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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함반야 공부방 원문보기 글쓴이: 효진
※ 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뱀을 보는 경우가 종조 있다.
뱀이 사람을 보면 더욱 놀라겠지만.. 나 역시 뱀을 보면 더럭 겁과 함께 놀란다.
해서 비록 좁은 길이건만 될수록 그 길 중간을 걸으려 노력한다. 행여 한 편에 쏠려 길섶에 있던 뱀을 못 볼까봐..
중도란 이렇 듯 어느 양 쪽이나 양 편에 쏠리지 않고 중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인가?..
여야로 나뉘어 전쟁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정치판을 보며 여도 야도 아닌 중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게 중도 정치인가?..
그러니 보살행은 이편저편도 아닌 중립 편인 자세로 아니면 아예 정치는 모르쇠 하면서 선행을 하는 것이냐 말이다.
서연 : 엊그제 눈보라 속을 운전하느라 시꺼먹었어요!.. 얼마나 눈폭풍이 심한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꼭 돌아가야만 했기에 할 수없이 차를 몰아야만 했거든요. 길 중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고..
'부처님감사보살님' 을 반복하면서 정말 기다시피 겨우 겨우 사고 없이 집에 오니.. 온 몸의 진이 다 빠진 듯..
그래도 '이래서 중도를 강조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효진 : '부처님감사보살님' 이라.. 그렇죠. 정말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면 하나님이나 부처님 한 분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껴져..
아이구! 부처님예수님!!.. 하고 둘 이상을 찾지요^^..
모든 보살은 관세음보살로 통한다고 했으니.. 감사보살님 역시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 되네요..^^
인도에는 수만의 신이 있다고 하지요.
석가 이전의 힌두교 사회였던 인도에서는 각 지방마다 있던 신을 누가 나서서 정리하지 않고 있었는데..
불교가 인도의 주류가 되면서 힌두교 바라문들이 불교의 승려로 라이선스를 바꾸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이 불교 사원에서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인도 각 지방에 펴져 있는 신의 능력을 정리했고..
그런 신의 능력을 관세음 보살의 파워로 정리했다.
해서 천수천안으로 생명을 보살피는 관세음보살님의 능력을 보면 인도 신들의 능력과 다름이 없다.^^
12세기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힘을 잃으면서
대신 부흥한 힌두교는 그동안 관세음보살 능력으로 정리된 힘을
별 수고 없이 힌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연 : 그러니까 관세음보살님이 곧 힌두 최고 신이네요!^^.
그리고 부처님은 우리가 찾아가 소원을 비는 대상으로, 보살님은 우리를 찾아와 자비를 베푸는 신이 되었군요.
효진 : 이해가 너무 빨라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중도를 지키도록 해요..
서연 : 중도는 균형을 유지하듯 어느 한 편에 쏠리지 않거나 또는 양 편을 모두 포함하는 그런 거 아닌가요?..
효진 :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과거에는 그 세계를 중생 세계라 했는데..
요새 중생, 중생.. 하면 인간을 폄하하는 언어라 하여 고소가 들어올 수 있기에 '이 세계' 또는 '이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접하는 존재가 그대로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펼쳐져 있는 세계입니다.
즉 우리가 보는 그대로 외부에 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나 사실은 그게 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하거나 깨달은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평행 세계를 상상하고..
매트릭스 란 영화를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치고..
게임하듯 고글을 이용한 가상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중도를 알려면
차원이 다르다는 말처럼.. 또는 평행 세계를 보듯이 이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석가모니가 다섯 사문을 찾아와 최초로 설한 내용에
고행이 아니고 쾌락이 아닌 중도를 닦으라[고락중도] 하셨다.
여기서 고락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여.. 초심자를 헷갈리게 하는데..
당시 다섯 사문은 고행을 하고 있었다.
서연 : 왜 그들은 고행을 사서 하고 있었나요?..
효진 : 궁금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말하려다 보면 과거로 들어가야 해요.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어요.
다행히 우리는 시간이 넉넉하니 약간 맛만 보고 가지요.^^.
당시 바라문 계급이 아닌 일반인들은 크게 두 가지 사상에 취우쳐 있었으니..
하나는.. 아트만은 영원하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자는 누구든 수행을 통해 열반[순수한 아트만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영혼불멸 사상과
다른 하나는.. 영원한 아트만은 없고 오직 이번 한 생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다 죽는 게 상책이다..라는 게 단멸론이며 비판하는데.. 실제 단멸론자들은 하고싶은 것을 멋대로 한다는 자보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누리자는 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내가 그로고 싶다고 남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다면 남이 나를 함부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까?..
하여 단멸론자들은 오히려 조용히 다툼을 경계하며 고요히 평화롭게 사는 것을 주장한다.
서연님은 어떤 사상에 가까운 것 같아요?..
서연 : 저는.. 단멸론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몸이 죽는다고 영혼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할머니 할아버지 영혼이 어딘가에서 저를 보고 있을 거라고 봐요. 내가 두 분을 생각하는 한..
효진 : Wow.. 지금 서연님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본인은 그 의미를 알고 있어요!?..
본론으로 돌아와.. 서연님의 견해는 단멸론으로 볼 수 있지요.
서연님의 아트만[나의 실체]이라 할 수 있는 마음(영혼)은 언잰가는 멸하는 것으로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요.
최초 설법 대상인 다섯 사문은 고행을 하고 있는 이유는..
고행만이 아트만에 침입한 고통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 석가모니 수행자 역시 저들과 함께 순수 아트만을 성취하고자 고행을 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돌아와 당신들의 고행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할 때.. 준비된 내용은 무엇일까?..
바로..
사문뿐 아니라 바라문이 믿고 있던 영원한 아트만이 존재한다는 핵심 사상은 물론
그런 아트만은 이번 단 한번의 생에만 있을 뿐이라는 단멸론[유물론, 과학]을 동시에 부정하고 있으니..
무아.. 안 아트만 An-atman, anatta 라 하여..
이 세상 전체를 냅다 흔드는 지진이 일어나듯 진동시키는 엄청난 내용이었던 것이다.
나의 주인인.. 나를 조종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알아채고 있는 이 나를 감히 없다고 하다니!
원 말이 돼야 반박이라도 하지.. 그런데 우리는 저 석가모니를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고 그렇지. 내가 없다는 무아.. 그것은 아니지!!!!!!!!!!!!!!!!!!
그들의 충격을 환히 꿰뚫고 있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언어적 폭력{?)을 다섯 사문이 아직 감당할 수 없음을 자알 알고 있던 석가모니는
중도라는 애매모한 말로 포장해 처음 설하시고..
그들은 그 충격을 간신히 버티는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고 또 설명해 주니..
꺼질 듯 포기할 듯.. 바람 앞에 촛불처럼 겨우 겨우 견디더니..
하나.. 둘.. 깨닫고.. 아라한이 되는 최초의 대 사건이 벌어진 거디다.
초전법륜 사건의 위대함은.. 자신이 깨닫는 것은 그 전에도 간혹 일어나기는 했지만..
남[제자]을 이해시켜 아라한이 되도록한 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연 : 중도가.. 무아가.. 그리 엄청나게 충격적인 핵폭탄이나 수소 열핵 폭탄 같은 건가요?.. 안 그런 것 같은데..
효진 : <금강경> 14분 에 이런 말이 나와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으며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인 줄을 알지니라.
그런데 <금강경>을 본 어떤 자도 놀라거나 겁내거나 두려워한 자가 없다는 겁니다..^^
서연 : 지금..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하려는 거지요?!.
효진 : 무식하다는 표현은 중도적이 표현이 아니지만.. 중용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언사예요.
그러니 "나는 금강경을 보아도 전혀 두렵지 않던데.." 하면서 실망이나 자랑할 필요가 없어요.
차원이 다르기에..
그런데 불교가 인도의 주류 종교가 되어 약 500여 년 지내오다.. 12세기에 이르면 인도에서 거의 사라지고
힌두교가 다시 주류로 돌아온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아를 깨치는 것은 고사하고.. 깨닫거나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워져 다시 아트만[존재] 세계로 환원한 것이다.
정신적이 대중의 이해가 가장 높다는 인도에서도 이 지경이니..
과연 무아를 바르게 이해할 자 세상에 몇 이나 될까..
서연 : 그 말은 한반도나 중국 등은 여전히 불교가 강세인데.. 그럼에도 그들은 무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건가요?..
효진 :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게 거의 이천 년인데.. 그동안 <금강경> 읽다가 심장마비 일으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어요.
그것은 그들은 무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다행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서연 : 지금 우리 선조들을 칭찬하는 건가요? 아니면 비난하는 건가요?..
효진 : (침묵) 하다가.. 칭찬이 아니지만 비난은 더욱 아닙니다.
당신의 주체인 주인은 없으니 무아다 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하면 놀라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자가 있었겠지만..
그것은 은유적으로 당신의 본모습은 부처입니다 또는 보살입니다 하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무아는 아니라서 다행이네.. 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죠.^^.
물론 경 곳곳에 무아가 본모습임을 숨기듯 밝혀 놓았으니..
앞에서 말한 경허스님처럼 무아를 스스로 깨치고 그리 살아간 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무아행을 진실로 이해한 제자나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당시 주변에서는 괴짜로 불렀을 뿐이지만..
그만큼 우리는 아트만[자아] 의식이 강한 민족이기에
일제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6.25 전쟁을 겪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지금 이렇게 세계에서 으쓱하고 있지 않나요?^^.
만일 무아를 듣고 이해하고 깨닫겠다고 달려드는 젊은이들이나..
순수한 예수를.. 돈 밝히는 예수 제자가 아니라.. 닮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이 유행하듯 많았다면..
지금도 경제적 빈국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겁니다.
순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타락이지만..
불교나 기독교 안에서 머니에 탐욕을 부리는 게 자연스러울 만큼..
우리 국민이 탐욕적이기에 이만한 경제적 성장을 일으킨 게 아니냐는 겁니다.
서연 : (...)
효진 : 그렇듯 중도는 이 세계(중생 세계)적 언어가 아닙니다.
고락 세계에서 중도[고락중도]로 향하라는 것은.. 이 탐욕적인 중생 세계에서 벗어난 곳으로 향하라는 겁니다.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게 8정도이죠.
그런데 시중에 나돌고 있는 8정도 설명을 보세요..
모두 이 중생 세계에 합류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설명이 아니던가요?..
중도는 양편에 쏠리지 않는 가운데 길이 아니다. 양 편이든 가운데이든 그런 세계에서 떠나는 길이 중도다.
8정도 첫 번째인 정견이란 이 세계를 떠난.. 무아인 곳을 분명히 보여주는 견해[정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견해 내용은 무얼까?..
12연기법의 환멸문이다.
환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한 유전문 해석이라면 그것 역시 중도의 정견이 된다.
누군가 유전문을 3세를 윤회하는 인류 최상의 법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타락한 정견일 뿐이다.
4성제의 고제와 집제를 사바세계의 고통으로만 설명하여 불교는 세계를 고해로 설명한다고 하면..
그 역시 정견이 아닌 편견일 뿐..
785. 광설팔성도경(廣說八聖道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
어떤 것이 정견(正見)인가?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정견으로 번뇌[漏]가 있고 취함[取]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出世間)의 정견으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정견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만일 그가 보시[施]가 있고 주장[說]이 있음을 보고, 내지
이 세상에 어떤 아라한이 있어 후생(後生)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세간의 정견이요, 세상 사람과 세속의 정견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정견으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괴로움[苦]을 괴로움이라 생각하고, 괴로움의 발생[集]·소멸[滅]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호응하여, 법을 선택하고 분별하여 깨달아 앎을 구하고 지혜로 깨닫고 관찰한다.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정견으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잡.785. 광설8성도경>에는 정견을 둘로 나누어 세간의 정견과 출세간의 정견으로 나누어 놓고 있다.
<초전법륜경>에는 다섯 사문을 향한 최초 설법에서 정견으로 오직 4성제 설명만이 나오듯.. 출세간[사문]에 대한 정견만이 있다.
<잡아함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00여 년이 지난 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출세간은 물론 중생인 세간 세계에서 정견 내용까지 포함한 것으로 본다.
우리처럼 세간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세간 정도[세간 중도]는 참으로 주옥같은 정견이지만..
중도의 본 뜻인 무아에서 보면 편견이 아닐 수 없다.
서연 : 오늘은 여기서 끝났으면 해요.. 너무 복잡해지고 있어요..()..
효진 : (^^)..@..
첫댓글 석존께서 돌아가신 후 석존의 가르침을 이러히 들었다는 식의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오니..
불경결집을 하게 되지요. 그 당시는 문자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존하는 구전인 결집이라 합니다.
그렇게 4, 5백년이 흐른 후 여기저기서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나오니 문자 기록으로 수집정리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남방에 전해오는 <니까야>이고, 다른 하나가 북방에 전해진 <아함경> 입니다.
남방의 <니까야>와 북방의 <아함경>은 다른 상좌부 부파에서 전해지고 있던 불경입니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어느 게 더 오리지날 적인가?.. 하는 따짐은 독화살에 맞은 자가 화살은 놔둔채 딴 짓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20 여개 부파가 있었다고 하는 데..
<쌍윳따니까야>와 <잡아함경>에는 근본을 전하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자는 실유 입장에서 기술되어진 반면에..
후자는 실유 중심이지만 드물게 공 입장을 포함해 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승불교는 공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대승불교를 전한 우리는 니까야 보다는 아함경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겁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귀한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설빔 잘 보내시고..
매일이 좋은날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