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한다고? '
' 이렇게.. 윗입술을 올리고 아랫입술은 아래로 당겨서 윗니 두 개가 살짝 보이게. '
' 이렇게? '
' 아니, 이렇게.. 이렇게... 어때, 흐흐..웃기지 ?'
' 이렇게 ? '
' 아니..윗입술을 좀 더 올려봐, 요렇게 '
' 에잇, 몰라. 뭐가 이렇게 어려워? 글고 이게 뭐가 웃기다는거야, 하여간 정신세계하고는..'
' 아냐. 이거 진짜 웃겨. 걔가 하면 정말 웃겼다니까. '
' 됐거든....? '
' 사정없이 귀여웠단 말이야... '
한가로운 오후녘.
오늘의 날씨는 평년기온을 회복하여 어제보다 2도 상승한..어쩌고 저쩌고가 들려오는 시간.
언제나 뉴스가 나 홀로 떠드는 시간.
어린 나는 습관처럼 엄마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고, 헐거워진 양말이 갑갑할세라 양 발을 까딱까딱거리며 무협지에 빠져들었고, 그럴 때의 엄마는 한결같이 내 시간들을 방해하며 뜻모를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었다. 게다가 그 날은, 연신 입모양을 들쭉날쭉 하고 계셨는데 그게 또 뭐가 잘 안되는지 결국엔 나에게까지 실행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거.
띠디디디..띠디디디..
끄응, 하고 게슴츠레 흘겨 본 시각 11 : 11 A
또 저 숫자다.
맞춰놓은 알람시계를 깨 부술 리도 없는데, 어째서 매번 이리도 늦잠인걸까.
오전에 눈떠 새하얀 벽지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왜 그리 오래전 기억이 생각났는진 모를 일이다.
꿈. 대부분이 무채색인, 생생하고 오롯한 저 편의 의식.
[ 엄마, 나 졸려.. ]
[ 그래? ]
그럼 두 말 않고, 그게 언제든지간에 날 침대까지 고스란히 데려다 주었던 사람.
어떤 때는 업어다가, 어떤 때는 덥석 안아올려다가, 심지어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도 그러셨으니
가히, 적지 않은 내 키를 고려해볼 때, 엄마는 무척 힘이 남다른 여자였던거다.
그 당시의 내 방은 2층이었는데 침대에 날 가만히 내려다놓고 시트자락을 올려준뒤, 그러고 돌아서는 엄마의 슬리퍼 소리를 나는, 굉장히 좋아했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이마에 키스를 한다던가 잘자, 내딸..하는 식의 달콤함 따윈 기대할 수 없었지만 어슬렁거리는 엄마 특유의 걸음걸이. 그 한적한 울림.
그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묘한 안정감이랄까, 평온..같은 것을 감히 무엇과 견줄 수 있을까. 설명하긴 어렵다.
그저 그대로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로 피식, 실소를 물고 말았고, 끙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이란,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 번 켜는 것. 그리고 누구처럼 어슬렁거리며 거실을 가로질러 나가 베란다의 창문을 한 껏 열어놓고 언제나 비치되어 있을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무는 것.
후우..하고 연기라도 뱉어낼라치면, 어떨 땐 기침이 쏟아져 나올것처럼 메슥거릴 때도 있지만, 괜찮아.
" ....... "
비나 좀 오시지, 운치없게스리.
방충망 사이로 제법 날카롭게 새어들어오는 바람내음에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리고 싶었던걸까.
" 전화 좀 해 ..응? "
정지연
[ 저녁때 외식하자, 시간 비워둬 ]
실은 오전 중에 몇 번씩이나 전화가 왔었는데도 계속해서 씹고 있었다. 모니터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노란 포스트잇 가운데는 언니와 내가 찍은 사진도 버젓이 붙여져 있었다. 지난겨울 둘이서 동해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죽으라 안찍겠다는 걸 부득불 내가 우겨 겨우겨우 찍은 그것을 난, 홱 하니 낚아채 떼어 버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소갈딱지가 좁아도 이렇게 좁을 수가 없다. 안다, 나도.
[ 꼭 비워둬 ]
재차 문자가 왔다. 답지 않게 두 번씩이나 문자를 보내다니, 언니로서는 많이 양보한 것이리라. 사실, 필요이상으로 유난하게 군 건 나인걸 알면서도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건 나로서도 잘 납득이 안 된다. 언니는, 자인 언니는 도대체 나한테 뭐였을까. 아니 우리에게 언니는 과연 어떤 존재였던걸까? 뭣 때문에 난 그렇게까지 열을 낼 수 밖에 없었을까. 새삼 중요하지 않던 사실이 불현듯 오늘 같은 날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리를 떠나질 않는다. 멀찌감치 밀어둔 담배를 집으려다 다시 놓으며 메일을 열었다.
hey, baby 로 시작하는, 거의 두 달만에 날아온 짤막한 메일. 엄마의 익숙한 문체는 정겨운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그다지 별 스러울 것도 못 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그렇단 얘기다. 온통 언니에 대한 안부로 시작하여 안부로 끝나는 내용들. 이럴 걸 자인이 언니한테 안 보내고 꼭 나한테 보내는 그 얄궂은 심보는 도대체 뭐란 말인지. 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녀의 특수하기까지한 기이한 애정의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딸년이었으면 아마 비뚤어져도 제대로 비뚤어졌을지 모를 정도로 엄마의 메일은 늘 위험수위를 왔다갔다 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나에 대해 둔감했다. 그냥 먹을 거 챙겨 주고 입힐 거 입혀놓으면 제대로 잘 알아서 크는 식물같은 존재? 혹은 선인장같은 아이? 그게 나인줄 아나보다. 엄마는 아직도 잘 모르시는게지. 내가, 당신을, 무척, 그리워한다는 것을.
5살 땐가. 정확히 기억날리도 만무하지만 어쨌든 들은 바로는 그 무렵부터 나는 자인 언니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엄연히 말하면 엄마와 나, 자인 언니. 이렇게 셋이서. 어릴 때 난 샘도 그렇게 많아서 자인언니가 내 방을 같이 쓰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싫은 티를 내고 생떼를 쓰고 그랬나본데, 그럴 때마다 자인 언니는 조용히 1층으로 내려가 거실 쇼파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쩌랴. 어린 애들이 다 그렇지. 그렇게 우리는 함께 자랐다. 늘 바쁜 엄마 덕에 많이도 외롭게 컸을 내 유년기를 어쩌면 보드랍게 채워줬던 건 자인언니 덕이었을게다. 언니는 나보다 다섯살이 많다. 많은데도 한 열 살은 더 많은 거 같다. 그런 분위기란 게 있었다. 말이 없었고, 양보가 습관이었고, 불평할 줄 몰랐다. 어린 것이 안쓰러울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며 엄마는 어느 날, 한 숨 섞인 혼잣말을 하신 적이 있다. 그 때 언니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갈아 신고 있었고, 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다 말고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식탁에서 묵묵히 일을 하다 말고 하시던 엄마의 혼잣말은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후에 돌아보게 된 언니의 등. 자인 언니의 등. 그 등에는 희미한 빛 같은 게 존재하는 거 같았다.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흐릴 때나 개일 때나, 언니의 등에는 늘 어딘가 미세한 빛이 새어나오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묘하게 외롭고 묘하게 든든하여 언제든 나로 하여금 의지가 되게 하는 견고한 성과도 같았다.
그 성이 무너진 건, 언니가 고등학교 졸업식을 얼마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여느때처럼 늦게까지 학원수업을 마치고 들어오던 길이었는데, 당연히 환하게 켜져 있어야할 집안의 불들이 모조리 꺼진 채, 집안은 온통 깜깜한 암전처럼 어둠 속이었다. 이상하네, 아무도 안 왔나? 나는 터덜터덜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던진 채 거실의 불을 켰다. 그리곤 곧장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내 발걸음은, 순간 불현듯 내 시야에 들어온 어떤 희미한 빛 때문에 주춤하고 말았다. 불이 꺼져있던 부엌.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만이 알아볼 수 있던 미세한 빛. 그건 자인언니의 등이었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난, 그 순간 서둘러 다가가지 못했다. 그 대신 발소리를 죽인 채 숨소리도 죽인 채 조금씩 천천히 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고 내려다 본 거기에는 언니의 굽은 등이 한참을 말없이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언니는, 언니는...
" 언니..? "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식탁 끝, 늘 엄마가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정면을 주시하던 눈. 언니는 교복도 벗지 않은 채였고, 얼마나 그 자리에 있었는진 몰라도 식탁위에 놓여있던 투명한 컵에는 언제 담겨있었는지 알 수 없는 절반의 물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조금만 더 지켜보고 싶다고.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언니의 저런 옆모습을 조금만 더 지켜보고 싶다고. 그렇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진 않을거야. 그러니까 오래 봐두고 싶어. 그러고 싶어, 하는 뭐 그런 기분. 마치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 오던 사람이, 이제 곧 떠날 때가 되어 마지막 인사를 앞두고 있는 것인양 나는 그 기묘한 울렁거림속에 잠시 갇혀 있었다. 나는 어렸다. 사춘기가 뭔지도 모를만큼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아이었다. 그런데, 그 날 그 잠시동안 언니의 호젓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덩이가 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가지 마. "
나는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뭘? 도저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고, 언니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언니의 피부가 저토록 창백한 상아빛인지 몰랐다. 언니는 외계인같았고 불꺼진 부엌, 저 끄트머리에서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푸르스럼한 빛을 받은 언니의 한 쪽빰은 푸르고 또 푸르렀다. 반짝이는 두 눈. 날렵한 콧날. 늘 흐르는것만 같던 검은 머리칼. 그렇구나, 우리 언니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나는 천천히 다가가 언니를 끌어 안았다. 안았다기보단 그 커다란 품에 내가 안긴 것이 옳았겠지만 언니는 나를 안지 않았고, 나는 언니를 안았다. 되도록 꼭 껴안았다.
" ..왔어? "
깔깔한 언니의 음성이 귓전에 와 닿았고 언니는 천천히 일어나 내 정수리 위에 손을 한 번 올리고는 부엌을 나서려했다. 언니의 손에는 가방도 무엇도 들려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게 아니었던 걸까. 언니, 가방은?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교복도 안 벗고 거기서 뭐하고 있었던거야? 저녁은 먹었어?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언니를 올려다보고 부엌을 나서려는 언니의 교복 재킷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면 전부였다. 거짓말처럼, 난 그때의 말과 행동들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기억할 수 있다. 거짓말처럼.
" 놔. "
언니가 말했고, 나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가 살짝 웃었던가, 희미하게 꺼져가는 불씨처럼 그 웃음이 그랬다.
" 지연아. 언니 가야 돼. "
" 가지 말라고 했잖아. "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언니는 내게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 가느다란 두 손으로 재킷을 쥐었던 내 한 쪽손을 소중하게 꼭 거뤄진 채,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 내게 눈을 맞추고 나를 향해 말했다.
"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
" ...... "
" 내가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해로운 인간인 게 보여?"
" ..... "
" 엄마는 그래서 날 떠났을까 ?"
" ....."
" 늘 이해할 수 없었지. 어째서 그 사람은 날 떠났을까. 떠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젠 이해가 되네. "
"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던 거야. 나는.. "
"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
가눌 수 없이 많은 슬픔들이 온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이 아프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아니라고. 언니 말이 틀렸다고 바로 잡아주기엔 난 너무 어렸는걸. 너무도 무섭고 무서운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턱이 덜덜 떨리고 난 너무도 애처롭기만 한데 언니는 내 눈물따윈 닦아주지도 않고 조용히 제 할말만 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엄마는? 우리 엄마는 언니의 엄마가 아니야? 그 엄마가 도대체 누구야? 역시나 아무 말도 못하는 내게 언니는 더 이상의 할 말은 남아있지 않다는 듯 조용히 내 손을 내려놓고 빈 공간을 걸어 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언니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제야 막혀있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엉엉. 어서 빨리 엄마가 퇴근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엉엉. 바래고 또 바랬던 거 같다.
이듬해 봄. 언니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대학엘 갔다. 달라진 건 없었다. 아주 일류대는 아니었지만 언니는 언니가 원하는 과에 진학을 했고 엄마는 흡족해했고 대견해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언니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매번 비슷한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집에서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 들었단 정도? 그즈음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조금 더 늘렸고, ( 언니의 아르바이트는 마를 날이 없었다.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쉴 줄을 몰랐다. ) 집에 들어오면 방으로 들어가 꽤 오랫동안 음악을 듣고는 했다. 그 음악소리는 옆방에 있던 내 귀에까지도 들려올만큼 제법 큰 소리였지만, 나는 그게 싫다거나 시끄럽다거나 거북스럽지 않았다. 가끔은 언니 방문에 귀를 대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을 정도로 그 순간을 즐기기도 했다. 왜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그 때의 언니 방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언니의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밤의 소리. 음악이라곤 가끔씩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돌의 댄스음악밖에는 모르는 내 귀에 그것은 별천지였고 신세계였다.
기억하기를, 그 날밤은 아마도 달이 두개인 날이었을거야. 이상한 날이었어. 한 여름이었는데도 덥지 않았지. 그 날도 엄마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신다며 집에 들어오질 않으셨고, 모처럼 무협지에 열을 올리던 나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잠을 이룰 줄 몰랐다. 그 때 들려 온 음악소리. 언니의 방에서 들리는 소리.
' 아직도 안 자나? '
언니는 자정이 오기 전에 일찍 잠이 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그 날은 음악소리도 달랐다. 늘 팝송이나 가요를 들었던 언니였는데, 그 날은 이상한 바이얼린 소리같은 게 들려오는 거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의 방문앞에 섰는데..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온 건 음악소리만은 아니었다. 언니의 방에서 미세하게 새어나오는 빛. 언니의 두 발. 조금씩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 발은 한 눈에 보기에도 춤을 추는 거 같았다. 그 날, 언니의 방문은 닫혀있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나는 그 틈으로 언니를 보았고 언니가 음악소리에 맞춰 발을 떼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왈츠 같기도 하고, 웅장한 클래식같기도 한.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그 곡에 맞추어 천천히 몸을 움직이던 언니의 몸짓은 단 한 군데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동작은 기이하기도 해서, 양손을 한 쪽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길고 긴 다리가 왔다 갔다.. 양말조차 신지 않은 언니의 맨발은 느리고 고왔다. 그리고 기억하기를, 언니의 양손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수건 같기도 하고, 그냥 천 같기도 한. 희고 기다란 무엇이었는데 언니는 그것을 양 손에 꼭 쥔 채 그것을 가슴가에 대고 마치 함께 춤을 추는 것인양 그렇게 그 곡이 끝날때까지 그 무언가를 놓지 않았다. 곡이 끝나갈 무렵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던 거 같다. 헤에~ 연애하나 보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언니에게 생긴 남자가 누굴까. 어떤 놈이 저 목석을 휘어잡은 거지? 사악한 아우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충만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언니는 사라졌다. 정말 한 톨의 거짓도 없이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언니의 방안엔 무엇도 사라진 게 없었다. 그대로였지만 언니는 없었다. 책상 앞 의자에 걸려있던 언니의 책가방. 다른 공기가 떠다녔다. 직감적으로 알았던 거 같다.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그 날 아침 방문을 열고 아침밥 먹으라며 입을 떼기도 전에 나는 알아버렸던 거다.
' 지연아, 언니 가야 돼. '
어쩌면 꽤 오래도록, 언니를 볼 수 없을거란 걸.
가만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언니가 없는 빈 방을 둘러보았다. 휘이- 크게 고개를 돌려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이것저것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그 때처럼 눈물이 나진 않았다. 뭐, 이젠 나도 다 컸으니까.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언니의 CD들과 전공서적들. 늘 휑할 정도로 비어 있던 책장 속엔 엄마와 내 사진도 놓여 있었다.
' 진짜 못 된게 우리 사진도 안 갖고 갔어. '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 발 밑, 책상가에 놓여 있던 휴지통에 들어있던 그것. 어젯밤에 본 그 하얀 천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몸을 숙여 휴지통에서 그것을 꺼내었다.
그건 수건도 그저 쓸모없는 천도 아니었다. 그건 언니가 고등학교 때 입고 다녔던 언니의 학교 교복이었다. 아마도 하복인가보다. 반팔인걸보니. 근데 이상한 건, 군데군데 찢긴 흔적이 보인다는 거다. 한 번도 빨지 않은 것인양 누렇게 색도 바래있다. 깔끔한 언니가 이렇게 교복을 입었을 리 없는데..그나저나 어젯밤 볼 때는 정말로 하앴었는데, 내가 잘못 본건가보다, 했다. 그리고 무심코 돌려 본 그것에는 조그맣게 명찰도 달려 있었다.
" 정 지 후..?"
언니 이름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판 모르는 이름이었다. 언니네 학교는 졸업할 때 친구랑 교복 바꿔치기라도 하나?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절대로 그 학교엔 그런 전통 같은 거 없다. 게다가 그러기엔 이 교복은 너무 낡았고 너무 처참할 정도로 찢겨 있는 걸. 도대체 뭐야, 싶은 마음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가 문득 어젯밤의 언니가 떠올라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 선 채 멍- 하니 정말 아무 짓도 못하고 그러고만 있었다. 1층에선 엄마가 왜 빨리 안내려오냐고, 늦었다고 마구 소리를 지르시는데 나는 엄마의 그 소리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엄마, 언니가 춤을 추고 있었어. 이 지저분한 걸 너무너무 소중하게 끌어안고.. 엄마..자인 언니 어떡해..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리 언니, 외로웠으면 어떡해..
나는, 휴지통에 버려져 있던 그 교복을 언니인양 꼬옥 끌어안았다. 왜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언니 옆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친구가 있었고, 우리가 있었고, 누구보다 엽이 언니가 언니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순간, 언니가 너무도 외로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교복을 그대로 갖고 나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내 방 벽장속으로 밀어넣었다.
' 돌아와도 주지 않을거야. 언니한텐 미안하지만, 어차피 버린 거니까. 이건 돌려주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잊어. '
나는 무슨 마음이었던지 그 길로 1층으로 내려와 식탁에 앉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언니가 멀리 간 거 같다고. 떠난 것 같다고. 달걀 후라이를 하던 엄마가 무섭게 날 돌아보며 아침부터 뭔 황당한 말이냐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는 한 마디 대꾸도 안하고 차려진 아침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리고 학교에 갔다. 보충 수업도 받고 학원도 갔다. 엄마는 미친 듯이 언니를 찾아대느라 경찰에 신고까지 하고 난리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라고 달랐을까. 내 마음이라고 달랐을까. 나도 언니를 찾아다녔다. 내 영혼은 이미 멀리멀리 언니를 따라다니느라 쉴 틈이 없었다.
" 엄마.. "
쇼파에 앉아 양 손으로 얼굴을 묻고 있던 엄마는 전에 없이 나약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뭐가..잘못된 거니?"
휴가 한 번 제대로 쓴 적 없던 엄마가 회사엘 나가지 않았다. 늘 단정하던 머리칼이 볼품없이 흐트러져 있다. 엄마 탓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언제가 되었든 돌아올 거라는 믿음. 내가 조금 더 어렸던 그 날, 언니는 분명히 나에게 먼저 작별인사를 해주었던 거다. 어젯밤 방문을 닫아놓지 않은 것도, 나와 함께 같은 음악을 들었던 것도, 그리고 그렇게 편지 한 장 없이 사라져버린 것도 언니에겐 최선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라고 말하는 그 아픈 눈을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아니라고 말해줬더라면 좋았을걸.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도 기다릴 수 있을 거 같았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은 왔다. 그리도 어김없이 여름도 찾아왔다. 아주 무더웠던 여름. 매미가 한창이던 시절. 만 3년을 꼬박 채웠던 그 해 여름. 언니의 운동화가 현관앞에 놓여 있었다. 입구에 놓여 있던 커다란 배낭. 쇼파에 벗어둔 언니의 겉옷. 도란 도란 들려오던 부엌의 소리. 달그락거리는 그릇들의 합주. 언니가 돌아왔다.
" 어, 지연아.."
부엌에 선 채 물끄러미 언니를 건너다 보았다. 갑자기 날 보고 놀랬던지 아니면 당연히 봐야 할 얼굴을 보고 반가웠던지 언니는 조금 멋적게 웃고 있었다. 하얬던 얼굴이 조금 가무잡잡해졌고, 곧은 자세는 더 바르게 보였다. 언니가 입은 체크남방은 한 번도 본 적없는 총 천연색이었다. 어디서 저리 촌스러운 걸.. 한심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 못 되 쳐먹어가지고.. "
나는 그렇게 욕을 해대며 언니를 맞았다. 영국에 있었다는 언니는 그 날 이후로도 왜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는 들은 게 있었을까. 모르겠다. 엄마도 내게 말을 않는 거 보면 모르는 거 같기도 하고, 또 그 이유를 두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 나도 보면 다분히 변태같은 녀석인게다. 어쨌든 언니는 돌아왔고 그 날 우리들은 오래도록 느긋한 세 사람을 누렸다.
' 정 지후가 누구야?'
그런 건 묻어둬도 괜찮겠지. 그런거지 ? 눈 앞에서 웃고 있는 저 순박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밥을 먹고 국을 뜨며 쿵쿵대는 심장소리를 달래었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이 힘찬 마음의 소리가 언니에게 닿길 바라며.
@ bgm by Stamatis spanoudakis, Absenes
첫댓글 오랜만입니다^^ 잘 읽고갑니다~~
부다페스트~ 연재가 오랫만이네요. 잘 읽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많이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모르겠습니다. 12편과 13편 사이에 거의 한달이란 틈이 생겼더군요. 많이 죄송하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저는 쓰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이번 편은 제가 무척 즐겁게 쓴 한 편입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말씀해주셔서 힘도 납니다. 나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느리고 담담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과연 독자분들이 그런 저를 참아주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 ^_ 그래도 좀 느긋하게 바라봐주시는 몇몇 분들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아마, 이 취미생활은 오래도록 지속될 듯 싶습니다.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꾸벅.
마크툽님의 취미생활..오래 오래 지속되면 좋겠어요.^ㅡ^
아주 오래동안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아시겠죠~~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잘 봤습니다. ^^
기다려야만 볼 수있는... 여튼 정말 잘봤습니다.
뜬금없지만......사랑합니다.. ^^;; (전 님의 팬이니깐요..)
아..... 동감입니다..^^;;ㅎㅎ(저도 뜬금없지만요..ㅋㅋ)
첫댓글 오랜만입니다^^ 잘 읽고갑니다~~
부다페스트~ 연재가 오랫만이네요. 잘 읽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많이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모르겠습니다. 12편과 13편 사이에 거의 한달이란 틈이 생겼더군요. 많이 죄송하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저는 쓰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이번 편은 제가 무척 즐겁게 쓴 한 편입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말씀해주셔서 힘도 납니다. 나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느리고 담담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과연 독자분들이 그런 저를 참아주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 ^_ 그래도 좀 느긋하게 바라봐주시는 몇몇 분들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아마, 이 취미생활은 오래도록 지속될 듯 싶습니다.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꾸벅.
마크툽님의 취미생활..오래 오래 지속되면 좋겠어요.^ㅡ^
아주 오래동안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죠~~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잘 봤습니다. ^^
기다려야만 볼 수있는... 여튼 정말 잘봤습니다.
뜬금없지만......
사랑합니다.. ^^;; (전 님의 팬이니깐요..)
아..... 동감입니다..^^;;ㅎㅎ
(저도 뜬금없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