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동욱 목사 칼럼] 기도의 열쇠
크리스천투데이| 2021.10.25. 18:31
윌리엄 부스의 이야기다. 그는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는 그가 병약하여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목사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셔서 84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노년에 그 당시 왕 에드워드 7세가 그를 버킹엄궁으로 초대했다. 방명록에 남기고 싶은 말을 쓰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하지만 저의 야망은 오직 한 가지 사람들의 영혼 구원입니다.”
그는 평생을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열쇠가 있는데, 첫째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지속적인 기도”다.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한나의 기도처럼 내 모든 열정과 기운을 소모한다는 의미요, 부스에 의하면 생사가 달린 것처럼 죽기살기로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기도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처럼 응답을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기도 제목에 대한 부담을 거두어 가실 때까지 간절히 지속적인 기도를 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열쇠다.
설동욱 목사(예정교회 담임, 교회와경찰중앙협의회 대표회장).
말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3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누가복음 18:78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36
기도에 관한 명언들
1.내가 일하면 내가 일하는 것이지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패트릭 존스튼)
2.기도는 시간 중의 시간이다.
모든 시간 중의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다른 모든 시간을 의미있게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Leuenderger 교수)
3.기도는 세계를 움직이는 손을 움직이게 한다. 왓슨 (G.D wat son)
4.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 보다 더 멀리본다.(토플레디)
5.주여 나를 변화 시켜 주시고, 나를 통하여 이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변화시켜 주소서.(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의 기도)
6.오늘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처음 3시간은 기도로 보내리라.(마틴루터)
7.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기도 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난다. (마틴루터)
8.많은 기도들이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빨리 포기하기 때문이다. (조이 도우슨)
9.시작이 반이다. 그러나 기도없이 시작된 일은 결코 좋은 시작일 수 없다.(팬스하우)
10.현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신학자는 많으나 무릎을 꿇는 자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Billington)
11.성경은 우리가 항상 설교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항상 기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라이스)
12.내게 기도의 응답은 단지 신앙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실험이다.(스펄전)
13.기도는 낮에는 열쇠, 밤에는 자물쇠가 되야한다.(T 폴더)
14.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허드슨 테일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영국의 종교인, 구세군 창설자. 대표저서 〈칠흑 속의 영국, 그리고 탈출구〉를 통해 빈곤을 낳는 악습을 없애기 위한 10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나 전당포에서 일했으나, 15세에 종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설교사가 되었다. 1852년 개혁 감리회의 설교사가 되어 전도 활동을 했으나, 9년 뒤 사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864년 런던 빈민가로 가 구세군의 전신인 ‘그리스도교 선교회’를 세웠다. 구세군은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으로 빈민구제를 목표로 한 사회사업과 전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
그리스도교의 교파이자 자선단체인 구세군의 창설자·대장(1878~1912).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전당포에서 견습생활을 했다. 15세 때 종교적 회심을 체험하고 부흥설교사가 되었다. 1849년 런던으로 간 윌리엄 부스는 전당포 일을 혐오하면서도 집으로 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런던의 월워스에 있는 전당포에서 일했다. 이무렵 평생의 반려자가 된 캐서린 멈퍼드를 만났다. 1852년 개혁 감리회의 정식 설교자가 되었고, 1855년 캐서린 멈퍼드와 결혼했다. 9년간 전도활동을 한 뒤 개혁감리회와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부흥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부스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다는 단순한 신앙을 강조했다. 버림받은 자에 대해서는 깊은 연민을, 더러움·추함·고통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가졌다. 1864년 런던으로 가 천막과 야외에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화이트채플에 '그리스도교 선교회'라는 단체를 세웠다. 1878년 구세군으로 바뀐 이 단체는 모든 회심자로 하여금 공생활 및 사생활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게 했다. 부스는 영국 군대의 계급과 규율을 모방하여 구세군의 성직체계와 규율을 만들었다.
구세군의 초기운동은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해골군대가 조직되었고, 수년 동안 윌리엄 부스의 추종자들은 평화의 교란자로 몰려 벌금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889년 이후에는 이런 혼란들이 거의 사라졌다. 구세군의 활동범위는 1880년에는 미국, 188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그후에는 유럽 대륙과 인도, 실론, 그밖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부스는 실로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조직가·웅변가였다.
1890년 〈칠흑 속의 영국, 그리고 탈출구 In Darkest England, and the Way Out〉를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윌리엄 부스는 윌리엄 토머스 스테드를 지지했다. 부스는 다음과 같이 빈곤과 악습을 철폐하기 위한 10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① 시 실업자 구제기관, ② 농촌 실업자 구제기관, ③ 해외 실업자 구제기관, ④ 가정 구조대원, ⑤ 매춘부들을 위한 구제의 집, ⑥ 술주정뱅이 구제, ⑦ 교도소 방문대원, ⑧ 빈민은행, ⑨ 빈민들을 위한 변호사, ⑩ 해안가에 화이트채플 건립 등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이 구세군에 기부금을 내 이 계획의 대부분이 실현되었다.
윌리엄 부스의 활동은 처음 몇 년 동안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지만 19세기말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의 천재성과 그가 행한 일의 결과를 충분히 인식하게 되면서 폭넓은 공감을 얻었고, 구세군 운동도 더욱 확산되었다. 부스가 이룩한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적극적인 격려였다. 1902년 부스는 에드워드의 초청으로 그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1905년에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도시의 시장과 단체장의 영접을 받았다. 미국과 다른 나라 정부에서도 부스의 활동을 진심으로 격려해주었다. 부스는 노인이 되어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해 영국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구세군창립자 윌리엄 부스
https://youtu.be/-imlLJTWg9g
구세군을 이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구세군 원당교회 100주년 기념영상)
https://youtu.be/aOZtvtQNc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