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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끼이익...!
녹슨 철문이 열리지 않으려고 바둥대다가 기어이 열렸다. 그리
고 어둠을 몰아내는 횃불이 지하 이십 장 안에 번졌다. 순간지
하 특유의 습기가 묘한 악취를 동반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저런 곳에서 사는 놈들은 어떤 놈들이야!"
"그것도 모르나?"
"응? 뭔데?"
"곧 죽을 놈들!"
"뭐? 하하하..."
"하하하..."
농(弄)을 나누면서 계단을 내려오던 두 장한은 무수한 토굴 가
운데 한곳에 이르자 발길을 멈췄다. 길을 안내하던 문지기가
걸음을 멈춘 탓이다.
"여기냐?"
"예."
"열어라."
뇌옥지기는 허리춤에 꽂힌 열쇠 꾸러미에서 뭉툭한 열쇠 하나
를 뽑아 자물쇠 구멍에 꼽고 힘껏 돌렸다. 자울쇠는 오랜 세월
동안 부식 될대로 부식되어 잘 열리지 않았다.
간신히 자물쇠를 풀자,
"저 혼자는..."
뇌옥지기가 난감한 듯 두장한을 바라봤다.
그래도 힘깨나 쓰기에 뇌옥지기로 임명 받았지만 혼자 힘으로
육중한 무게로 버티고 있는 철문을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하중(下重)에 짓눌린 철문은 아귀가 비틀려 있었다.
"에잉, 정말 귀찮네."
결국 두 장한은 문지기와 함께 철문을 열어 제쳤다.
끼이익...!
내력(內力)까지 동원하여 간신히 철문을 열자 신경을 거슬리는
기음과 함께 지금까지의 악취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음습하
고 축축한 기운이 스며나왔다.
"단비하, 나와라!"
"..."
"단비하! 나오라는 말 안 들려!"
기묘한 정적에 장한이 횃불을 들고 토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
다.
순간,
장한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쏟아 내며 뒷걸음질쳤다.
쥐 한 마리를 잡아 아귀처럼 뜯어먹는 악마, 봉두난발한 사이
로 화로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 걸레처럼 해어진 누더기 사이
로 누런 고름과 부스럼이 뒤얽힌...아아! 십팔층 팔한지옥, 팔
열지옥에 떨어진 축생의 모습이 이러할까.
장한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해 토굴을 빠
져 나왔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을 보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다른 장한이 급히 물었다.
"살아 있던가?"
"지, 지금 식사중이네. 우웩!"
장한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혓구역질을 했다. 아마 평생 오늘
본 광경은 잊지 못할 것이고, 그럴 적마다 먹은 것을 게워 내
야 할것 같았다.
"기다리세나, 그가 나올 때까지...우웩!"
* * *
당기룡은 단비하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
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얗게 탈색된 고루인간. 도저히 살가죽과 뼈 사이에 다른것
이 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하기는 혈뇌옥에서 삼개월이나 버텼다는 것만도 기적이었다.
대체로 혈뇌옥에 같히면 빛 한점 들지 않는 암흑에 질식해 버
린다. 담이 약한 사람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혼 빠진 인간으
로 전락하고 만다. 어둠과 고독을 참지 못한 탓이다.
조금더 견딘다해도 기아(飢餓)와 갈증을 참지 못한다.
쌀한섬.
그것이 평생 동안 먹을수 있는 양식의 전부였다. 쌀을 먹고 가
마니까지 씹어 먹어도 다음에는 먹을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
서는 한 달을 버틸 만한 인간도 드물었다.
그것뿐이라면 혈뇌옥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저주의 마
옥이라는 별칭도 따라다니지 않았으리라.
지질(地質), 최악의 지질.
습기는 피부를 좀먹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독충도 무시할수
없었다. 육식 독충들의 온상지, 바로 혈뇌옥이었다.
독제실에서 내성이 길러질 대로 길러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버릴 사람들을 모아 논다는 취지에서 만든 곳이지만 뜻
밖에도 그들은 거기에서 죽어 갔다. 소리없이 조용하게...당문
으로서는 귀찮은 혹 하나를 떼어 버린 듯 홀가분한 현상이었
다.
"고생 많았네. 독충들을 잡아먹고 살았다고?"
"히히히!"
단비하는 뼈만 남은 입을 씰룩이며 실실 웃었다. 당문주가 하
는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는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
다. 하지만 입가로 홀러내리는 침을 보고 있으면 먹었던 것을
게워 낼 정도로 지저분했다.
당기룡은 그런 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젖 같은 액이 탕면(湯
面)에 떠 있는 납차(蠟茶)를 홀짝거렸다.
"후후후! 정말 질긴 생명이군. 다른 사람들 같으면..."
말을 하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비하를 쳐다보았다.
"히히히! 모, 모두 무, 문주님의 더, 덕분..."
그동안 정신적인 충격이 무척 컸는지 말까지 어눌했다.
"너를 위해 일거리를 마련했다. 당철휘는 잘 알지?"
순간 단비하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마구 도리질을 했다.
"왜? 당철휘가 마음에 안 드냐?"
"그, 그 사람은 무, 무서워."
"무서워? 허허허..."
당기룡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한연지는?"
단비하의 표정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은 온데
간데 없고 만면에 하나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어린아이의 웃
음처럼 가식이 전혀 없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헤! 하, 한연지는 좋아 예쁘고...착해."
꿈결을 거니는 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한 치는
큰키, 턱에 난 꺼칠한 수염만 아니었다면 보듬어 주고 싶었으
리라. 하지만 다 큰 사람이 짓는 어리광은 보아 주기가 무척
곤혹스러웠다.
"집에 가본지도 무척 오래됐지?"
말을하면서 당기룡은 딴 생각을 했다.
이번 일만은 꼭 이루어야한다.
적어도 독문을 통합하고 구파일방의 반열에 올라서야 한다. 구
파일방이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십일 파를 만드는 한이 있더
라도, 그중 한 문파를 멸문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선조들이 못
이룬 꿈을 이뤄야한다.
언제까지나 사천성 일각에서 맴돌수는 없다.
아직도 갈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했다.
'집? 헤! 집에 가고싶어."
단비하는 멍청한 표정으로 강렬한 갈망을 전해 왔다.
"그만 가보거라. 며칠 후에 사람이 찾아가면 따라가고...말 잘
들어야 한다."
"히! 알았어, 말 잘들을 거야."
단비하는 대답을 마치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뛰쳐 나갔다. 그리
고 보니 이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무서운 사람이 붙들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는것 같았다. 그 사람이 가라고 하니
뛰쳐 나갈밖에...
당기룡은 멀어져 가는 단비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시 감상에 젖었을지언정 그런 점 때문에 대계(大計)를 그르
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사마전(査馬電), 있느냐?"
집무실을 쩌렁 울리는 일갈에는 특유의 당찬 기백이 스며 나왔
다.
"부르셨습니까!"
대답과 동시에 회색 장삼을 입은 중년인이 문을 밀치고 들어섰
다. 각이 진 얼굴에 눈매가 날카롭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뚜렷하고 머리는 반백이다. 이런 사람은 웃으면 온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상을 굳히고 검을 뽑으면 북풍한설처럼 찬바람이
돌 것이다.
"뒤를 쫓아라!"
"존명(尊命)!"
사마전은 깊숙이 숙인 허리를 펴고 중문(中門)을 나서는 단비
하를 뒤쫓기 시작했다.
'최대의 변수...혈뇌옥에서 살아나려면 처절한 생존 본능이 있
어야 한다. 백치라면 죽음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 놈...! 가
장 마음이 단순한 백치이거나 아니면...뛰어난 놈이다. 십이
년 동안 당문의 이목을 속인...'
"후후후...!"
냉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비하, 그가 어떤 인간이든 상관
할 것이 없었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 * *
대지의 감촉은 늘 싱그럽다. 촉촉한 이슬을 머금고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꼬끼오...
새벽을 알리는 수닭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다른 수닭들도
뒤질세라 목청을 돋우고 동네는 곧 홰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또르륵!
마지막 남은 술방울이 입 속으로 흘러 들었다.
단비하는 빈 병을 집어 던졌다.
깽그렁!
병 깨지는 소리가 새벽 정적을 날카롭게 깼다.
아침 이슬이 옷에 배어들어 축축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닭 울음, 바람소리였고, 눈에 보이는것은
여명(黎明), 그리고 폐가(廢家)였다.
고가(古家)는 오랜 세월 손보지 않은 듯 했다.
곳곳이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이고 다듬지 않은 정원은 잡풀이
무성했다. 아름다웠을 연못은 푸른 이끼가 가득해 무심한 세월
을 말해 주었다.
한때는 사천성 일각을 지배했던 단가(段家)의 고택(古宅).
하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고 새벽을 여는 밝은 햇살만이 찾아든
다. 바람이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을 어루만졌다.
단비하는 정원 한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늙은 감나무 한그루.
어린 시절, 검을 수련하던 곳.
아버지는 유독 감나무를 좋아했다. 기침(起寢)하면 정원을 산
책하는 것이 일과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물론 감나무를 쓰다듬
는것도...
취기로 몽롱해진 눈은 십이 년 전을 향해 줄달음 쳤다.
단비하는 눈을 부릅뜨고 커다란 망치를 꼬나들었다.
"저런 망나니 같은 자식!"
"이런 새끼는 아예 죽여 버려야해."
십여 명의 장정은 한마디씩 내뱉으면서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
었다.
단비하.
비록 십사 세의 어린 나이나 기골은 웬만한 어른보다 장대했
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은 소년이라 믿을 수 없었
다. 대장간에서 풀무질을하며 단련한 근육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탄탄했다.
감석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어린 놈이 뭘 안다고 툭하면 싸움질이었다. 같은 또래는 거들
떠보지도 않았고 싸움깨나 한다는 장정만 상대했다. 그리고 언
제나 발길질 한 번으로 승부를 갈랐다. 산과 들을 쏘다니며 단
련한 건각(健脚)은 날쌔기가 범을 능가했다.
"덤비는 놈은 모두 죽여 버리겠어."
제법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나왔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목소리
였다.
"저놈의 새끼 말하는것 좀봐?"
"뭘 잘했다고. 망나니 같은 자식아!"
사람들은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빙빙 돌기만 할 뿐 앞으로 나
서지 못했다. 단비하가 들고 있는 망치가 달빛을 받아 귀기스
럽게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에 맞으면 박살날 테고,
팔다리에 맞더라도 성치 못하리라.
단비하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일 대 일의 싸움이라면 육장(肉掌)만으로 충분했으나, 아예 떡
고물을 만들려고 작심한 무리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단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기 등등한 기세로 몰려든 이유를
몰랐다.
짚이는 것이 있다면 낮에 오독일지(五毒一指) 당풍준(唐風俊)
의 아들인 당동한(唐銅翰)과 벌인 비무.
무공을 배웠다고 으스대는 품이 느끼해 정당하게 비무 요청을
했고 중인 환시리에 결투를 했다. 상대도 되지 않았다.
싸움판에서 익힌 무공이 그렇게 강할 줄은 자신도 미처 몰랐
다. 발길질 한 번에 나가 떨어지는 꼴이라니 어린 치기(稚氣)
에 벌인 비무였지만 통쾌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정작 당문은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지 않은가.
오독일지 당풍준이 당문 삼대(三隊) 가운데 중위대주(中衛隊
主)인걸 알았더라면 이해가 빨랐을 것이다. 아니 단(段)씨 성
(性)을 쓰는 사람은 영원히 당문과 대적해서는 안 되는 율법
(律法)을 모른 것이 실책이었다.
사천인들의 우상, 당문십절의 자제를 꺾다니...
그때였다.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십여 명과 합류했다.
"야, 이 자식아. 망치 내려놓지 못해! 네 아비 죽는꼴 보고 싶
어!"
한놈이 굵은 밧줄로 몸을 칭칭 묶은 초라한 노인을 앞으로 내
세웠다. 비단 몸을 묶였을 뿐만 아니라 늘씬하게 두들겨 패 얼
굴 윤곽마저 알아볼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아, 아버지!"
비통한 절규를 터뜨릴 때 한사내가 달려들어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했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피분수가 튀어 올랐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무려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한꺼번에 달려
들어 몽둥이 찜질을 시작했다.
퍽! 퍼억! 퍽...!
"이 무슨 짓이오? 사람 죽이겠소."
아버지는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몸으로 막았다. 자식이 한대
라도 덜 맞게 하기 위해서 발버둥쳤다. 머리가 깨어져 진한 핏
물이 흘러 내렸지만 오직 자식만을 걱정했다.
그날 뭇매 속에서 단씨 부자가 살아난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다음날부터 마을을 쩌렁 울리던 망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단추강은 아들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기만
했다.
마치 실성한 사람들처럼 낄낄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뿐인가!
단추강은 얇은 면도(面刀)를 들고 다니며 툭하면 단비하의 몸
에 상처를 내곤 했다.
"쯧쯧! 미쳤군 그래."
"이놈의 세상! 차라리 미치는 게 낫지."
"자네가 죽으려고 실성했는가? 말조심하게. 그 말은 못 들을
걸로 하겠네."
"휴우!"
마을 사람들은 마음씨 좋은 단추강에게 연민의 정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몰랐다. 이러한 행동들이 살기 위한 몸부
림이었음을...
단비하는 취기를 이기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걷혀진 오른 소매 사이로 면도에 그어진 얇은 상처 자국이 보
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이제는 살색에 묻혀 희미하지만 오래 전에는
꽤나 심했을 만한 상처 자국이 팔뚝 곳곳에 보였다.
그 중하나,
"이 약초를 잘 보아라. 색은 갈색이며 향이 없다. 목통(木通)
이라 부르지. 산에 가면 얼마든지 볼수 있는 으름덩굴이란다.
나무처럼 딱딱해진 덩굴을 토막내어 건조시킨 것이 바로 이것
이야. 이뇨(利尿),진통(鎭痛), 부종(浮腫), 관절염(關節炎)에
아주 좋지. 구별할수 있겠냐?"
"으름덩굴 정도는 알아."
단비하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가운데 신경을 최대한 모았다.
아버지가 들고 있는 약초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귀는 들려 오
는 말소리를 단 한자도 놓치지 않았다.
"약효는?"
"이뇨, 진통,부종,관절염."
순간 면도가 날아왔다. 면도는 팔뚝에 기다란 상처를 그려 내
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치료약으로 진흙을 발라줬을 뿐이었다.
"잊지 마라.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는 이상하게 생긴 삼엽초(三葉草)를 다시 들었다. 버들
잎같이 길었지만 조금 더 통통했다.
"이건 반하(半夏)라는 약초란다. 땅속 뿌리의 껍질을 벗겨 내
고 건조시켜서 사용하지. 거담(去痰), 진해(鎭咳), 진통(鎭痛)
작용이 있단다. 잘 보았느냐?"
"이름은?"
"반하."
"약재로 쓸수 있는 부분은?"
"뿌리."
"약효는?"
"거담, 진해, 진통."
하지만 면도는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먼저 그어진 상처에서
한뼘쯤 위에 커다란 도흔을 새겨 놓았다. 치료약으로는 역시
진흙 아버지는 진흙을 덕지덕지 붙이면서 다른 약초를 집어 들
었다. 이번에 든 것은 감나무처럼 잎이 넓었다.
"삼백초(蔘白草)라고 한단다. 축농증(蓄膿症)에 아주 좋아. 생
잎을 따서 콧구멍에 넣고 자면 돼. 다음 날에는 다른 콧구멍에
넣고...코를 풀면 콧물과 함께 농(膿)이 나오며 시원해진단다.
잘봤니?"
"응."
"이름은?"
"다 물으면 또 도를 날리려고?"
"그래? 그럼 지금 그어 주지 뭐."
쉬익!
"크윽!"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바로 삼백초를 간수하고 익히 아는 모란꽃을 집어 들었다. 그
리고 마치 말못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란꽃을 설
명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 사람으로 치면 부잣집 맏 며느려처럼 탐스럽고 복스러워 부
귀화(富貴花)라고도 한다. 풍미농염하여 화왕(花王)이란 별칭
이 있다. 작약(芍藥)과 혼동이 되지만 분명히 다르다. 뿌리를
목단괴(牧丹皮)라고 하는데, 물로 씻어 다듬으면서 딱딱한 심
을 빼고 뿌리의 껍질 부분만 약재로 사용한다. 목단피를 달여
마시면 소염성구어혈약(消炎性驅瘀血藥)에 사용된다. 어혈(瘀
血)을 풀어 주며, 아랫배 울혈(鬱血), 충수염(蟲垂炎)에 사용
된다. 따뜻하끄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며, 사 년 내지 오 년을
경과한 것만 약재로 사용한다. 채취는 구월 상순경에 한다.
소맥(小麥), 초석(硝石), 앵피(櫻皮) 금은화(金銀花)...
숨이 막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에 난 도흔은 평생 따라다닐 터이고 상처를 보면 언제, 어디
서 무엇을 하다가...모든 것이 소록소록 되새김 되었다. 그 당
시의 아픔까지...
간신히 말문을 열었을 즈음 되었을까? 너무 어린 나이라 다른
것은 일체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편린.
옆집에서 불이 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밤중인지라 사람들은 미처 몸을 빼지 못했다. 일가 식솔이
모두 연기에 질식해 죽었는데, 한 아낙만이 정신없이 불길을
뚫었다. 그러나 나무집을 활활 사르는 불길이 그녀를 내버려두
지 않았다. 속옷에 불길이 옮겨 붙었고, 마당까지 빠져 나왔을
때는 화염 덩어리가 되었다.
살아 있는 화염 덩어리, 의미없이 허우적 대는 손짓.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후로 불길만 보면
얼굴도 모르는 그 아낙이 떠오르곤 했다.
아버지는 단가 전래의 의도를 짧은 시간에 확실히 주입해 주었
다.
가끔가다 석양이 곱게 하늘을 물들일 무렵이면 무리(武理)나
구결(口訣)을 전수해 주곤 했다.
"단가는 천하의 모든 무리(武理)를 검에 모았단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찌르고, 베고, 막음을 다섯 초식에 담으니 가람오검
식이라 한다. 그러나 오검식을 완벽하게 펼쳐도 진정한 검을
배웠다고 할 수는 없다."
"어휴! 그럼 배울 게 또 있어요?"
"활검(活劍)을 배워야 한다."
"활검을 익히면 제일 강한 사람이 되나요?"
"아니다. 제일 약한 사람이 된다."
"피이! 그런 걸 뭐 하러 배워요!"
"명심해서 잘 들어라. 검법은 다섯 부류로 나뉜다."
아버지의 음성은 진중했다. 단비하도 그 순간만은 어리광을 부
릴 수 없었다. 묵직한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다섯 부류 중 최고는 단연 활검이다. 검에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깃들여야 한다. 항시 마음과 말과 행동에 덕(德)을 겸
비해야 한다. 상대가 스스로 감화되어 검을 들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활검이다."
"이야! 멋지다. 아버지, 그것부터 배우면 안돼요?"
"두번째는 법검(法劍)이다. 검에 마음이 없다. 무아경에서 홀
로 추는 검무(劍舞)다. 적도 없고 나도 없다. 그저 배운 대로
검법을 펼친다. 상승무공(上昇武功)과 하류무공(下流武功)의
차가 드러난다. 절공을 절정으로 익혔으면 이길 것이고, 그렇
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
"세 번째는 살검(殺劍)이다. 상대를 베기 위해 쓰는 검이다.
살검에는 마도(魔道)와 정도(正道)의 구분이 없다. 불문검법
(佛門劍法)도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사용한다면 살검이다. 살검
에는 정(情)이 없다. 덕(德)이 없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
무서워는 하나 존경하지는 않는다."
"..."
"네 번째는 광검(狂劍)이다. 명예를 위하여, 이익을 위하여 사
람을 죽이는 검이다. 광검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의 구분이
없다 윤리(倫理), 도덕(道德)이 말살되어 있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쓰는 검이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고 초롱한 눈망울로 경청하는 아들을 바
라봤다. 한 자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심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혼검(混劍)이다. 무도도 없고 목적도 없
다. 그저 검이 있기에 집어 든다. 강한 자를 만나면 비굴해지
고, 약한 자를 만나면 광폭해진다. 혼검은 굳이 검이 필요없
다. 부(父)가 되었든, 창(槍)이 되었든 그에게는 마찬가지다.
잘 알았느냐?"
"그럼 죽지 않는 검은 활검 뿐이네요?"
"그렇지. 진정한 활검만이 나도 살고 상대도 산다."
"어떻게 배워야하죠?"
"모르겠구나. 활검을 익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단지 심
전(心傳)이 있고, 구전(口傳)이 있고, 행전(行傳)이 있으니 믿
으면 전수 받을수 있다는 말만 들었단다."
단비하는 두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표가 정해지고, 그것을 향한 검로(劍路)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 길을 걸어 갈 작정이었다.
그날은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했다.
정확히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전해 준 말이 가슴을 떠
나지 않았다. 밤새도록 검을 휘둘렀다.
"검끝이 죽었어! 검은 바로 나, 나는 바로 검이다. 혼연일체
(渾然一體)가 되지 않는 이상 상승검도를 익힐 수 없다. 정신
바짝 차렷!"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아버지가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걸어나오며 고함을 질렀
다. 다른 점에서는 무척 자상하고 관대했지만 검을 수련할 때
만은 무척 매몰찼다.
'그때, 밤새도록 검을 휘둘렀지. 닭이 세 번 홰를 쳤으니 새벽
무렵까지...정신 없었어. 하지만 지금처럼 바람 소리가 풍경을
울린 것은 뚜렷이 기억해...'
다음날 아버지는 새하얀 버섯을 내밀었다. 그 동안 익힌 지식
으로 흰알광대버섯이란 것과 자칫하면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해독제를 복용시키지는 않으리라.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력(生命力)뿐이었다.
하지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야 했으니까, 당문에서 기찰
(機察) 나온 무인이 곱지 않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오래
전에 알았고, 이미 제거 대상에 포함 되었다는 것을 동네 사람
들에게 뭇매 맞는 날 깨달았으니까.
눈가에 물기가 아른거렸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과거, 보고 싶
은 사람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 아직도 그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오는데...
아침 햇살이 온누리에 고루 퍼지고 제법 따스하다 느껴질 무
렵, 단비하는 몸을 일으켰다.
술이 덜 깨 비틀거리는 걸음, 천지 사위 분간 못하는 동작으로
고택 뒤 야산을 찾았다.
야산 중턱 양지 바른곳에는 묘비(墓碑)도 없는 초라한 봉분 한
개가 잡초 속에 묻혀 있었다. 오래된 듯 검붉게 변한 누런 황
토 흙이 잡초속에서 고개를 디밀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봉분 앞에서 멈춰졌다.
'영원히 못볼줄 알았는데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려.'
단비하는 술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주저 앉았다. 풀잎
에 배인 축축한 이슬이 장삼에 배어들었지만, 멍한 눈길은 봉
분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지만 괴로울 적마다 찾아올
곳을 마련해 주었던 어머니의 봉분.
'이제 가면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구려. 하지만 다시 오리
다. 꼭...그때는 이 무성한 잡초들도 뽑아주고...원망일랑 말
고 편히 계시오.'
마음속 설움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광소(狂笑)
가 터져 나왔다.
"히히히! 엄마 나 오랜만이지. 히히히! 나 이상한 것 먹고 왔
다. 벌레도 잡아먹고...음...쥐도 잡아먹었어. 쥐가 얼마나 맛
있는지 모르지? 아냐, 그것보다도 흑사(黑蛇)의 고기 맛이 일
품이다."
철없는 아이가 엄마 품에서 재롱을 떨 듯 다정한 울림. 혼자
한동안 주절대던 단비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만나볼 사람이
남은 까닭에.
휘익!
단비하가 떠난 빈자리에 사마전이 내려섰다.
그는 멀리 휘적이며 걷는 단비하를 보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
들었다.
'저런 인간의 뒤를 쫓으라니...'
사마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단비하와는 몰락한 가문의 후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썩어 부토가 되려는 짚단과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백합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가만히 놔둬도 괜찮을 텐데...'
그는 단비하가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사마전은 당문주의 밀명(密命)을 진실로 이해할수 없었지만 멀
어지는 단비하의 그림자를 보고 황급히 신형을 날려 뒤를 쫓았
다.
따앙! 따앙...!
쇠를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정적을 깨며 울렸다.
마을에서 하나뿐인 대장간.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는 망치에 두들겨 맞자 점차 호미 형상을
띄워갔다.
아직도 찬바람이 제법 매운 초봄이지만 실내는 풍로를 달구는
불길의 열기로 인해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오 척 단구에 허리까지 구부러진 노인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연신 망치를 두들겼다.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 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왔느냐."
한 일(一) 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벌어졌다.
일에 전념한 듯했지만 일 각 전부터 문설주에 기대 서 있는 아
들놈이 신경 쓰였다. 이미 죽은 놈이라고 그만큼 다짐했으면서
도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눈을 의식하고 애써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떠납니다."
"..."
따앙! 따앙! 따앙...!
"이번에는...힘들 것 같습니다."
망치가 허공에 들린 채 우뚝 멈춰졌다.
"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
"당문주 당기룡이 시킨 일입니다. 평범하지 않은일, 죽을 자리
임에 틀림없습니다."
"단가를...휴우! 죽어서는 안된다."
"그럴 생각입니다."
"잘...가라."
"옥체...보중하시기를..."
따앙! 땅...!
망치가 힘껏 내리쳐졌다. 못다 한 말을, 가슴에 담긴 애톳한
정을 소리로 들려 주려는 듯이...
단비하는 잠시 더 노인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평생 호사
(好事)라는 말을 모르고 오로지 쇠와 더불어 산 불쌍한 사람의
등이었다.
단추강은 자식놈의 떠나가는 기척을 느끼고 망치질을 멈줬다.
어디 삶과 죽음을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인가? 특히 자식
놈이 걷는 길이란 돌아온다 약속할수 없는 길이지 않은가?
천하제일 독문,
사천 당문이 시키는 일이라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다.
눈이 붉어지며 콧등이 찡해 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는가 산고(産苦)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아이를 낳고 이틀 만에 목숨을 버렸다. 염소 젖을
먹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젖 동냥을 다니며 키운 자식이다.
어미 정을 못 받았기에 걱정도 많이 했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힘이 없는 자가 사는 방법은 힘있는 자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뿐, 의독에 심혈을 기울였던 조상이 원망
스러웠다.
그때문에 자식은 지금도 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단추강은 쓰라린 가슴을 달래면서 다시 망치를 집어 들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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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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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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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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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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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하여 날아 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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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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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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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프로작가같네요. ㅎ
즐독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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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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