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달생편(達生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望之似木鷄, 其德全
망지사목계, 기덕전
"보기에 흡사 나무로 만든 닭과 같으니 그 덕이 완전하구나"
내용인즉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 중국 주나라 선왕은 투계(鬪鷄)좋아했습니다.
선왕은 '기성자'자는 투계 조련사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키워달라고 주문을 했지요.
열흘이 지나자, 선왕은 "싸움에 내보낼 수 있겠느냐" 묻습니다.
이에, '기성자'는 대답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교만하여 자신이 최고인줄 압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고, 선왕은 묻습니다. "이젠 내보낼 수 있겠느냐"
이에, '기성자는 대답합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의 그림자와 소리에 너무 쉽게 반응을 하기에 인내심과 평정심을 키워야 겠습니다. 아직은 아니 됩니다"
다시 또 열흘이 지났고, 선왕은 묻습니다. "이제 그만 안되었는가"
이에, '기성자'는 대답합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매섭고 공격적입니다. 감정이 쉽게 드러나니 아직은 아니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40일째 되는 날에 선왕은 묻습니다. "이제는 되었는가"
이에, '기성자'는 대답합니다. "네 되었습니다. 상대가 소리를 지르고 위협을 가해도 마음에 평정을 잃지 않고, 닭들이 도전을 해와도 혼란이 없습니다. 마치 나무로 만든 닭같이 목계(木鷄)가 되었습니다. 어떤 닭이라도 이 닭앞에서는 음찟 할 것이요, 도망을 치게 될 것입니다"
위 이야기는 비록, 세상 덕담이라 할 수 있지만 한마리의 닭이 40일을 거쳐 원숙한 덕을 갖춘 목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보니, 참으로 우리네들이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인듯 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2장에 보시면, 사도요한이 성도들을 부르매 자녀들아, 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호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나이때를 구분하여 그리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저마다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리 호칭한 것을 내용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의 믿음은 예수님을 갓 영접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식이 출중하고 인격과 교양이 뛰어나더라도 영적으로 보면은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물론, 세상안에서도 그런 선한 인격과 지식을 갖고 있기에 신앙생활함에 있어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을 보시면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하셨습니다.
자녀의 믿음의 분량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영접한 뜨거운 마음과 성령의 체험이 있는지라 뜨겁고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듯 하지만서도 아직은 진리의 반석에 서 있는 상태가 아닌지라 쉽사리 미혹을 받기도 하고 교만해지기 쉬운 면들이 있습니다.
목계의 1단계 과정에서도 교만함이 치솟아 자신이 최고인줄 알듯이, 자녀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과 신앙생활이 최고라는 자부를 지나서, 교만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자기만이 옳다는 의를 내려놓지 아니한 사람은 신앙생활 몇십년을 했든 직분이 어떠하든 목계의 1단계. 즉 자녀의 믿음의 분량에 머물러 있음을 깨우쳐 보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는, 아이의 믿음입니다. 아이의 믿음은, 자녀의 믿음을 벗어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단계입니다. 행위적으로 짓는 죄는 어느정도 벗어버렸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함에 중심의 기쁨의 순종이 아닌, 노력과 내적갈등이 수반되는 시기입니다. 이 때가 성령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마음과 육신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제일 심하게 다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좋을 때는 확! 좋았다가 나쁠때는 확! 나쁘기도 합니다. 뜨거울때는 확! 뜨거운데 식으면 언제 하나님 믿었나?! 싶을정도로 식어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잔잔하지 못해 쉽게 주변의 사람과 환경에 감정이 요동하고 평정심을 잃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한, 죄의 미혹이 오면 이내 마음에서 요동이 일어나기도 하며, 마음안에서 성령의 마음과 육신의 마음이 치열하게 다투게 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목계 2단계 과정이지요.
세번째로는, 청년의 믿음입니다. 이때는 능히 악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란 귀신을 좇아내는 그런 축사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단, 하나님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어가는 상태인지라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해있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도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의 싸움은 있지만, 아이의 믿음의 분량의 단계에서와는 달리 이내 성령의 소욕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또한,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행하는 행하는, 밥을 먹는 단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신은 진리를 알고 있고 진리를 행한다라는 것에 자기 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자기 의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눈초리가 매서워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있지만, 어떤 상대와도 두루두루 화평하고 거룩함을 온전히 좇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단계가 바로 청년의 믿음의 분량이며, 목계의 3단계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번째로는, 아비의 믿음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마음안에 육이 없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육이란, 하나님의 것과 반대되는 썩어지고 변질하고 부패하는 마음의 속성을 말합니다. 가령, 간사한 마음, 배신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들레는 마음, 간음하는 마음, 시기.질투, 미움의 마음등... 마음과 생각에서 악의 모양이 없는 단계를 말합니다.
상대가 내게 악으로 부딪혀와도 마음에서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기도 하지만, 그 단계을 초월하여 악한 상대에게 감동까지도 줄 수 있는 단계가 바로 아비의 믿음의 분량단계이며, 목계 4단계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정리합니다. 저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겠지만 단순히 어떤 행함이 있고 없고를 갖고서 단순히 칼처럼 자르듯이 내 자신은 몇단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믿음의 분량에라도 일시적으로는 아비의 믿음의 분량을 표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믿음의 분량이라도 아이의 믿음의 분량에 해당되는 처신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때에는 휴거을 위한 어떤 소식이나 자극적인 메세지를 자꾸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정확히 점검해보아 자기발견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내가 노력한다해도, 어떤 행위를 많이 하거나 잘 했다고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은 전폭적으로 하늘에서 공의가운데 계수하여 정확히 그 분량을 체크하여 저마다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믿음의 성장은 의외로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 이루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의 일을 하면 그것이 영이라고 생각들 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자녀가 어떤 영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성도는 일터 끝나고 교회에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하늘 상급되는 영의 일이지요. 그러나 기도하러 와서 잡담이나 하고 있고 중심바쳐 기도도 안하고 중언부언 , 잡념가운데 하고 있다면 몸은 비록 교회에 와 있지만 영의 일을 한다고 보시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반면, 어떤 성도는 아직 일터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무태도는 억지로 마지못해 남아있어서 하는 자세가 아니라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며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 영이라고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일에서도 어떤 마음가짐이냐에따라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공의가운데 정확히 계수를 하시어 저마다의 믿음의 성장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정확히 알아 부족한 것을 기도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가며 채워가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드리며 마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첫댓글 아멘입니다.
좋은 말씀이네요
아....
좋은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