3대는 농부입니다.
1919년 다시 베이징에 온 시장의 '냉대'에 제백석이 시달리고 있다.스스로 둥지를 떠나 새처럼 지내면서도 고향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아 그가 아는 예술의 '기(機)'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입을 다문 채 알아채지 못할 때, 친한 친구인 진사(陳師) 앞에서야 비로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한편으로 경성의 문파(門派)별로 자신의 출신성분으로 인해 예술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원성도 적지 않았다.같은 시기 '가옥황국영본(家屋黃國影本)'에서도 향청색(香淸色)은 마침 그윽한 자태다.태식이는 옛날 같지 않고, 소와 양은 울타리에 닿을 때가 많다.
제백석이라는 시기의 예리한 변화로, 국화 제재도 대대적으로 변화하였다.이 꽃은 예전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소와 양이 울타리를 치는 일이 잦지만 그는 여전히 변법의 길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다.
(그림14) 제백석, 《묵필국화도》, 종이본, 1920년, 천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끊임없는 창작 탐구에, 제백석은 국화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사생을 넣어서, 진실에 대하여 사실하게 하였다.물상의 관찰은 초기 모사가 만들어낸 냉일한 패러다임 속에 녹아들어 특색 있는 제가(齊家)양식으로 자리 잡았다.1921년 《묵필국화권》(사진 14)을 소장하고 있는 톈진박물관(天津博物館)의 영향이 컸다.
제목은 '여상견시에는 사람이 국화를 그리는데, 잎이 너무 크고 꽃이 너무 크고 굵은 것은 화분이 지나쳤으며, 그밖에는 수아하지 않았다."꽃의 차가운 기운을 잃었는데…" 세밀한 사생(私生)을 통해 제백석은 시폐를 반성했다.그림 속 백국천엽만판번복장려(白國千葉萬瓣)는 다채롭고, 화두는 공처럼 긴장과 이완이 잘 나타나 있어 수아(秀亞)의 정취가 묻어난다.정교한 필치, 짜임새 있는 구성, 박진감 넘치는 화보를 통해 사람의 담담한 예술적 품질을 담아냈다. 다른 면에서는 대담한 색깔로이 시기를 지나 제백석 변법국화의 중요한 표지.1920년에 그린 국화 그림 2장을 보면 이런 변화가 보인다(그림 15, 16).
(图十五)齐白石,《秋色图》,纸本设色,1920年,北京市文物公司藏
(그림 16) 제백석, 《화조초충사병》, 종이본 설색, 1920년 영보재장.
이전 필묵에서 간략하고, 취향이 담백했던 것과는 달리, 화면은 풍부한 여러 가지 요소를 도입하고, 국화꽃의 조형을 하였다.대기가 세련된 채 수수한 국화꽃잎과 풍성한 꽃들이 장력이 넘치는 예술표현양식을 만들어낸 것도 오창석의 학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변법 과정에서 색채는 국화 속에 등황자색 등의 순도가 비교적 높은 안료를 넣어, 농염하게 하였다.앞서 그린 국화꽃보다 차분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졌고, 가을을 국화로 표현하기 시작해 노래홍과 같은 그림으로 연년(延年)이라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마치 시 《국화》와 같다.: 들쭉날쭉 낙목은 서풍을 지나 국화가 필 무렵이면 만목공이다.눈은 마침 서리 맞고 추운데, 동년배는 노래홍만 남았다.
(그림 17) 제백석, 《국석도》, 종이본설색, 1923년 영보재장
전체 화면의 시각적 감각은 춥지 않고 화질적인 예술적 분위기를 전달한다.이 같은 스타일은 향후 제백석이라는 장르의 주요 기조가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1923년 영보재가 소장한 국석도(그림 17)에서 두드러진 홍화묵엽(紅花墨葉)의 특징이 나타나 그 후의 작품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먹색빛이 이전보다 훨씬 짙어 꽃이 크고 잎이 작은 특징이 관례로 굳어 왔다.
1924년 《홍자국》(갑자작) : 가을바람이 작은 뜰을 지나면서 처마 앞이 무성하다.국오상화. 천홍만자춘화, 이 꽃을 알 수 있는 복이 없다.
이 단계 시기에도 '자국' '황국' '백국' 등의 시가 많이 쓰여, 그보다 앞섰다"잔국화는 여전히 벽라" "수국추심가색온" "객리추심국엽황" 등의 문구가 다른 것 같다.이때 제백석의 시에서 색채가 풍부한 국화꽃은 청초하고 추위에 잘 견디며 외로움을 자상하던 시에서 벗어나 생명의 온기와 인도로 바뀌어 종종 차분하고 온화한 기운을 풍긴다.가령 19241925년의 국화: 금은 본래부터 값어치가 있고, 백옥은 그 자체로 희색이 만연하다.가을바람이 힘을 얻어 대단히 감사합니다.우리 집에 불어와 국(9일화):또 가을바람에 귀밑머리가 올라가고,꽃을 꺾으면 가지가 한창이다.모자챙은 주변에 꽂아도 괜찮지만 황국명은 이미 명나라가 지났다.
(그림 18) 제백석, 《총국도》, 종이본, 1922년 후난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후난성 박물관 소장 1922년 같은 예술탐구도 있고.《총국도》(그림 18)는 "서풍하물이 가장 맑고 그윽하다.꽃도 사람의 세태를 아는 것 같으니 고개를 숙일 배움이 없다"고 말했다.구도가 다양하고 풍성해 허리가 꺾이지 않는 인격과 절개를 강조하는 의미로, 이 시기에도 제백석은 창작 테마를 반복했다.1924년 중국미술관 장(藏) 《묵국게도(墨國 蟹圖, 199)》는 "중양철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삼삼오오 채소원은 넓지 않아 노욕학도울타리 밑에는 꽃을 심으면 허리가 부러진다"는 제목의 시로, 국화는 여전히 가을오상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 19) 제백석, 《묵국게도》, 종이본, 1924년 중국미술관 소장
1924년 무렵의 이 《홍국》에서는 제백석이 국화꽃을 자축하며, 자기 자신을 조롱하였다.기변법 이후 빨간색을 애용하는 이유: 노란꽃은 정색을 하지 않아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초목도 세법에 정통하고, 몸 바쳐 모란홍을 배운다.
1925년 이후 국화를 소재로 한 화면은 붉은색, 노란색 등 선명한 색채와 검은색이 강했다강렬한 색채 대비 형식이 고정되자, 각종 물상의 배합도 점점 증가하였는데, 예를 들면 풀벌레, 닭떼, 게, 참새, 심지어 콩꼬투리 등의 과일과 야채는 모두 국화와 같은 화면 내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림20) 제백석, 《추성도》, 종이본설색, 1940년 수도박물관 소장
수도박물관의 1940년 추성도(秋聲圖) 중 (그림 20), 제백석국화, 노래홍, 나비야, 꿀벌, 귀뚜라미를 모두 모아놓고 이색 가을을 연주했다.가을 서리 없이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그 광경에, 온 종이에 왕성한 생명력과 활기찬 삶의 열정이 가득하다.
1942년 수도박물관 장국화는 '상년 장수'라는 제목으로 제백석상이 되었다.장수축수의 상징으로 국화를 즐겨 찾는 '국주(國酒)'도 가장 흔하다.국화주의 전통은 남조 때 양( 梁)의 懔( 。)이 쓴 형초세시기( 荆楚世時記)로 거슬러 올라간다.그때부터 중국인들은 국화주가 능하다고 믿었다장수를 시키다. 남조 단도란 《속진양추》에 도연명이 집 동쪽 울타리에서 거문고를 타며 국화를 구경하다가, 술을 마시려고 하자, 한 백의사가 짐을 싸서 술을 가져다 주자, 바로 술을 마시게 하고, 그 유명한 시 《9일한거》가 있다.구, 국화주를 장수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제백석의 《홍국화》(1941~1944년)는 반은 선가반화가, 반은 취여에 단사를 정련하라는 뜻이다.붉은 모래가 연지로 잘못 사용되고, 사람이 장수하는 꽃이 되었다.
(그림 21) 제백석, 《추성도》, 종이본설색, 1943년, 천진양류청춘화사장
장수행복상서 만년의 제백석의 갈구하는 《국주》(그림 21)도 그가 늘 그리는 것이 되었다소재. 이 그림에서 국화는 양홍으로 꽃잎을 만들고 엷은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꽃송이는 서로 어우러져 단아하면서도 층이 있다.국화꽃잎은 꽃잎의 붓놀림과는 달리 먹칠을 하고 호방하며 전서로 쓴 꽃바구니로 여러 획의 형상을 겸비하고 있다.
(그림 22) 제백석, 《거주연년도》, 종이본에 색칠을 하였는데, 1951년, 중남해 장
후기 제백석의 국화식 형식은 언어가 간결하고 단순하며, 솔직하고 질박하여, 시각적인 평직감을 준다.짧은 선을 그어 심플하고 깔끔하게 연출하고 끈적이지 않으며 색채는 농염하지만 우아하다.1951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그림으로 그려진 '연년익수(延年益壽22)'는 제백석 말기의 예술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선(線)이 곧고 꼬불꼬불한 모양이며, 잎을 그렸지만 뼈가 있고, 중후하며 무거운 것이 중요 인물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차분하고 딱딱한 편이지만 전체적인 색채가 밝고 화려했다.화면의 열정은 생명의 기운이 넘쳤고, 치바이스의 국화는 어린 시절의 담담한 심경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행복한 장수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결어
'매' '국'의 변법 역정을 보면, 전통 문인화에 대한 제백석의 화조화(花鳥畵)의 소재를 알 수 있다.회화 기법과 인문적 이미지 사이에서 이중화한 것이다.1917년 제백석변법을 권고한 천사(陳師)의 조언, 1919년 제백석(齊白石)의 결의변법, 1920년부터 1925년까지의 제백석(齊白石)은 임모, 사생, 구변(求變)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표현양식이 있었다.치바이스가 자칭하는 홍화묵엽 일파는 그의 말년 변법 이후 예술적 특징을 요약한다.이런 예술적 특징은 기법에서 오창석의 영감을 받아 금석미를 작품에 끌어들이지만, 제백석은 멈추지 않고 오창석의 위에 자신의 특색을 그대로 담고 있다.끊임없는 변혁 속에서 화면은 번잡하고 간략하게 되어 모든 복잡한 원소와 불필요한 필묵을 제거하였다.색상의 대비가 강렬하여 가운데를 제거한다과도색, 강렬한 색상 대비가 더 큰 시각적 충격을 주는데, 이 대비는 적흑 외에도 황흑, 자흑 등이 있다.한편, 매화는 '얼음 옥골설 피부', '품격은 티끌 하나 묻지 않음', '연지를 불어 넣음으로써 훌륭하게 새롭다', '희미초', 국화꽃은 '향긋한 빛깔이 딱 그윽한 자태', '그 낙영'에서 '몸을 던져 모란홍을 배운다', '국주연년'까지 변법 전후의 선명한 색채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제백석은 시문제자를 통해 이 두 가지 장르에 내포하고 있다.이 같은 변화는 시대적 미의 풍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신세대 사회 변화 이후 늘어나는 시민층의 정신적 욕구에 부응하는 동시에 삶에 대한 내면의 자아에 대한 제백석의 솔직한 반영이다.
제백석은 '오자화'라는 독립적인 사고 정신으로,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명확하게 하였다.그의 사의화조화는 예술적 스타일과 그 안에 담긴 풍부한 정신의 함의로 시민 대중에게 다가서며 생활에 밀착하고, 흥미진진한 인문예술의 새로운 면모를 일궈냈다.1956년 여금희와 제백석의 4남 치량(齊白石)이 이미 『제백석(齊白石) 작품선집』을 집필했을 때 제백석은 "내외에서 백석화(白石畵)를 제백화(齊白石畵)라고 하는데 무슨 취지를 모르겠다.인여시는 아는 이에게 묽다.나는 아는 사람이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모르는 사람이 알 수 있는지 없는지 천하후세에 묻겠다"고 했다. 오늘 제백석의 시문회화를 돌아볼 때 우리는 제백석, 참된 지식인 제백석을 좀 더 포괄적으로 보고 싶다.
(원제 "화오자화"—제백석 "매" "국"의 제재 예를 들어, 쇠년변법을 재론하다"문장 후반부다.저자 제부(齊 齐)는 제백석(齊白石)의 증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