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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무릎 꿇는 다윗
삼하 11:1-5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 11:1-5 / [돌연히 눈에 띈 밧세바]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춘분이 지난 다음 건조기가 시작되는 때에 전쟁하는 관습이 있었다. 춘분은 바로 새해가 시작되는 때였다. 이렇게 또다시 새해가 되어 왕들이 출전해야 하는 계절이 다가오자, 다윗은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는 자기의 부하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군대 총사령관인 요압에게 주어 암몬 족속을 치게 하였다. 그러자 요압이 암몬 족속을 무찔러 그 나라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수도 랍바까지 포위하였다. 이때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2) 이렇게 랍바 도성을 포위한 기간이 봄부터 여름까지 계속되던 어느 날, 다윗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시원한 저녁 바람을 쐬려고 왕궁의 평평한 옥상으로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러다가 그는 울 안에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3) 다윗은 당장 그 여인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게 하였다. 신하들이 그녀를 찾아가서 알아보더니 `그 아름다운 여인은 엘리암의 딸로,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4) 다윗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가 이스라엘의 용장으로 암몬 전선에 나아가 싸우는 기간을 이용하여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밧세바가 다윗에게 불려오자, 다윗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녀는 마침 월경을 끝내고 정결의식의 규정에 따라 목욕을 한 다음에 왕궁으로 불려왔었다. 밧세바는 이렇게 다윗과 동침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5) 자신이 임신하게 된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밧세바는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렸다.
다윗은 산책을 하는 중에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보고 그를 취합니다. 결국 자기 생애 가운데 씻을 수 없는 무서운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 해가 돌아와(1) 그 해가 돌아왔을 때란 아빕(니산)월로 시작되는 봄, 즉 우리의 3, 4월경을 말합니다. 겨울 동안 쉬었던 전쟁은 대개 봄 장마가 끝난 뒤에 다시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때에 요압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랍바로 출전시키고 다윗 자신은 예루살렘의 안락한 처소에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생사가 달려 있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안일에 빠져 있던 다윗에게 범죄의 유혹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보다는 평안할 때 방심하다가 범죄 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저녁때에(2) 저녁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다윗은 일상적인 습관에 따라 자기 처소의 옥상에서 거닐며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항시 하던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러한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유혹의 미끼를 던지며 다윗을 미혹합니다. 한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눈여겨봅니다. 다윗의 범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눈이란 것은 유혹의 가장 보편적인 입구입니다. 이렇게 죄의 포로가 된 그의 눈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하여 의지의 선택에 악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이렇듯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미끼를 던지고 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음을 굳게 하여 날마다 근신하며 넘어지지 않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여인이 임신하매(3-5)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데려오게 하고 그녀와 더불어 동침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 앞에 놓인 율법의 담을 헐어 버리고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권력을 남용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한 가정을 파괴시키는 일과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욕심들은 죄를 낳고 그 죄는 사망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고 죄를 지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항상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적 용 : 다윗의 범죄는 보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다음 알아보게 하였고, 그다음 데려오게 하였고, 그다음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범죄치 않으려면 보는 것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잘못하는 생각은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에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는 은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비밀이 없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 설 교 >
인생의 암초(暗礁)
1912년 4월 15일! 여러분, 그 날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십니까? 수년 전 영화화되어 여러분이 익히 알고 계신 이야기입니다. 인류 역사 상 최악의 해난 사고였던 타이태닉 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날입니다. 타이태닉은 당시로서는 고속, 거대, 호화의 이미지를 두루 갖춘 최첨단 여객선이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대영제국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처녀 항해에 탑승한 사람들은, 선장이든 승무원이든 승객이든 그 누구도 타이태닉호가 침몰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침몰되던 날 밤 에도 자정이 다 되도록 갑판 곳곳에서 청명한 하늘과 고요한 바다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방에 빙산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출현인지라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빙산에 부딪쳤고, 결국 타이태닉호는 1,513명이라는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서두에서 언급하겠습니까? 아무리 거대한 배라도 암초를 만나면 좌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아무리 형통하고 잘 나가는 것 같아도 예기치 않은 암초를 만나면 속수무책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다가 인생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인생 암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 사고, 질병 등 ...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중에 가장 무서운 암초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 마귀의 유혹이요, 인간의 죄악입니다. 그로 인해 인생이 실패하고 망가지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고난보다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고난이 와도 신앙만 좋으면 얼마든지 극복해 냅니다. 오히려 더 잘 될 수도 있습니다. 악한 사단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인생을 망가뜨리고, 할 수만 있으면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기를 씁니다.
이러한 사단의 공격이 얼마나 교묘하고 집요한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 같은 훌륭한 신앙인도 그 암초에 넘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은 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잘 해왔어도 항상 순간순간 잘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좌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곧 인생을 끝까지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항해에 불쑥 불쑥 닥쳐오는 암초를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의 인생에 나타난 암초 : 밧세바를 범한 사건
본문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니, 이럴 수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평소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다윗 왕이 충신의 아내와 간통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 1절~5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6절 이하를 보면, 그것도 모자라서 그 여인이 임신하자 범죄 사실을 은폐하고자 충신 중의 충신이었던(용사 37인 중 하나였음) 그 남편 우리아까지 살해 한 것입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무서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게 인간의 실체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와 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럴 때면 마음 한편에 의문이 생깁니다. “거룩한 성경책인데 이런 추악한 이야기들은 좀 생략할 수 없나?" 하지만 오히려 이런 기록들이 성경의 위대함을 증거해 줍니다. 대개 역사책이나 위인전은 가급적 미화하고, 침소봉대해서 기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장단점을 다 보여주면서 인간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죄인, 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처럼 대단해 보이던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성경은 누누이 증거합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 ”
이러니까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런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만드는데, 이게 바로 사단의 제1 전략입니다. 창세기 3장 보면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랬습니다. 물론 실패했지만, 예수님에게조차 그랬습니다.(마태복음 4장 예수님의 광야 시험)
초대 교부 중 하나인 크리소스톰 이야기입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회가 흥왕하게 되자 로마 황제는 그를 체포했습니다. 체포해 놓고 그를 회유 협박했으나 소용이 없자,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측근들과 의논했습니다. 황제가 물었습니다. “그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을까?” 그러자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그는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신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장소를 좋아하니까 안 됩니다.” “그러면 아예 처형해 버릴까?” “그것도 안 됩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죽으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 때문에 죽는 것을 순교라며 영광스럽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죄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암초가 죄악임을 명심하고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그것이 곧 인생 승리의 기본 원리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인생을 열심히 살고, 소위 성공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몰락합니까? 인생의 암초에 걸려서 그러는 겁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이 계속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2. 다윗이 암초에 좌초된 원인 : 영적인 교만과 나태
다윗이 죄악의 암초에 걸리게 된 데에는 중요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암초는 갑자기 나타났지만 그것을 이겨내지 못할 만한 원인이 미리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① 영적인 교만 : 사무엘下 10장을 보면, 다윗은 암몬 족속과 싸워 번번이 이겼습니다. 나라는 이제 태평성대를 누리고, 모든 게 형통한 듯 보였습니다.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 은혜를 잊고 말았습니다. 마치 모든 게 자기 힘으로 된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있는데도 신하들만 내보내고 태평한 마음으로 궁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항상 전쟁에 참여했는데 말입니다. 그만큼 자만했다는 증거입니다. 1절 말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참 희한한 것은 사람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다 조금만 편안해지면 간사하게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다윗도 그랬다는 겁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까? 날마다 눈물로 간구했습니까? 그런데 태평해지니까 교만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영적 침체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시험에 넘어갑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지금 개구리라도 과거 올챙이 적을 생각해야 됩니다. 다윗이 목동 시절,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을 잊지 않고 늘 기억했다면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② 영적인 나태 : 2절(상)을 보면, 다윗은 교만한 나머지 영적으로 얼마나 나태해졌는지 모릅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 ”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피 흘리고 있는데, 자기는 기도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컷 낮잠 자고 옥상에서 한가로이 산보나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그쳤습니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마귀의 밥입니다. 원수 마귀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는 자들에게 더욱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해 옵니다. 먹이 찾는 사자처럼! 때로는 생쥐처럼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엡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결국 이런 영적인 나태로 인해 그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하고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입니다. 2절(하) 보면, 다윗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무력하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면 죄의 유혹이 올 때 브레이크를 밟으면 됩니다.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말씀은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침체된 다윗에게는 말씀의 브레이크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겁니다.
유혹 자체가 죄악은 아니기 때문에, 다윗이 그 유혹을 물리쳤다면 아무 것도 아닌 대로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된 겁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거야 어떻게 할 수 없죠. 그런데 막을 수는 있는 겁니다. 그걸 못 한 게 문제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새가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한다.” 다윗은 여기서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충만하던 다윗이지만 교만해지고, 나태해지면서 영적으로 침체되었습니다. 그런 상태니까 죄가 유혹하고 마귀가 시험해 올 때 속수무책입니다. 넘어지고 범죄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래서 신앙은 항상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신앙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현재 영적으로 침체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무너지고 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인생의 암초에 좌초되지 않는 승리의 비결 : 영적인 각성과 무장, 거룩한 헌신
인생의 항해 길에 출현하는 죄악의 암초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다윗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으면 됩니다.
① 영적인 각성 : 영적으로 나태하면 반드시 죄에 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바울이 실수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고 롱런(Long Run)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영적인 자기 관리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깨웠습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영적인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겁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구절을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자!” 그렇죠. 예수님을 늘 의식하고 예수님께 영적인 시선을 고정시키면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늘 기도로 주님께 영적인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② 영적 무장 : 다윗은 평소 늘 말씀 묵상, 기도, 찬송 ... 그런데 손을 놓았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무장 해제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번에 영적으로 고갈되고 형편없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늘 무장해야 됩니다. 그래야 영적인 능력을 충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배터리 있죠? 약이 떨어지면 금세 기계가 섭니다. 요즘 배터리는 좋아져서 오래 갑니다. 우리 영혼에도 영적인 배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충전하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겨우 하루 이틀 갑니다. 한번 기도 열심히 하면 한 주간 이상 가고, 한번 부흥회 하면 한 달 가고 ... 그러면 편리할 텐데 ...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음식물 섭취하는 것, 잠자는 것, ... 특별한 경우 빼놓고는 하루도 거를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 읽고,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부장되어야 죄의 유혹이 오고 마귀의 공격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엡6:10~18 영적인 무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엡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런데 그 무장 중에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성령의 검인 말씀과 무시로 하는 기도입니다.
영적인 무장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빈 집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비유하면, 무엇보다 집이 깨끗해야 되죠.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만약 집을 깨끗이 청소해도 그냥 두면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집니다. 그것을 보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무념무상이라 하면서 마음을 비웁니다. 나쁜 사심을 제거하는 것이야 좋죠.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계속 사심이 들어오니까 마음이 빈 진공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평생 기를 씁니다. 그리고도 이룰까 말까입니다. 이뤄도 별 게 아니고 ...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합니다. 즉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즉 영적인 진공 상태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함을 받습니다. 그 후에는 성령으로 충만케 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마음의 정결함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큰 능력으로 죄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빈 컵에 공기가 가득한데, 물을 넣으면 공기가 빠져버리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공기가 못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무장하면 얼마든지 죄악을 이기고, 사단의 공격을 이겨낼 줄로 믿습니다.
③ 거룩한 헌신 : 다윗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여유와 한가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가운데 인간에게 여유가 생기면 뻔 할 뻔 자입니다. 반드시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공식을 만들어 봅니다. < 죄인 + 시간적 여유 + 물질적 여유 = 타락과 범죄 >
많은 사람들이 중년기를 넘어가면서 위기들을 맞이하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세상의 목표 때문에 속상해 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이런 경우는 쉽습니다. 계속 노력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 성취한 후에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돈도 벌었고, 지위도 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적절하게 그 여유를 사용할 선한 목표를 찾지 못하면 엉뚱한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죄악의 암초에 걸려 평생 이뤄 놓은 재산 날리고, 지위와 명예가 추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거룩한 일에 시간과 물질 등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선용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인인지라 오용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유명한 과학자요 크리스천이었던 에디슨에게 한 청년이 물었답니다. “선생님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시험에 빠진 적이 없나요?” 그랬더니 에디슨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겁니다. “시험? 글쎄 ... 나는 평생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시험에 들 여가가 없었다네.”
그렇습니다! 한가함은 오직 주님과 신령한 교제를 위해서만 허용하십시오. 기도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도 문제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거룩한 일, 선한 일들을 위해 바쁘시기 바랍니다. 이게 거룩한 헌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인생의 항해를 어떻게 해오셨습니까? 순항하셨나요? 다행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곧 오늘도 내일도 계속 순항할 수 있음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닙니다. 늘 영적으로 각성하고, 무장하고 거룩한 헌신을 하십시오. 그래서 다윗처럼 죄악이라는 인생의 암초에 좌초하는 실패의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순항하는 승리의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범죄
삼하 11:1-5절
본문의 내용을 강해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서의 신실성에 관하여 깊은 묵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습니까?(삼상16:7, 12절 행13:22절) 심지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행13:2절)고 까지 기뻐하셨던 사람인데 이곳에서는 그의 잘못을 숨김없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① 그것은 성서 자체가 극구 찬양하는 자의 잘못까지도 적나라하게 기술하는 신실한 책인 것을 말해줍니다.
② 또 어느 특정한 무리를 위해 기록한 책이 아니란 것입니다.
③ 선 줄로 생각하는 자를 넘어지지 않게 조심시키기 위한 경각심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혹 인은 이 내용을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合理化)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의 진의(眞義)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기사가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입니다.(고후2:16)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거룩한 질투심을 느끼고 죄에 대한 항구적 경각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갈6:1) 그런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금은 영구히 그 빛을 잃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내버려두시면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본장을 공부하며 깨닫기 바랍니다.
1. 다윗과 밧세바(11:1-5절)
1절에 해가 돌아와서란 말은 암몬족속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어 한 해가 지났음을 말합니다.
전쟁이 한창 격렬한 때가 되어 다윗왕도 출정했어야 했는데 자신은 가지 않고 요압장군과 그의 신복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어 암몬의 랍바성을 외워 싸고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낮잠을 자다가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굴복 당하여 7계명을 어기는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7계명은 성경에서 매우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욥31:11, 잠6:32-33절)
(1) 다윗은 왜 간음죄를 범했습니까?
①그는 업무에 태만했습니다.
전에 아람인과의 전쟁에서는 친히 출정했었습니다.(삼상10:17절) 친히 총수로 자기 사령탑에 나가 있었더라면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승리와 번영을 누린 후에 자신감에 빠져 태만했었던 것 같습니다.
② 그는 안일을 탐하고 게으름을 피웠습니다.(2절)
“저녁때에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일어났다”(2절)고 했습니다.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 그가 침상에서 한 나절을 낮잠으로 소일했다는 것부터가 화근이었습니다. 환난 날에는 온종일 기도하곤 했던 다윗이었습니다. 방심이나 안일을 탐하는 게으름은 유혹자에게 큰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③ 발길과 시선이 문제였다.
다윗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부주의 하였습니다.(요일2:16절) 지붕위에서 배회하다 하필 눈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다. 하와의 경우처럼(창3:6절) 죄가 눈을 통해 왔습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시119:37절) 했는데 그때 다윗의 눈에는 유달리 아름다워 보였었습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잠23:31절) 했는데 “안목의 정욕”을 결정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마5:9, 18:9절 이하)
2. 다윗이 범죄 한 단계
(1) 그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탐문하였습니다.
그녀는 처녀가 아니었으며 아히도벨(후에 반역하고 압살롬의 수하에 가담. 삼하16:20, 23:34)의 손녀였고 다윗의 가장 용맹한 장군중의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3절)
(2) 절제하지 못한 욕망
그러나 다윗의 욕망은 맹렬했으니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사자(使者)를 보내어 데려오게 했으니 그때까지는 대화나 나누고 동침 할 의사까지는 없었는지 모릅니다.
(3) 그러나 만나보자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밧세바는 너무 쉽게 몸을 허락한 것 같습니다. 임금이라는 권력과 권위 앞에 감히 항거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마귀는 틈만 나면 우리에게 상(床)을 차려줍니다. 죄의 길이 얼마나 내리막길 인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툼의 시작”처럼 정욕의 시작도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다”(참17:14절)고 했습니다. 미련한 나비는 날개 짓에 열중하지만 촛불 주변에서 놀다가 결국 자기 생명을 날려 버린답니다.
(4) 다윗에게는 처첩이 많이 있었습니다.(삼하3:2-5절)
그런데도 정욕을 억제치 못하고 남의 현숙한 아내를 범했다는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범죄 가능성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임을 경각케 하며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상습자가 아니었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음은 그래도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하나님은 용서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 사람이 뿌린 씨를 거두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시99:8절 참조) 그 죄가가 얼마나 컸습니까?
① 어린 젖먹이가 죽었고(삼상12:8) ②압살롬은 다말을 범한 암논을 죽였으며(삼하13:33절)
③ 요압장군이 다윗 왕에 반역했던 압살롬을 죽였고(삼하18:9-17절)
④ 아도니아(다윗의 아들)는 브나야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상2:25절)
⑤ 설상가상으로 다윗의 아내들이 아들 압살롬에게 추행을 당했습니다.(삼하16:20-23절)
다윗은 한 순간의 육욕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엄청난 값을 치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절)
다윗과 밧세바
삼하 11:1-5
제가 요즘에 읽고 있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모티브는 이렇습니다. ‘만약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고, 주인공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으세요? 잘 보이던 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게 되면 말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많이 당황할 것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더욱 처참한 상황에 처하는데요. 왜냐하면 눈이 먼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들도 똑같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눈이 먼 사람들은 시설에 격리됩니다.
그래서 좁은 시설에 수 백명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고통을 참아주고 예의도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볼 수 없게 되면서 깨닫기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익숙해지자,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아무 곳에나 배설을 하게 됩니다 (죄송해요.. 아침부터). 사람들이 화장실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귀찮기도 하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니까. 그러면서.. 그래서 그들이 머무는 시설에는 온통 똥 냄새로 진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더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도 없고 무엇보다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더러운 것도 익숙해지면 살만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옆에 누가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남이 나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부끄러움도 사라지게 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소설은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실날하게 묘사합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내용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본능에 너무 충실했던 한 사람”의 모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 사람. 수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 그런 다윗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윗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다윗은 성숙했고,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윗이 추락하는 사건은,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감과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현대로 따지면, 대형 교회 목사가 성도 중 한 명과 불륜을 저지른 사건과 같다고 할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봄이 되면 왕들은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래서 다윗도 전쟁터에 나가야 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습니다.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왕궁의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평화로운 시간들이고, 여유 만점이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눈에 한 여자가 목욕하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눈에 이 여자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다윗이 있는 곳과 여자가 있는 곳의 거리가 상당히 있었을텐데, 어떻게 여인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다윗의 마음에 유혹이 찾아와서 다윗의 눈을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눈에만 이 여인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종을 불려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종은 다윗이 본 여인은 밧세바이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충성된 부하였는데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도 다윗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서 밧세바를 데리고 오게 했고, 그 날 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윗은 밧세바를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을텐데, 한 달 후에 밧세바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전해 오게 되면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한 일을 숨기기 위해,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궁으로 불러 들입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가 밧세바와 동침하게 되면, 밧세바가 낳을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모르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이런 의도와는 달리, 우리아는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 장군을 통해 그가 전쟁터에서 교묘하게 죽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사무엘하 11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눈먼 자들의 도시’의 내용들이 생각났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윗이 눈이 먼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다윗은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귀도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궁을 거닐다가 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 장면에서 다윗의 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라고 말입니다.
임자 있는 몸이예요. 그것도 충성된 부하의 아내랍니다! 라고 부하들이 말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부하들의 말을 알아들어야 되는데, 이에 상관하지 않고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드렸습니다. 다윗이 ‘나쁜 왕들의 선례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냐 하면, ‘다윗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다윗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눈에 아름다워 보였던 밧세바이었지만,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오기 전까지, 한 번도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룻밤 욕망을 채우는 존재로만 밧세바를 본 것이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전염성도 매우 강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패턴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래서 지루합니다. 잠시 동안은 쾌감을 주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는 더욱 강력한 것을 찾게 됩니다. 죄는 결국 가장 강력한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는 죄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봄이 되면 왕은 전쟁터에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궁에 남았습니다. 즉 다윗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그는 잠을 잤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라고 여기거나, 시시한 싸움터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이렇게 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목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장로가 있어야 할 자리, 집사가 있어야 할 자리,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생기는 일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 만 해지고, 시간이 많아지면 타락해 버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하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요? 술집은 아닐 것 같아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기도의 자리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의 자리에 있으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봄이 되었으니 우리 마음 밭에도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야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의 씨를 여러분의 밭에 뿌려보세요. 이것이 농부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수 백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이것이 오늘 본문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뛰어난 영성을 가진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선생이고, 왕이고, 목사고, 부모이고, 이웃이라고 할찌라도, 밧세바와 그의 남편에게 저지른 행동을 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는 많은 것을 파괴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인생을 망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저지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씀은 충격으로 들려야 합니다. ‘의인이 없다. 그것도 하나도 없다는 말씀도 우리에게 충격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이 믿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의인인데..” 라는 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의인이라고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죄인은 아닌데 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죄인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라고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말합니다. 저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십니요. 하나님의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의 본성을 어떠한지를 보았습니다. “신이 되려고 하는 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려고 하는 자”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윗의 모습은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눈이 멀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눈도 모두 멀었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라고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왕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우리가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왕이 되고 싶어하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한 도시라고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의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불러준 롯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통틀어서 의인을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다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땅에 의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없다’는 말이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렌디 알콘의 ‘악의 문제 바로 알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웨슬리 앨런 도드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자 아이 세 명을 고문하고 추행하다가 살해한 사람입니다. 1993년 1월 4일 자정 직후 미국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웨슬리가 죽기 30분전 12개 방송사에서 상황을 생중계 했습니다. 그 때 언론을 통해 발표된 웨슬리의 마지막 말을 듣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소망과 평안이 없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소망과 평안을 찾았습니다” 객석에서 분노에 찬 신음 소리와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천하의 살인마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니 정의의 심판을 보러 온 군중은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여러분도 충격에 빠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랜디 알콘 목사도 충격에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그가 고백했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웨슬리와 내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 우리 둘의 차이는 미미했다”라고 그가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내가 웨슬리고, 빈 라덴이고 히틀러다! 라고 그가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악한 행동을 보면,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교만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저런 상황이 되면 다윗처럼 행동합니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다윗의 모습을 보세요. 그는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서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부하를 너무나도 끔찍하게 생각하는 왕의 모습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포장한 것이지요. 우리 안에도 친절과 도덕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다윗의 모습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예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은, 죄에 대해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있게 깨닫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도, 자신도 죄를 계속해서 짓고자 하는 악학 본성이 남아 있다는 자각이면서, ‘나는 내 죄의 깊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C. 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심지어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도 싸다는 진정한 자각이 있었다..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에게 복음은 치유의 가능성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따라서 죄의 의미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악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라는 특권의식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의롭다 라는 특권의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 라는합니다. 빈 라덴이나 히틀러보다 착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물에 빠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물에 빠져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실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즘에도 우리는 언론 매체를 통해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줘야 합니다. ‘다음은 내 차례인지도 몰라’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다윗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종들이 보고 있었고, 요압 장군이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있구나” 라고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윗만 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하나님이 이 일을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사라마구의 소설처럼, ‘눈먼 자들의 도시’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못 볼 수 있다는 인식,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은 열려 있다는 인식,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인식이 매우 중요함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만” 이라는 찬양입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 주님만 가득했을 때, 그는 주의 종으로, 생명을 살리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 자기로 가득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내 마음 속에 주님만 가득하게 해 달라고, 내 모든 생각에 주님이 가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렀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같은 죄인이 가야할 곳은 주의 은혜의 강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가서 갈한 우리의 영혼이 생수로 가득채우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기실 바랍니다.
인간의 본질
사무엘하 11:1-5
누가복음 18:9-14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그 행실을 놓고 본다면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면서 의를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고, 세리는 부정을 일삼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행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하나님은 세리가 아니라 바리새인을 더 가까이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는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세리의 의로움은 행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고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고백’이라는 행함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존재로 보는 낮아짐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착한 행실을 많이 가지면 그 행실이 공로가 되어서 복으로 승화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자신의 행실을 착함으로 보는 것이야 말로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그것은 곧 ‘나와 너는 다르다’는 바리새인적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구별의식이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실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분명 나와 다른 타인의 행실이 보여지게 됩니다. 나보다 나은 행실일 수 있고 오히려 못한 행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은 것이든 못한 것이든 그러한 시각에서 구별이 발생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은혜에 도전하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원수로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인간을 구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없음을 다윗의 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봤던 다윗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을 죽이고자했던 사울까지도 살려준 다윗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남편이 있는 여자와 동침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다윗을 두고 과연 ‘그래도 내가 다윗보다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다윗과 같은 악한 행실을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다윗보다 더 나은 것입니까? 만약 그러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갖고 계신다면 인간의 내면을 보지 못한 무지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사람들이 모인 무리가 아닙니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인간의 무리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멸망을 받아야 할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성, 인간의 가치적 면에 있어서는 이방인과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사라져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라면 이스라엘 역시 그와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있어야 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교회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선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세상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착각일 뿐입니다. 당장 여러분 자신들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규정할 자신이 있습니까? ‘나는 착하다’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다움을 착한 행실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 역시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의 기능에 인간을 착하게 순화하는 것을 포함시켜 놓고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착한 행실을 보이지 않으면 교인답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란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을 뺏긴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용서의 은혜, 여기에 모든 마음을 뺏긴 사람들이 모여서 은혜를 노래하고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무리들을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착한 행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의 마음이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착한 행실이 보여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 교회됨을 증거하는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윗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 것입니다. 다윗을 간섭하셔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는데 왜 그냥 두고 보셨을까요? 죄를 짓도록 방치해 버리신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셔서 죄를 범하지 않게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두고 보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을 그냥 두고 보신 것은 다윗에게 있는 인간의 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하 32:31절에 보면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즉 다윗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빛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여겼던 다윗에게서 악한 죄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는 구원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하시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에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악함을 깊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넘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부분에서 믿음 없음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어느 한부분에서라도 ‘나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저는 신자가 믿음 없이 살았다는 것 보다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악함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면서 은혜를 말하고 있다면 그 은혜는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은혜는 결국 삶의 환경과 형편으로 인해 언급되는 수준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멸망을 받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죄의 현장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회개는 날마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인생은 어둠뿐이며 사망으로 끝날 뿐임을 자각하며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살기를 원하는 회개가 날마다 있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게 신자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부문에서 우리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원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만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기독교란 종교에 안주해 버리고, 은혜에 대한 깊은 마음이 없이 은혜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적군은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 왕들이 출전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과 신복과 군대만을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안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승리를 당연한 자신의 몫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승리할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겠죠.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삶을 여러분의 당연한 몫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누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기독교란 종교에 안주해 버린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발견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아무리 믿음으로 살았으며 믿음의 모습을 보였다 할지라도 밧세바를 범하는 자신의 악함을 알았을 때 과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다윗이 죄를 범할 때마다 막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다윗은 평생 자신의 악함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은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왜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있습니까? 지금의 형편에 대해 하소연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을 찾기 전에 먼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다윗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악함에서 날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분명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베풀어진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다윗의 얘기는 다윗과 같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 스스로 무리치고 이길 수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이미 내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악을 어떻게 내 스스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악을 물리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악한 존재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바라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낫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시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
삼하 11:1-5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지나가실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외쳤는데, 마 15:22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한 이 여인의 말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신약 성경 첫 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나셨습니다. 그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시는 다윗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여덟째 아들 막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목동의 생활을 하면서 곰과 사자를 맨손으로 잡아 죽였고, 골리앗 대장에게 매끄러운 돌 한 개로 승리하였으며, 수금을 잘 탈 줄 아는 음악의 천재였고, 시를 잘 읊어서 문학적 소질도 있습니다. 또한 백만 대군을 호령해서 적군을 섬멸시킨 천하무적의 장군이었고, 남북을 통일시킨 정치가였으며, 하나님의 성전 기지와 모든 자재를 구입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신앙인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 왕은 역대의 모든 왕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빛나며 최대의 존경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가 시초에는 불과 400명의 부하를 데리고 있었지만, 후에 600명으로 늘어났고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다음에는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왕노룻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고 난 후에는 열 두 지파가 다윗왕을 지지하게 되어 왕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 곳에서 33년간 선정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실 때에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신 적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자” 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을 성경 중에서 받은 분은 오직 다윗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위대한 다윗 왕이 정욕에 약하여 쉽게 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처와 첩을 두었고 그 수가 열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처첩 때문에 여호와 앞에서 한 가지 악한 일을 행한 적이 있는데 그 범죄 한 내용의 말씀이 오늘 봉독한 본문입니다. 하루는 다윗 왕이 저녁 때 쯤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심히 아름다운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기에 다윗은 신하를 시켜서 그 여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데려오라고 하여 동침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여인이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마음에 큰 걱정이 생셨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기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재앙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러한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까 ?
1. 낮에 침상에 누워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밤낮을 주신 것은 밤에 잠자고 낮엔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특히 그 때는 암몬 자손과 싸우고 있는 전시로 비상시였습니다. 그런고로 왕은 마땅히 군부의 수뇌들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전시 태세를 확립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낮에 잠만 자고 있었으니 이 일은 곧 악마인 사단에게 기회를 주어 마음대로 하라고 내어 맡기는 태도로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지붕 위로 올라간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지붕 높은 데로 올라가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교만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건설한 예루살렘 성이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한가” 뽐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할 때 성전 꼭대기와 높은 산 위에 데리고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단의 수법은 언제나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서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입니다.
3.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아야 할 것은 보려고 해도 안 보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안 보려고 해도 보여 지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하와도 보지 말아야 할 선악 과실을 계속 쳐다보다가, 결국 사단의 꼬임에 넘어갔고, 다윗 왕도 눈으로 옳지 못한 것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충동을 받아 행동으로 범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군 다윗이 실수를 한 것은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견물생심이란 옛 말과 같이 인간은 보는 것에 약하기 때문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 보다가는 그만 마음의 충동을 받아 행동으로 범죄 하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4. 아무 일도 없을 때 실수를 했습니다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칠 때는 이러한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다. 골리앗과 대적할 때도 사울과 압살롬에게 쫓길 때도 이러한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다 정복하고, 남북이 통일되고, 경제가 풍부하며, 왕의 권세를 누리고 암몬과 잘 싸워 이길 때 이런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낮잠만 자고 침상에서 저녁때나 일어나서 한가하게 지낼 때 사단의 유혹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바쁜 생활은 곧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자격으로 24시간이 다 자기의 시간이 되고, 할 일 없이 한가 해지자 그만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정생활에도, 사희생활에도, 신앙생활도 마귀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바쁘게 확 짜여진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5. 그 때 다윗 왕의 연령입니다.
다윗은 그 때는 20대도 아니고, 30대도 아닌 40대의 장년이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세계의 가정생활의 이혼율의 통계를 보면 한국은 30대가 이혼율이 많고, 미국은 50퍼센트의 가정이 이혼하는데 그 중 40대 연령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두 명에 한 명 꼴이 이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40대가 주위의 유혹을 가장 많이 받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다윗 왕도 바로 이 40대에 일생에 한 번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악한 왕이었다면 당장에 그를 잡아 죽였을 것이지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하고 깊이 통회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장점인 것입니다. 시 51편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후 나단 선지의 책망을 받고 깊이 회개하는 눈물의 시가 나습니다.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근본적인 죄까지 끄집어내어 통회 자복하였던 것입니다. 왕상 15:5에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한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 조상이 되는 분입니다. 그 분의 장점은 본받고, 그 분의 실수는 마음에 새겨서 우리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고 축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중년의 위기 유혹’
삼하 11:1-5
다윗이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같이 신실한 사람도 죄를 짓고 넘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어가던 중년의 다윗은 순간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죄에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간음죄와 이를 은폐하기 위한 살인 교사죄, 그리고 회개 등 일련의 사건 전개는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1. 본문 분석
① 다윗이 범죄했을 때의 상황을 봅시다. 다윗은 인생의 황금기에 섰을 때 죄의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모든 백성들이 다윗을 흠모했습니다. 전쟁을 하는 족족 모조리 승리해서 주변 여러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영토 확장과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밧세바 간음 사건은 암몬 족속과 그 용병 국가들을 다윗 자신이 궤멸시킨 제 2차 정복 전쟁 후에 일어난 사건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1절을 보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으나 다윗은 직접 출전하지 않고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만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부하들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다윗은 안락한 상황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유혹은 모든 것이 잘될 때 찾아옵니다. 인생의 황금기에 유혹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로 틈 못 타게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② 다윗이 범죄했던 단계를 눈여겨봅시다.
2절을 보세요. 첫째로, 다윗은 어느 날 저녁에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유혹을 받았습니다. 낮의 기온이 유난히 높은 중동 지역에서 한 차례 낮잠은 꼭 필요한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동안 깨어 있지 못하고 낮잠을 잤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최고 수장(首將)으로서의 다윗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해이해져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둘째로, 낮잠을 깬 다윗은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다가 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습니다. 순간 다윗의 마음 속에 음욕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마치 하와가 뱀의 유혹하는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것처럼(창 3: 6), 다윗도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순간적인 정욕을 느꼈던 것입니다.
셋째로, 순간적인 애욕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다윗은 그 여인의 신분을 알아보도록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됩니다.
넷째로, 다윗은 다시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한 다음 동침했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데려왔다는 사실은 다윗의 간음 행위가 얼마나 고의적이며 계획적이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섯째로, 밧세바와 동침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자기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섯째로, 다윗이 지은 죄는 밧세바의 뱃속에 생명의 씨앗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실로 범죄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온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2.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
첫째로, 만사가 잘 나갈 바로 그 때, 특히 중년의 위기를 조심하십시오. 다윗은 인생의 절정기에 황금기에 죄를 지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안정이 되어 전성기를 구가할 바로 그 때에 유혹은 덫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바로 그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것을 이룬 중년기에 더욱 근신해서 유혹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 긴장이 풀리지 않게 하십시오. 다윗은 부하들이 랍바 제 2전투에 참여했을 때 홀로 왕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깨어 있어야 할 그 때에 낮잠을 잤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긴장이 풀려져 있을 때 목욕하던 밧세바의 모습을 보았을 때 순간적인 애욕의 감정을 참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이기기 위해 늘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영적 긴장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매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는 살 수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도 죄의 유혹에 빠졌는데 우리같은 보통 사람은 말할 것이 못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도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연약한 피조물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 12)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