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새해가 열림과 동시에 국세청은 국세행정지표를 완전 교체한다. 전임 청장(이낙선)이 제정했던 세정지표가 맘에 안들었던 것이다. '세수증대' '오명불식' '국민계몽' 이란 용어가 국세청을 마치 마치 '오명집단'으로 국민에게 인식 시킬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오정근 국세청장은 '밝은 세정' '올바른 부과' '참다운 봉사' '기꺼운 납세'를 새 국세행정지표로 내 걸었다. 용어부터 칙칙함을 피하고 전임청장 지표에 비해 뭔가 희망의 기운을 담아내려 했다.
| 1972년 6월 오정근 국세청장(중앙)이 국세청 출입기자단과 정례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 기자간담회에서 오정근 국세청장은 "국세청이 이제 납세자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지 않느냐?'면서 그가 제정한 국세행정지표의 '참다운 봉사'에 대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 발언을 두고 일각에서는 자신의 퇴임을 예견한 발언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 오 청장은 이 회견이 있은 지 9개월 후인 1973년 3월 퇴임한다. (사진 上) 당시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 진 캐딜락 세단. 1972년 4월 오정근 국세청장을 태우고 온 승용차가 영등포세무서 앞에 서 있다. (사진 下) <세정신문DB> |
|
|
아무리 국세청장이지만 전임청장이 애주중지하며 아껴쓰던 '지표'를 하루아침에 갈아 치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것도 전임 청장이 대통령의 지극한 신임 속에 '상공부장관'으로 영전 입각 해 풀끼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권력'도 오정근 청장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오정근 청장 특유의 뚝심에다 '해병대 기질'과 함께 5.16 혁명 주체세력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과 권력 다툼이 만들어 낸 하나의 부산물이라는 증언이 있다.
오정근 청장은 국세행정이 어떻게 하면 국민 속으로 더 파고 들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한다. 고민 끝에 '밝은 신문'이라는 세정홍보용 주간신문을 창간한다. 잘할 려고 애를 쓰고 있는 데도 언론이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고, 툭하면 잘못 된 부분만 꼬집어 대는 것을 보다 못해 아예 신문을 만들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또 납세계몽을 선도한다는 취지로 '전국 남녀중고등학교 납세웅변대회'를 신설한다. '세정직소(直訴)센터'를 설치, 납세자가 세금불만이 있을 때 하소연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한다. 눈을 부릅뜬 정부과세권에 밀려 납세자 목소리는 매우 왜소했던 상황에서 '직소센터'는 납세자 뿐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세청의 대민납세홍보에 대해 1972년 1월 재무부 연두순시에서 '세금때문에 어렵다는 불만은 좀 줄어들었나요?'라는 말로 국세청의 대 국민납세홍보를 격려 했다.
그러나 오정근 국세청장은 부임 3년 4개원여 만인 1973년 3월 국세청장직에서 물러난다. 영전으로 물러 난 게 아니어서 퇴임에 따른 억측도 있었지만 훗 날 국회의원(여당 비례대표)을 역임한다.
'오정근 청장의 지인들이 하도 많아 세무서가 세무조사할 기업이 없을 정도였다'는 말과 함께, 왕성한 활동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그 연유를 묻자 '해병대 출신은 (혁명동지 중)저 한사람 밖에 안남았습니다. 동지들을 살펴야 할 일이 많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오정근 청장 재임시기의 국세청은 거의 불보지나 다름 없었던 '납세자 권익' 부분을 체계화한 전환점이었다.
1973년 3월 9일 고재일 전매청장이 제3대 국세청장으로 부임한다. <계속>
<서채규 주간>
첫댓글 이런!!
장군님이 얼마나 분통해 하실까요?
하루빨리 비석에서 해군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