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한(梁潮漢.1555.명종 10∼1592.선조 25)
조선 선조(宣祖) 때 유학자. 동래 향교의 훈도(訓導)로서 1592년 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자(公子) 등 동래 향교에 배향된 5명의 신위가 왜군의 손에 더럽히지 않도록 동래부 관아의 객사인 정원루로 옮기고 나머지 성현의 신주는 몰래 땅에 묻었다.
그런 다음 정원루 앞에서 신위를 지키다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이때 양조한의 아들 양홍도 함께 전사하였다. 당시 열두 살이던 손자 양부하는 시체 밑에 깔려서 목숨을 구했으나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39세가 되어서야 부산으로 돌아왔다.
1737년(영조 13) 호조 정랑에 추증되었다. 1839년(헌종 5) 동래 사림(士林)의 제의로 해운대구 반송동에 반송 삼절사(盤松三節祠)를 건립, 배향하였다.
【생애】
문덕겸과 함께 향교의 제생으로 노개방 교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양조한(梁潮漢)은 임진란 때 순절하였음에도 그 사적이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적을 밝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며, 또한 잘못되어 그 동생되는 양통한(梁通漢)의 사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한사시말(梁潮漢事始末)에 의해 살펴보면 본래 부곡리(釜谷里)에 살던 양조한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문덕겸과 의논하여 향교의 위패들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땅을 가려 묻고 오직 선성(先聖)과 오현(五賢)의 위패만을 모시고 성내 정원루로 옮겼는데, 적탄에 맞아 노개방, 문덕겸 등과 같이 전사하였다. 그 아들 양홍(梁鴻)도 동시에 전사하였으며, 그 때 겨우 13세된 손자 부하(敷河)는 시체 밑에 깔려 있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부하는 일본으로 가서 풍신수길을 만나 보고 일본말을 배워서 그 곳에 살다가 31세 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어서 이윽고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통한은 그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형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부하는 항상 자기 할아버지의 사절한 사실을 감격한 마음으로 평생 말했다. 그는 신장이 8척에 힘이 대단하였으며,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았다. 춘 3월과 추 9월에는 소를 잡고 일문과 이웃을 모아 포식하였는데, 옛일을 늘 비분강개하였으며,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이 남문비기(南門碑記)를 쓴 것은 임진란 후 77년 되는 해(戊申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경술(庚戌) 즉 1670년인데 부하가 91세 때의 일이다.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 사이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사절공신(死節功臣)이 되었던 것이다. 뒤에 양통한은 난후(亂後)의 호적에 보이고, 또 <화왕수성록(火旺守城錄)>에도 이름이 보이므로 사절한 사람은 형인 양조한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양통한은 비문에 실리고, 공신녹권(功臣錄券)에 실려 있고, 또 의병에 가담하여 창녕 화왕성(火旺城)에서 곽재우 장군과 같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을 다 증직하고 표창하도록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조한은 향교에서 훈도를 하였기 때문에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증직하고, 양통한은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양조한 순난비(梁潮漢 殉難碑)】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에 있는 조선 후기 양조한(梁潮漢)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양조한은 동래부 부곡리(釜谷里) 사람이며, 젊어서 동래 향교에 입학하여 문덕겸(文德謙)과 친한 사이이었다. 노개방(盧蓋邦)이 동래 향교 교수로 있을 때 두 사람이 항상 가서 그를 따라서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였는데, 그 학문이 행의(行義)를 먼저 하였고, 성품이 또 강개하여 절의(節義)로써 스스로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외적들이 동래로 쳐들어왔을 때 노개방 교수는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뵙고자 밀양에 가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므로 양조한은 문덕겸과 의논하여 동래 향교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위패는 동래읍성 안의 정원루(靖遠樓)에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위패는 땅에 묻었다. 양조한과 문덕겸이 공자 등의 위패를 정원루에 옮겨 지키고 있을 때 밀양에서 노개방이 돌아와서 같이 지켰다.
다음 날 외적이 동래읍성을 쳐들어왔으나, 양조한은 노개방⋅문덕겸과 함께 공자 등의 위패를 지키고 있다가 먼저 순절하였고, 노개방과 문덕겸도 지키고 있던 위패를 묻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양조한의 순절 사실은 당시 13세이던 그의 손자 양부하(梁敷河)가 직접 보았으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가서 19년 만에 돌아오게 되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의병 활동 중 순절한 그의 동생인 양통한(梁通漢)으로 잘못 기록되어 전해졌다.
1735년(영조 11) 동래 부사 최명상(崔命相)의 보고 등을 통해 순절 사실이 바르게 알려져 다음 해에 양조한에게 호조 정랑(戶曹正郞)이 추증되었고, 1766년(영조 42) 송공단에 모셔졌다. 양조한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 지역 안에서 순절한 선열 등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동래 충렬사에 모셔졌고, 1839년(헌종 5) 건립된 동래부 반송 삼절사(盤松三絶祠)에도 모셔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안의 정원루에서 노개방⋅문덕겸과 함께 공자 등의 위패를 지키고 있다가 순절한 양조한은 1668년(현종 9) 민정중(閔鼎重)이 쓴 <임진동래유사(壬辰東萊遺事)> 등에 그의 동생인 양통한으로 잘못 기록되어 오랫동안 정부는 물론, 후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런 논란은 1765년(영조 41) 양조한의 7세손 양운구(梁雲構)가 세 차례 소장(訴狀)을 올리고, 동래 사람들의 청원에 따라 1766년 4월 초에 최종 결론이 났다. 양조한 순난비(梁潮漢殉難碑)는 그해 4월 15일부터 송공단에 모시고 제사 지낼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양조한은 문덕겸, 비장(裨將) 송봉수·김희수와 함께 서쪽 1단에 모셔졌다. 1767년(영조 43) 송공단을 다시 고쳐 쌓아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사람만을 모시게 될 때도 서쪽 1단에 모셔졌다.
문덕겸, 양조한, 비장(裨將) 송봉수, 김희수의 순난비가 나란히 세워진 송공단의 서쪽 1단은 가로 346㎝, 세로 91㎝, 높이 74㎝ 크기의 직육면체이고, 단 위에 사각형의 좌대(座臺)를 놓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몸돌만을 얹었다. 몸돌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고, 크기는 높이 78㎝, 너비 29㎝, 두께 12㎝이다. 비석에는 ‘양공 조한 순난비(梁公朝漢殉難碑)’라고 새겨져 있다. ‘조(朝)’는 ‘조(潮)’의 잘못이다.
양조한 순난비는 서쪽에 있는 문덕겸 순난비(文德謙殉難碑)와 동쪽 정단에 있는 송상현 순절비(宋象賢殉節碑)를 비롯하여 송공단에 있는 7단 15기 비석 등과 함께 소유자인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 시대와 다르게 배치된 채 있다가 2005년에 1767년 당시와 같이 바로잡아 오늘날에 이른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송공단의 부속 단비이다.
▲양조한순난비
[출처] 조선 유학자 양조한(梁潮漢)
[출처] 조선 유학자 양조한(梁潮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