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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재활(再活), 삶의 의미
( 一 )
당기룡은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고 회의청으로 들어서는 사
람들을 침중한 표정으로 지켜 보았다. 간혹가다 가벼운 목례를
보내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천년 화강암처럼 움직이지 않
았다.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로 들릴 만큼 고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앉아 있던 당기룡이 한참 만에야
몸을 움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형산(衡山) 독접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소. 그리고 십칠
력이 몰살당했소."
극히 낮은 저음 그러나 중인들은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제십칠력 그들이 누구인가? 단 여덟 명이지만 웬만한 중소문파
한개쯤은 하루 아침에 말살할 수 있다는 사천 당문의 자랑이
아니던가.
그들이 몰살당하다니 생사대전(生死大戰)도 아니고 겨우 독접
몇 마리 채집하는 도중에...
전위대주(前衛隊主) 암안독살(暗眼毒殺) 당천우(唐天宇)는 사
전에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두눈을 내리깐 채 깊은 침묵을 지
켰다.
비로소 중인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문주, 그들이 어떻게 몰살 당했는지 경위를 말씀해 주시겠
소?"
경악이 채 가라앉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뗀 사람은 제일실(第
一室) 만채실(萬採室)의 실장(室長)인 만초신의(萬草神醫) 당
중화(唐仲和)였다.
만채실은 천하에 산재한 독초,독충,기약영초(奇藥靈草)를 채집
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그러기에 형산에 나타난 독접 또한 간
과할 수 없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독성을 가진 나방의 출
현, 막연히 절정고수가 아니면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사실 전위대원을 파견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십칠력이 몰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의 눈길은 유명원주(幽冥院主)인 염라독객 당치대에게 돌려
졌다. 당영지를 잃은 당치대는 무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자식 잃은 고통이 은연중 풍겨 나왔다.
한참 덜 떨어진 자식도 잃으면 애달픈 법인데 하물며 당영지는
당문 차기 문주로 촉망받던 뛰어난 걸물이었으니...
"형산(衡山) 무애곡(無崖谷)은 혈반사접으로 인해 접근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자세한 내막은 알수 없소. 하지만 십칠력이
투입된 지 열흘이 지났다면..."
중인들은 낯빛을 굳히고 말을 잊었다.
독과 더불어 살아 온 사람들, 어디 독물 채집이 한두 번이던가
독지(毒地)에 들어가 열흘 동안 나오지 못했다면 필사(必死)라
단정 짓는 것이 관례였다.
"당영지..아들놈은 떠나기 전에 탈혼망을 챙겼소. 그런데도 당
했다면...예사 독접이 아니오."
염라독객 당치대가 눈을 내리깐 채 담담한 음성을 흘렸다. 애
써 무심하려는 모습이 오히려 가슴을 저몄다. 하지만 중인들은
그런 감상에 젖을 틈이 없었다.
"탈혼망! 탈혼망까지..."
제삼실(第三室) 암기실장(暗器室長) 천수나천(千手拿天) 당두
감(唐豆鑑)은 너무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문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전위대 그 중에서도 역주 이상만
이 소지하는 병기 탈혼망. 방원 다섯 척을 휘감는 탈혼망이라
면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당
했단 말인가!
탈혼망이 실전에 사용된 예(例)는 단 두번 있었다.
고주(高州) 전투(戰鬪).
십 년 전 당시 신흥문파 오도문(五刀門)은 환(幻) 과 법(法)을
배제한 실전 도법으로 귀주성(貴州省) 북부 지역에서 파죽지세
(破竹之勢)의 기세를 떨쳤다.
문도수가 육백 명에 이르자 사천 남부지역을 건드리게 되었고
마침내 고주에서 당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당문은 오도문을
가볍게 생각하여 전위대 중 제일 오,구,십이력 삼십이 명만 출
동시킨 상태였다.
총력주(總力主)는 제일력주(第一力主)였던 당태광(唐泰光).
미시(未時)가 지날 무렵부터 쌍방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도문도 육백 명은 바람을 등지고 화공(火功)을 펼치며 다가
왔다.
입고있는 갑옷은 당문을 상대하기 위해 쇠로 특별 제작한 것이
었다.
독술과 암기술이 큰 위력을 떨치지 못했다.
오도문이 지척에 이르렀을때 당태광이 한 점 흔들림없는 목소
리로 소리쳤다.
"전위대! 돌격하라!"
삼십이 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뛰쳐 나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격은 전율스러웠다. 무엇보다 역주
네 명이 펼친 탈혼망은 맹위를 떨쳤다.
일격에 서너 명씩 꼬박꼬박 죽어 갔다. 은망에 찢겨 죽는 모습
이 너무 잔인해 탈혼망과 부딪치려는 오도문도는 아무도 없었
다.
하지만 보검(寶劍)도 이가 빠지면 폐검(廢劍)이 되는가 반나절
이 지날무렵 영원히 찢겨질 것 같지 않던 은사가 찢어지고 묵
빛 죽통이 잘렸다. 그리고 한 명씩 죽었다.
당태광은 목젖을 가른 열여섯 번째의 도흔(刀痕)과 함께 삶을
버렸다. 삼십이 명 중 마지막으로 생을 다감한 사람이었다.
살아남은 오도문도는 단지 오십육명뿐.
그 후 오도문은 급속히 쇄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당문 전위대
와 싸운 출혈이 너무 컸던 탓이다. 신망(信望)도 문제였다.
실전 도법의 한계를 깨달은 문도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오도문이 멸문하기 까지는 그 후로도 일 년이 더 걸렸지만 사
실상 당태광의 죽음과 동시에 멸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위대의 투혼과 더불어 탈혼망의 위력을 중원 천하에 알린 계
기였다.
홍원(紅原) 전투(戰鬪).
오 년 전 전위대 제팔력(第八力)은 사천 북부 지역에서 무자비
한 살육을 일삼던 혈신삼악(血神三惡)을 제거하고돌아오던 길
이었다.
사천성(四川省) 아미파(峨嵋派)의 장로인 나봉암주(羅峯庵主)
무극법사(無極法師)를 홍원에서 만난 것은 양쪽 다 불운이었
다.
평소 당문을 이류 문파로 간주하던 나봉암주와 패기로 똘똘뭉
친 제팔력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고 결국 육장(肉掌)을 부딪치
고 말았다.
하지만 진신 무공으로 아미파 장로인 나봉암주를 상대할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제팔력주 당도백(唐桃白)은 옆구리에 일검을
맞으며 산화성(酸化性)이 강한 염마산을 뿌렸고 방심한 무극법
사는 두 눈이 타 버렸다.
하지만 홍원에는 무극법사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미파고수 칠십육명이 곤륜파(崑崙派)를 찾아가던 길.
제팔력은 조그만 움막을 방어막으로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불운은 계속됐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덮었다. 거리를 격한 상태에서 바람이 없다면 독술은 아무 쓸
모도 없는 것, 더욱이 이류문파에게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아미문도들의 공격은 매섭기 이를 데 없었다.
한명 한명...명(命)을 달리했다.
제팔력주 당도백만이 남았을 때 아미장로 금청법사(金淸法師)
는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당도백은 씁쓸히 고개를 내저었
다.
"당문 전위대는 마지막 한명이 죽을때까지 싸운다. 제팔력주인
내가 전위대의 불문율을 깰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을 마친 당도백은 금청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모한..."
금청법사의 말은 하늘을 가린 거대한 은빛 망에 가려졌다.
결과는 처참했다. 금청법사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짓이겨졌
다. 하지만 당도백 역시 아미문도의 검날에 꼬치가 되었다.
사건은 당문주가 공식 사과를 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구파일방의 일 석을 차지
하고 있는 아미파라 할지라도 독 오른 살무사 당문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당문 역시 아미파와의 정면 승부는 무모한
일이었다.
문파 간의 다툼이 있었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당문주의 가벼
운 사과 그리고 화해주(和解酒)...그것으로 끝이었다.
홍원 전투는 중원 전체에 한가지 교훈을 안겨 주었다.
칠십육 명 대 팔 명의 싸움, 금청법사와 무극법사 대 당도백의
결전.
비록 제팔력이 몰살했지만 당문과 전위대의 위명이 하늘을 찌
른 쾌거였다.
당문은 강하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경계하고 분투하라.
만인의 눈총을 받는다는 일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탈혼망을 사용한 세 번째 예(例), 이번에는 그 어떤 영광도 없
었다.
천수나천 당두감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탈혼망은 그가
만들어 낸 걸작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탈혼망을 사용하고도 독접이 존재한다면 당문 칠병에 대한 긍
지를 버려야 한다. 독접이 아니라 무림인과 부딪쳤다면?
당문은 다시 이류문파로 전락하고 말았으리라.
그뿐 아니라 사천 당문보다 뛰어난 독을 만들 수 있는 독문(毒
門)이 존재한다면...만약 존재한다면 그날부터 사천 당문은 봉
문(封門)의 치욕을 감수해야 한다.
중인들 심사 역시 천수나천과 같았다.
십칠력의 죽음은 가볍게 느껴졌다. 당문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
을 수 있는 절독의 출현이었다.
좌중이 침울해지자 당기룡이 입을 열었다.
"살인 독접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오. 혈반사접의 독성을 알
아 낸다면 쉬운 일이겠지. 진독(眞毒)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
만 견본(見本)을 구했으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이오."
"문주. 견본이라면...?"
만초신의 당중화였다. 십칠력이 몰살했는데 어떻게 견본을 구
했을까? 의문이 잔뜩 깃든 눈빛이었다.
"곡구에 있는 나뭇잎을 주워 왔소. 독접분이 묻어 있어 누렇게
말라 죽은 나뭇잎...독제실(毒製室)에서 채집했는데...다섯 명
이 죽었소."
"네에..."
당중화는 약간 떨떠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채집에 관한 일이
라면 만채실 소관인데...월권당했다는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어지는 당기룡의 말에 오간데 없이 사라
졌다. 너무놀라운 말이기에...
"정작 문제는...만약 독접이 인위적으로 키워졌다면...? 의견
을 말씀해 보시오!"
"으...흠!"
누가 발한지 모를 침음성이 가늘게 터져 나왔다.
자연 현상으로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살인 독접. 독접 역시
자연의 일부인 이상 먹지 않고는 살수없다.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을 깬다면 그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반사접은 모든 생물체를 말살 시킨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변종(變種)시키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 하지만 어떻게 변종시켰을까? 십칠력이 형산을 청소하고
독접을 수집해 왔다면 모든 의문이 풀어졌을 텐데...
"문주, 있을 수...없는 일이오."
제이실(第二室) 독제실장(毒製室長) 무독천살(無毒千殺) 당운
담(唐雲淡)이 떨리는 음성을 흘려 냈다. 그러나 그 말은 어린
에 손짓보다도 가벼운 저항에 불과했다.
"휴우! 세상에는 예상밖의 일이 얼마든지 있는 법이오. 분명
이번 독접은 사람이 만들어 냈을 것이오."
당기룡은 미간에 내 천(川)자를 그렸다.
"좌우간 세밀히 조사해 보면 알수 있겠지. 하지만 현재 단서가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나마 단서라면 형산 무애곡을
사지로 만든 독접뿐...혈반사접을 만든 독문이 있다면...어떻
게 추적하느냐? 이것이 여러분을 소집한 목적이오."
당기룡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거대한 체구에 돌덩이처럼 단단
해 보이는 중년인이 눈을 이글거리며 말을 받았다.
"우리 후위대(後衛隊)는 맡은 임무상 추적술(追跡術)에 용이한
자가 많습니다. 이번 일은 후위대에 맡겨 주십시오."
후위대주(後衛隊主) 당잠청(唐暫淸)은 뚫어질 듯이 당기룡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후위대주 숙고해서 말하시오. 단서는 아무것도 없소. 그래도
가능 하겠소? 당문의 존폐가 걸린 일이오."
"자신 있습니다."
당잠청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세상만사 모든 이치를 한 눈
에 꿰 뚫어 볼것 같은 당기룡의 맑은 눈빛을 대하고도...
사천 당문에서 가장 빛을 보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후위
대였다. 평시에는 경계를 맡았고 유사시에는 전위대와 중위대
의 보급품을 책임졌다.
이백사 명이 불철주야 노고를 아끼지 않고 뛰었지만 합당한 대
접을 받지 못한 채 항시 논공(論功)에서 제외되었다. 당잠청은
그 점이 불만이었으나 내색하지 못하던 차, 이번 일을 기화로
위치 격상을 도모하고 싶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당기룡은 후위대가 가진 불만을 알았다. 그리고 당잠청의 심정
도 이해했다. 그러나 그런 점 때문에 후위대에 일을 맡기려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추적술이라면 역시 후위대였다. 오랜
세월 경계와 암행(暗行)을 하면서 그들만의 기술과 정보를 축
적했으니까.
"후위대 누구에게 일을 맡길 생각이오?"
독제실장 무독천살 당운담이 당잠청을 쳐다보며 조심스런 음성
으로 물었다.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독화(毒花)에게 맡길 참입니다."
"독화!"
"오! 한연지(韓蓮池)!"
중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씨에게 귀속된 일곱 가문 중 하나인 한가(韓家)의 제일 두뇌
로 당잠청이 오른팔처럼 신뢰하는 여자 무음무영(無音無影)이
란 명호처럼 들고남을 종잡을 수 없는 당문 제일의 추적자.
독심(毒心)에는 한 올의 인정도 없어 살수(殺手)를 전개하는데
추호도 망설이지 않는 독화.
또하나 한연지는 비록 독화이지만 당문 제일의 꽃이었다.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이 연모의 뜻을 비줬지만 그녀는 검으로 대답
했다.
차디찬 설지(雪地)에 핀 독화, 빙지설화(氷地雪花) 무음무영
한연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후위대에 머물 수밖에 없는 비운(悲運). 그녀는 당가
(唐家)에 귀속된 귀속칠가(歸屬七家)의 사람이었다.
사천에서 의술로 혹은 독술로 당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일곱
가문.
백년 전, 당문은 일곱 가문을 합병(合倂)하는 데 성공했다. 한
가(韓家), 만가(萬家), 풍가(風家), 사가(査家) 네 가문은 설
득으로, 단가(段家), 엄가(嚴家), 부가(扶家) 세 가문은 무력
을 동원해서 당문은 그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었다.
소질을 보인 분야에서 일을 할수 있도록 해주었고 능력이 있다
면 승진(昇進)도 시켜 주었다. 백년이 지난 지금 귀속칠가의
사람으로 전갈이 새겨진 당문무복을 입은 사람은 모두 이백여
명, 당문의 절반을 차지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당문(當門) 비기(秘技)만은 전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육실(六室), 삼대(三隊), 일원(一院)의 주인은 항시 당(唐)씨
문중에서 차지했다. 타지(他地)로 떠나는 것 또한 용납되지 않
았다. 실제로 당문을 벗어난 사람은 많았지만 사천성을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힘들고, 어렵고, 지저분한 일 그것이 귀속 칠가가 맡은 몫이었
다.
"그녀라면 어떤 단서를 찾아낼 게요. 단지 한 가지 흠이라면
독을 너무 모른다는 것인데..."
무독천살 당운담은 말끝을 일부러 흐렸다.
"끄응!"
당잠청도 할말이 없어 맥빠진 헛바람만 토해 냈다. 사실 독접
을 상대하면서 독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웃을 일이었다.
"우리 독제실에 능히 만독(萬毒)을 구분하고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소. 당철휘(唐鐵輝), 비록 내 아들놈이기는 하지만
독에 관한 한 따를 자가 없을 지경이오. 한연지와 동행시키는
게 어떻겠소?"
이런 말을하는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당문주 당기룡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차기 문주로 물망에 오른 사람은 모두 네 명, 당연히 그들 간
의 암투는 격심했지만 당철휘의 상대가 될 만한 적수는 한 명
뿐이었다. 당영지 그런데 그가 이번에 죽고 말았다.
사실 당영지가 일선(一線)에서 목숨 걸고 싸워 왔다면, 당철휘
는 안에만 틀어 박힌 서생이나 진배없었다. 실전 경험이 없다
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 이번 기회에 실전 경험도 쌓아주면서
위치도 공고히 해주고 싶었다.
남은 경쟁자 두명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을 당영지나
당철휘에 비한다면 까마귀와 백로를 비교하는 격이니까.
"으음!"
중인들은 침음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당운담의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
다. 이자리에 모인 당문십절을 제외하면 당철휘의 독술이 가장
지고 하니까.
당문 십절이 직접 추적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애로가 있었
다. 우선 내부적인 문제로 당문을 벗어나려는 귀속칠가의 움직
임이 두드러졌다. 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지만 신경 쓸 정
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요 근래 드러나는 움직임은 심상(尋常)한 것이 아니었
다. 힘으로 억누르려 한다면 대혈란(大血亂)이 일어날 정도였
다. 외부의 지원이 없다면 감히 생각 못 할 일이었다.
더욱이 당문의 중추 요인들은 귀속칠가를 부추기는 곳이 어디
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귀속칠가 가주의 동태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할 상황. 당문십절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설혹 반기를 드는 무모한 사람들이 있더라도 문주는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고도 남을 계략을 지녔다. 귀속칠가의 움직임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인접해 있는 청성파와 아미파의 동향이었다.
구파일방의 일 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은 손톱 밑에 박힌 가
시처럼 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모두 무언의 긍정을표 시하자 당기룡은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 두 사람을 보냅시다. 후기지수(後起之秀) 제일의 독
술과 추적술이 모인다면 금상첨화겠지. 나는 그들 외에 한 사
람을 더 보낼 생각이오."
중인들은 당기룡의 잔잔한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모이기 전부터 문주의 복안이 어땠는가를 짐작했다. 당철휘와
한연지는 애초부터 복안에 들어 있었던 것을...
당문 십절의 얼굴을 한 사람씩 돌아본 당기룡은 눈을 빛내며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단비하(段悲河)를 보낼까 생각중이오."
"허! 단비하!"
"허허허!"
"가주! 그놈이 아직 살아 있습니까?"
약속이라도 한듯이 대소(大笑)가 터지며 가며운 농담도 오고
갔다.
당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덜떨어진 놈.
바보, 천치(天痴), 멍청이, 팔삭동이...
단비하를 지칭하는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타락방
자(墮落榜子)라고 불렀다. 바보라고 부를 때면 바락바락 성을
내며 달려 들었지만 타락방자라고 부르면 온순한 양처럼 히쪽
거렸다.
공자(孔子), 맹자(孟子)처럼 자(子) 자가 들어가니까 좋은 말
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바보는 아니었다. 여섯 살에 천자문(千字文)을 뗀 신
동(神童)이기도했다. 사서(四書)를 읽고 삼경(三經)을 외웠다.
하늘이 시샘했음인가 그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
때 흰알광대버섯을 먹으면서 부터였다.
반나절 동안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잠복기(潛伏期), 그런 그
가 한밤중에 구토와 설사를 시작하더니 혼절 상태에 빠졌다.
단가(單價) 역시 의독(醫毒)에 독특한 체계를 쌓았었지만 현대
에 이르러서는 명맥이 끊긴 상태였다. 당문에 가장 심하게 대
항했던 가문이 치른 대가였다. 후손도 끊겨 단 두명만 남았으
니 단추강(段秋剛)은 단비하를 업고 달렸다.
당문으로...당문만이 자식을살릴 수 있을것 같았다.
독제실장 무독천살 당운담, 그는 단비하의 상세를 보는 순간
낮에 개발한 독단(毒丹)을 떠올렸다. 여타 실험에서는 완벽한
독성을 보여줬는데 인체에 미치는 영향만은 실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몸에 투여해 볼수도 없었다.
당운담은 인륜을 던져 버렸다.
맹물을 해독제인 양 복용시켰다.
단비하는 이틀만에 깨어났다. 하지만 그때는 독버섯의 영향으
로 백치가 된 후였다. 당운담은 단추강을 설득했다. 단비하를
독제실에 맡기라고, 자신이 틀림없이 고쳐 주겠노라 장담하면
서 그날부터 단비하는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독성이 약한 독에도 복창(腹脹)과 신열(身熱)에 시달
렸다.
하지만 일 년, 이 년...세월이 지나는 동안 웬만한 독에는 꿈
쩍도 하지 않았다.
내성(耐性), 저항성(抵抗性)이 생긴 것이다.
독물이 체내로 흡수되는 순간 신체 조직은 독성분을 무서운 속
도로 분해했다. 특히 위장(胃腸), 내장(內臟) 신장(腎臟)의 발
달은 놀라웠다. 투여된 독의 칠 할은 흡수되지 않은 채 신장을
통해 요(尿)로 배설되었다. 인간의 저항력이 강하다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당문사(唐門史)에 일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물론
물에 천분지 일로 희석시킨 독이었지만...당문에서 제조한 모
든 독이 실험되었다.
극히 소량(小量)이었지만 치명적인 독들이었다. 완성된 독이라
면 해독제라도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개발중인 독은 해독제의
효능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단비하는 며칠 끙끙거리며 앓다
가 자리를 훌훌털고 일어났다.
당문 십절의 대부분은 당운담의 비인간적인 태도에 멸시의 눈
길을 보냈지만 새로운 독의 개발 속도가 빨라진 것 만은 틀림
없었다. 그후, 귀속칠가의 사람들에게는 불문율이 생겼다.
아무리 아파도 당문에 도움을 청하지 마라. 차라리 그대로 죽
는 것이 온갖 독에 시달리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금은 그저 그런 바보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인식되는 단
비하. 그의 이름이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해서 거론된 것이다.
당기룡은 입가에 빙긋이 웃음을 머금고 말문을 열었다.
"허허허!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이라지 않소. 십칠력이 당했
다는 것을 상기하시오. 십칠력주 당영지의 냉정 침착함은 전위
대 십팔력뿐만 아니라 당문을 통틀어도 따를 사람이 거의 없었
소. 십칠력 대원 개개인은 일당십(一當十)의 무용을 갖줬소.
그런 그들이 당문 최고의 신병을 사용하고도 힘없이 죽었소.
그래서...당철휘의 무공, 한연지의 지략...거기에다 나는 단비
하의 생존력(生存力)을 더하고 싶소."
"으...음! 생존력!"
"허허허! 그러시지요."
중인들의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단비하를 잊고 있었다니...제십칠력이 몰살당한 마당에 당철휘
와 한연지만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독 성분을 분석
하여 해독제를 개발한다고 해도 효과를 십 할 자신할 수는 없
는 일, 애꽃은 젊은이들만 희생 시킨다는 생각에 가슴이 묵직
했는데 천만다행이다.
단비하를 끌고 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자라는 놈이니 앞뒤 분별없이 나아갈테고 당철휘와 한연지는
그를 십분 활용하리라. 그가 몸으로 겪은 증상을 참조한다면
해독제의 효능을 알 수 있고 독접을 말살할 수 있는 방법도 선
명히 떠오르리라.
당문에 있으나마나 한놈 죽어도 아까울 것은 없다.
"그럼 독제실의 결과가 나오는 대로 출발할수 있게 준비시켜
주시오. 독제실장은 빠른 시일 내에 해독제를 만들고..."
당문십절은 들어 올때의 무겁던 기분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들은 당문주 당기룡에게 흠모의 눈길을 보냈다. 이렇
게 외환(外患)이 처리된다면, 내우(內憂)는문제 될 것도 없다
생각하면서...
* * *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촌수조차 따지지 못할 정도로 멀어
진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당(唐)씨 성(性)을 쓰고 있는 사람들
은 성씨 하나만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했다.
그중에서도 당철휘처럼 혈통이 확실한 사람은 초특급의 대우를
받았다. 당문주 당기룡의 친조카, 그것처럼 확실한 신분 보장
은 없었다.
거기에 많은 여인들로부터 흠모를 받는 섬세한 얼굴, 후기지수
중 제일의 독술을 가졌으니...
하지만 당철휘를 아는 사람들은 그와 가까이 하기를 꺼렸다.
전신에 피 대신 야망이 흐르는 사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
한 희생도 감내하는 철혈(鐵血)의 사내였다. 그의 독심(毒心)
앞에는 부처도 등을 돌린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당철휘는 당운담의 거처를 물러 나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
다. 이번 일을 완수하기만 하면 자신의 위치는 당문십절과 버
금갈 것이다. 뿐만아니라 독화 한연지를 아내로 만들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이란 이를 두고 한말인가,
당철휘는 긴 회랑(回廊)을 걸으면서 깊은 생각에 골몰했다.
아버지의 당부가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 이번 일은 목숨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네 대(代)에
서 이보다 큰 사건 일어날수 없겠지. 이번 기회에 위치를 확고
하게 굳혀 둬라. 그렇게만 된다면 문주 자리도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한연지는 마음을 연 적이 없다. 그런 여자는 심계가
깊은 편이다. 단비하는 잘 알 데고...그들을 십분 활용해라.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서산으로지는 저녁놀 때문은 아니었다. 당문주로서 천하를 호
령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야망, 당영지가 살아 있을 적
에는 조금 멀리 보였던 야망이 구체적 실상으로 다가왔다.
'단비하...'
생각이 한 사내에게 미치자 웃음이 치밀었다.
열 몇 살때였더라 이십은 넘지 않았던 것 같다. 독제실을 처음
들어서면서 그를 보았고 심심파적으로 혈봉(血蜂)을 풀었다.
- 독이 있는동물은 예외없이 독선(毒腺)을 가지고 있다.
독사는 구강(口腔)의 일종인 순선(脣腺)이 변형되어 독선을 이
룬다. 독니와 연결되어 독앵을 주입한다.
혈호자(血虎子) 역시 구강의 일종인 설하선(舌下腺)이 변화된
독선을 가지며 위치는 아래 잇몸 앞에 있고 홈이있는 앞니와
연결되어 있다. 두꺼비 같은 놈은 피부선(皮膚腺)에 독선이 있
다.
쓸종개, 쑤기미같은 물고기는 등지느러미의 기조에 노랑가오리
는 등에 있는 가시 밑동에 독선이 발달했다.
독오공(毒蜈蚣) 같은 놈은 구기(口器)에 있는 네 쌍의 이빨이
강하고 큰 돌기로 되어 있어서 독새(毒 )나 독조(毒爪)라고 부
른다. 그 끝에 날카롭고 뾰족한 갈고리 모양이고 독선은 그 안
에 들어 있다.
봉류(蜂類)는 암컷만이 독을 지닌다. 가는 배부에 독선이 있고
꼬리 끝에 산란관과 연결되어 독침으로 사용한다. 신맛과 쏘는
듯한 냄새가 있으며 피부에 찔리면 극통을 일으킨다...
철이 들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
하지만 단비하는 혈봉에 쏘이고도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
았다.
그저 따끔한지 귀찮다는 표정으로 팔을 휘저어 벌떼를 쫓을
뿐...
'독이 없나...?'
의심스런 마음에 혈봉 한마리를 잡아 왼손 중지에 댔다.
따끔한 통증, 그리고 벌겋게 변하며 퉁퉁 부어오르는 손.
한 달을 굶다가 일어선 사람처럼 밀려드는 현기증과 속에서 치
미는 구토라니...그때 피를 뽑느라고 쩬 상처 자국이 아직도
왼손 중지에 남아 있었다.
단비하는 근 칠주야 간이나 않아 누웠다고 들었다. 내성이 있
어 독의 발작이 늦었지만 그 역시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
혈봉의 독성에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 쳤다고 한다.
당철휘의 걸음이 멈춘 곳은 독제실 중에서도 최중지였다.
< 천독전(千毒殿) >
세월에 퇴색해 버린 묵빛 글씨지만 힘찬 맥이 느껴지면서 옷깃
을 여미게 하는 편액. 오늘의 당문이 있게 끔 기틀을 마련했던
제사대문주 당학성(唐學星)이 쓴 글씨였다.
그로부터 백년, 천독전은 장장 백년의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당철휘는 당문의 모든 독이 집약되어 있는 천독전을 들어섰다.
당문십절을 제외하고 천독전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
정 되었다.
기껏해야 독제실의 부실장인 당철휘와 문주의 직계 혈통 십여
명 정도.
하지만 독의 반입이나 반출에는 문주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가장 혹독한 천형(天刑)에 처해진다는 것이
당문율법 제삼조(第三條)였다. 모든 독에 대한 사용 결정권을
문주에게 집약시키고자 만든 조처였다.
육중한 철문을 열자 천독실 특유의 향긋한 내음이 코를 간질였
다.
삼백육십 종의 독단(毒丹), 이백오십 종의 독분(毒粉), 삼백여
종의 독물(毒物)이 풍겨 내는 냄새였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아버지 독제실장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으리라. 자식의
안위를 생각해서 베푼 안배(按配)였다.
당철휘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천독전 한구석으로 다
가갔다. 그곳은 살상력이 너무 강해 사용이 금지된 암기 십여
종이 놓여 있었다.
당철휘는 그중 하나를 집어 품속에 갈무리했다.
폭우빙혼통(暴雨氷魂筒).
암기실장인 천수나천 당두감이 평생에 걸쳐 만든 암기의 정화
였다.
오 년 전에 완성된 암기이나 살상력이 너무 강해 무림에 알려
지지도 않은채 사장되어야 했던 암기의 꽃. 혼까지 얼려 버린
다하여 붙여진 이름 폭우빙혼통.
반척밖에 안되는 조그만 철통이지만 그안에는 쇠털 같은 침이
삼백여 개나 내장되었다. 일제히 폭출되며 방원 사장을 뒤덮는
쇠털 구름앞에 성할자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침에는 사천에서 제일로 맹독을 지녔다는 흑사(黑蛇)의
독까지 묻어 있어 피부에 살짝만 스쳐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을 많이 맞는다. 만약 당문에 이러한 암
기가 있다는 것을 무림이 안다면 공적(公適)으로 몰릴 공산이
다분했다. 대량으로 생산할수 있다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감히 공격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폭우빙혼통 하나를 만드는데 십 년이 소모되었다. 그것
도 한번 발사하면 생명이 끝나는 암기를 그런 암기를 양산하느
라 사서 고생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용을 금지시켰는
데...
당철휘는 어둠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문주의 밀명은 아버지도 모른다. 폭우빙혼통을 소지하고 출발
하라는...당질휘는 이것이 꼭 하늘이 준 기회로 여겨졌다.
문주가 금기십병(禁忌十兵)을 소지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파격
적이었다.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 된다.
차기 문주로 내정했다는 말과도 맥을 같이한다.
독분과 독단도 몇 개 집어넣었다. 당문의 율법은 걱정하지 않
았다.
폭우빙혼통을 허락한 문주가 다른 독 몇 가지 없어졌다고 문제
삼을 염려는 없을 테니까.
'당문을 무림제일 문파로...'
당철휘는 당운담의 생각을 넘어섰다.
당철휘는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 * *
한연지는 입에 한지를 물고 검을 닦았다. 검을 손질하는 이 시
간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검 또한
주인의 심중을 읽었는지 파르스름한 예기를 빛냈다.
'십이 년인가...'
입에 문 한지가 바르르 떨리고 눈가가 가볍게 흔들렸다.
한연지는 손질하던 검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위대주
당잠청에게서 밀명을 받은 이후부터는 마음이 심란하여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밀명 자체는 대수롭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부터 암행과 추적으
로 살아 온 인생이니 큼직한 사건을 맡았다고 흥분할 것은 없
었다. 아니, 전 같으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앞으로
의 계획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을 것이다. 지금도 그래야 옳았
다.
'십이 년...'
동행자가 당철휘와 단비하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마음이 걷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철심(鐵心), 독심(毒心)을 지
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모두 공염불이었다.
친오빠처럼 따랐던 단비하때문은 아니었다.
- 나중에 어른이되면 오빠에게 시집갈 거야.
철없이 말하던 어린 시절 그때의 단비하는 총명하고 맑은 눈망
울을 지녔었다. 당문에 들어서면서 단비하를 보았다. 육 척의
키에 산야를 뛰어다니며 단련된 건각(健脚). 나이보다도 훨씬
숙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듣던 대로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
다.
그순간 단비하를 마음에서 지웠다.
하지만 단비하는 달랐다. 자신에 대한 인상은 지워지지 않았던
가!
자신에게만은 속상할 정도로 잘해 주었다. 간이라도 뽑아 줄
듯 다정했다. 오히려 그 점이 창피했다.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
락질하는 것 같아 모멸스러웠다. 아마 당문에서 그에게 가장
잔혹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당철휘와 자신이리라.
"휴우!"
한연지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당철휘, 그사람, 나...잔인한 운명이군.'
적자(赤字)와 서자(庶子)의 차이도 서글픈 법인데 하울며 멸문
한 가문과 태양처럼 높이 솟구친 가문의 차이. 그 안에서 생활
하는 후인들의 생활은 극과극이었다.
새장에 갇힌 새와 하늘을 마음껏 나는 새는 명백한 차이가 있
었다. 행동의 자유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아가는 목
표, 인생의 방향 설정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은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다.
자유만 있었다면 하늘을 높이 나는 붕새가 되었을 자신이건만
겨우 후위대 부대주라니...한가(韓家)의 희망을 걸머진 몸이기
에 더욱 높이 날아야 하는데... 짧다면 한없이 짧을 십이 년이
한연지에게는 억겁처럼 긴 세월이었다.
기회는 찾아왔다. 인생에서 단 세 번 찾아 온다는 큰 기회
가...
한연지는 당문이 돌아가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맡은
임무상 당문의 내정을 손쉽게 접한 탓도 있었지만 언제나 촉각
을 곤두세웠기 때문이었다. 당영지가 죽은 지금 차기 문주로
유력한 후계자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 쯤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
다.
'당철휘..당신이었어.'
수많은 기재들로부터 연모를 받았어도 눈 한번 깜짝 하지 않은
이유, 단 한 번의 선택을 위해서였다. 사내다운 당영지에게 기
울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좀더 확실해지
면...확실해지면...결국 그는 죽었다.
기회는 목전에 다가왔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단비하의 존재는 여간 거치적거리는 것
이 아니었다. 동행한다면 분명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만약 자신이 쌓으려는 탑을 허울려 든다면 가차없이 베리라,
그는 그, 나는 나니까. 지난 세월, 그 정도의 독심은 충분히
양성했다. 하지만 지금 밀물처럼 밀려드는 야릇한 기분은...
'휴우!'
깊은 한숨을 몰아 쉰 한연지는 검을 챙겨 들었다.
당문은 일급공신인 자신에게도 독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래
서 아직도 약독(藥毒)에는 문외한이었다. 다른 가문에서는 가
문 전래의 의약술을 비밀리에 전수하는 모양이지만 한가(韓家)
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당문에 제일 먼저 합류했지만 대접은 다른 육가와 동등하게 받
았다.
그 점이 억울한 한연지였다.
한연지는 제일실 만채실장 당중화의 거처로 향했다. 거기에는
후위대주 당잠청과 그의 아들 당자인(唐磁仁)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당철휘를 제치고 유일한 후계자가 될 것인지 논의
하기 위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계획은 꼭 알아야했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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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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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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