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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4 color=black><b>누가 영자에게 돌을 던지랴</b></font><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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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 color="#a00000"> 뚱뚱한 여자로서 겪어왔을 냉혹한 경험, 그리고 다이어트 이벤트 뒤에 숨은 가부장제와 자본</font>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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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1/06/13/02101500012001061360-1.jpg" 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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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1 color="#444444"></font><br>
이영자가 울고 있었다. 지방흡입 수술을 받았음을 시인하는 기자회견을 보도하는 신문기사 한가운데 실린 사진 속에서, 늘상 넉살좋고 당당하고 푸짐한 웃음으로 만나왔던 그녀가 고개를 떨군 채 고통스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복잡하고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슴이 아팠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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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살빼기의 기만극’ 규정은 옳은가</b>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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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우는 것일까? 혹은 왜 울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눈물로써 이번 사건은 대부분 언론?시각인 ‘살빼기의 기만극’으로 규정된 채 막이 내려도 되는 것인가? <p>
이번 사건은 결코 이영자 개인의 도덕문제로 국한될 수 없다. 이영자 다이어트는 애초부터 그녀 개인의 살빼기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p>
<p><img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1/06/13/02101500012001061360-2.jpg" align=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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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1 color="#444444">사진/ 이영자. 그는 왜 울어야 하는 것일까. 이번 사건은 결코 이영자 개인의 도덕문제로 국한될 수 없다.(이정용 기자)<p></font><br>
이영자 다이어트 이벤트의 배후에는 우리 사회의 중층적인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여성의 몸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가부장제 구조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몸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자본의 작동구조다. 이 두 구조는 서로 긴밀히 얽힌 채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여성의 몸을 만들어내고 있다. <p>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소유물이거나 성상품으로 취급된다. 순결이나 정조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성적 자결권이 통제되고, 아름다움이나 섹시함이라는 명목으로 여성의 몸은 주어진 기준에 맞게 훈육된다. 바로 푸코가 말하는 신체의 정치학이다. <p>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아름다운 외모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쏟는다. 그래야 인정받고 보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척받지 않고 인정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 고통스런 전족도 스스로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권력의 메커니즘이다. <p>
이런 상황에서 자본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여성의 몸을 표적으로 삼아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본은 아름다움에 ‘목숨을 건’ 여성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한편 거꾸로 그 욕망을 최대한 증식시키면서 가부장제와 공모관계를 유지해왔다. 화장, 미용, 패션, 성형수술, 다이어트, 체형관리 등 여성의 몸을 장식·가공·변형·억압하는 각종 산업들은 이른바 여성의 ‘아름다움’을 내세워 폭발적으로 규모를 불려가는 중이다. <p>
이같은 현상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미인대회라고 할 수 있다. 미인대회에서 제시되는 ‘미인’은 바로 아름다움의 기준이 된다. 이때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기준은 여성 몸의 현실과 거리가 있을수록 좋다. 그만큼 시장이 넓어지고 고객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미스코리아대회 출전자들이 갈수록 평균적 한국 여성의 체형에서 벗어나 말라깽이 서양 여성의 체형을 닮아가는 현실은 바로 그만큼 미와 관련된 시장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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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이영자, 그리고 오현경과 백지영</b>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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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얼굴을 작게 하거나 키를 크게 하기 위해 수술을 받는다거나 지방을 흡입해 살을 뺀다는 것은 잘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p>
여성이 무엇보다 외모로 평가되고 가부장제와 자본이 갈수록 ‘늘씬한 몸매, 예쁜 얼굴’에 대한 압력을 높여가는 현실에서 이영자같이 뚱뚱한 여자가 설 곳은 거의 없다.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 무대 같은 곳 외에는. 이영자가 코미디언 혹은 개그우먼이 된 데는 분명 그 뚱뚱한 몸이 한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성공을 거두게 된 데도 그 푸짐하고 거칠 것 없는 넉살에 어울리는 넉넉한 몸매가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녀의 뚱뚱한 몸은 개그우먼으로서 그녀의 자산이었다. <p>
그런데도 그녀는 살을 빼야만 했다. 직업적 성공과 돈도 보상해줄 수 없었던 ‘여자’로서의 좌절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은 사회적 규범에 의해 길들여진 ‘유순한 몸’이 아니라 규범에서 일탈한 ‘저항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여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거세의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인간’의 자리는 없고 ‘여성’과 ‘남성’의 대립적 자리만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 형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p>
결국 그녀는 하던 일까지 접고 살빼기전쟁에 돌입했다. 아니, 어쩌면 자본이 먼저 그녀를 이용한 이벤트를 기획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이어트 돌입과 성공, 그 이후의 요란한 홍보와 다이어트 비디오 제작 판매 등 그간의 경과를 보면 자본의 치밀한 계산과 전략이 분명히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영자가 위험하다는 지방흡입술까지 받아가며 살을 빼고 그것을 돈벌이에 이용한 배후에 가부장제와 자본이 버티고 서 있다면 이번 사건의 잘못을 이영자 개인에게만 돌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p>
이영자가 지방흡입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한 것이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쉽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뚱뚱한 여자로서 그녀가 겪어왔을 냉혹한 경험에 마음이 가고, 어쩐지 그녀에게서 피해자의 모습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p>
<p><img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1/06/13/02101500012001061361-a.jpg" 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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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1 color="#444444">사진/ 섹스비디오 파문을 겪었던 백지영과 오현경(왼쪽부터)처럼 이영자도 여성의 몸이 남성들에 의해 소유·통제되는 우리 사회의 피해자다.<p></font><br>
그녀가 울고 있는 사진을 보니 문득 기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군 다른 여성 연예인들이 떠오른다. 섹스 비디오 파문을 일으켰던 오현경과 백지영. 따지고보면 이들이나 이영자나 모두 자신의 ‘몸’ 때문에 그런 곤경을 겪어야 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셋은 여성이 자기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남성에 의해 소유 통제 규정되는 우리 사회의 같은 피해자들인지도 모른다. 이영자가 지방흡?사실을 시인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법정 공방이 남아 있지만 사건의 본질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p>
문제는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사건을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구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영자의 지방흡입수술 사실이 알려진 뒤 그 수술에 대한 문의가 성형외과에 쇄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를 증명한다. 살을 뺄 수만 있다면 건강문제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게 요즘 다이어트 광풍의 현실이다. 사회적 차원의 적절한 대책이 진지하게 모색되지 않는다면 다이어트 광풍은 누그러들지 않을 것이고 자본은 더욱 마른 몸매, 더욱 비현실적인 얼굴을 가진 ‘미인’들을 내세우며 시장을 확장해나갈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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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지나치게 마른 여자와 여성의 정치세력화</b>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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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학적 분석이 아니라 정치적 분석이다. 도대체 왜 대중매체들은 점점 더 마른 여자들을 미인이라고 규정하며 다이어트 광풍을 만들어내고 부채질을 하는 것일까? 이같은 현실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경우 25년 전만 해도 모델들의 체중은 보통 여성보다 8% 정도 적었으나 요즘에는 무려 20% 정도나 적다고 한다. <p>
미국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치료사인 수지 오바흐(Susie Orbach)는 이미 1979년 <안티 다이어트 교본>을 펴내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 다이어트 현상을 경고했다. 다이어트 강박증에 걸렸던 다이애나빈의 치료를 맡기도 했던 그녀는 이 책에서 “지나치게 마른 미인상의 등장 시기는 여성운동의 세력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미스아메리카대회가 시작된 1920년이 바로 미국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해임을 상기시키는 주장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운동가인 알리스 슈바르처는 “남자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넓혀가는데 여자들은 자기몸을 빼빼 말리고 있다”고 한탄했다. <p>
이렇게 본다면 수십년간 가속해온 다이어트 광풍의 정치적 성격이 대충 드러난다. 다이어트 광풍은 여성운동의 성장과 함께 사회·경제적 독립을 성취하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던져진 신종 덫이라고 할 수 있다. 교묘하고 음흉한. 독립적이고 당당했던 이영자도 그 덫에 걸려 고통스러워했고 이미 오래 전부터 혼자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이영자. 아무리 노력해도 ‘미인’이 되지 못해 징징거리는 수많은 보통 여자들. 피해자이면서도 속죄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오현경과 백지영. 한국 여자들의 이 황당한 울음소리는 언제나 잦아들 것인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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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명숙/ <이프> 편집위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