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기도 894. 하느님이 가출하셨어요(231226)
민구식
반짝반짝 딸랑딸랑 온 동네가 빨갛고 번쩍거리고, 노래소리가 눈보다 더 많이 쌓이는 날
그레고리안 성가 울려 퍼지는 성당엘 갔는데요
신자 분들이 저를 보고는 무척 반가워 해서 의아했습니다
“요즘 안 보이시던데, 이사 가셨나요?”
“아뇨, 이사는 안 가고요, 다른 데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 볼까 싶어 여기 저기 기웃거려 봤지요”
“아하! 그러셨군요, 그런데 다른 곳의 하느님은 잘 계신가요?”
“몇 군데 알아 봤는데, 제가 보기에는, 하느님은 똑 같으신 것 같은데 하느님 계신 방(房)인 『계약의 궤』가 다르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느님을 모셔 두거나 모시고 다니는 가마가 있는데 가마 하고 가마 꾼이 다르더군요”
“그게 또 무슨 말씀인지요?”
“어떤 교회의 가마 꾼들은 가마 치장하기에만 바빠 화려하고 무겁고, 멋지게 꾸미는데 돈을 들이느라 늘 재정이 빈곤하고, 그렇게 꾸민 가마일수록 하느님은 그 속에서 답답해 하시더군요.
가마 꾸미기에 혈안이 된 가마 꾼들의 농간에 하느님을 가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들여다 보지도 못하게 하며 보초를 서고 있더군요”
“그럴리가요?”
“교회가 크고 신도가 많을수록 그 정도가 심해서 하느님은 아예 외출 하시거나 도망가서 안 계시거나 계셔도 주무시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가마는 그대로 둔 채 자기들끼리 먹고 하느님 이야기는 안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며 노느라 정작 하느님은 외롭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하느님이 도망가서 계신 곳을 찾아 봤지요, 절에도 가보고, 산이나 들이나, 지하철이나 다리 밑에나, 어둡고 습하고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계실 것 같아서요 ….”
“그런다고, 그런 곳에 계실까요? 하느님께서?”
“지난 주에 지하철 계단 아래하고 지하도를 들여다 봤는데, 여기 저기서 쫓겨 다니던 하느님이 추위에 벌벌 떨면서 누더기를 걸친 채 더럽고 누추한 몰골로 구걸을 하거나, 차가운 것들을 먹고 있거나, 신문지 몇 장에 기대어 주무시는지 울고 계시는 것 같아서 …“
“그래서 깨워서 확인해 봤나요?
“깨웠지요, 하시는 말씀이”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성가를 부르고
두꺼운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다녀도 말씀은 귀에 안 들리고,
예쁘고 따듯한 옷 입고, 선물도 주고받으며 영어로 인사하는
기름기 많은 신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데 당신은 쳐다 보지도 않길래
당신은 그런 부자들끼리 놀게 두고는
마구간이 그리워 차라리 소나 양이나 말들 하고 노는게 좋다고 가출하신 거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정작 교회는 하느님이 가출 했는지도 모르고 지금 엄청 엄숙하게 성탄 전야 미사를 지내고 있다네요”
“그러신 하느님은 언제쯤 돌아 오신답니까? 안 오신답니까?”
“안 오실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셨다네요.
좀 누추 하지만 그리로 오는 사람들은 받아 주신다네요”
“거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저도 그런 누추한 곳에 선 뜻 갈만한 배짱을 못 가지고 있나 봅니다. 추적해서 알아 봐야겠습니다. 찾게 되면 알려 드릴께요 그런데 동가숙서가식 하시는 통에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근데 멀리 가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 동네 어딘가에 계시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