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를 설명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규장각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 중에도 ‘정조 규장각’이란 대목이 나오지요. 흔히 조선의 왕실 도서관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정조 시대의 규장각은 그보다는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영조 말기에 득세한 척신들을 누르고 새로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더 나은 정치를 펼치기 위한 목적이었지요.
창덕궁 후원에 세워진 규장각 건물은 왕실건물로써는 드물게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1층이 서고로 쓰였던 규장각, 2층은 책을 열람하고 정책을 논하던 주합루입니다. 요새는 건물 전체를 통틀어서 주합루라 부르기도 하지요.
이곳에는 어수문(魚水門)이라는 문이 있는데, ‘물 만난 고기처럼 일해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그리고 그들에게 죽도록 일 좀 시켜보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엿보이지요.
그리고 규장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조가 직접 뽑은 인재들로 채워졌습니다. 이것을 ‘초계문신제’라 하지요. 전통적으로 조정의 인사권이 이조에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동시에 지나친 왕권강화를 경계하는 조선 사회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초계문신제를 짤막하게 정리하면 ‘임금님의 과외수업’ 쯤 되겠습니다. 37세 이하의 젊은 당하관 중에서 초계문신을 선발하여 본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 성과는 시험 및 면접으로 평가받았는데, 이때 임금 스스로가 시험 문제를 내고 채점을 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정조가 무지막지한 대천재여서입니다. 보통 왕실의 모습이라 하면 왕이 사냥하러 가거나, 취미생활을 할 때 대간들이 달려와서 “전하, 아니 되옵니다! 학문을 닦으시어 성군이 되시옵소서 갸아악!” 같은 식으로 말하며 제지하는 게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지도자에게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요구하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반영한 것이지요.
그런데 정조한테는 이게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조가 신하들에게 “경들 책 좀 더 읽어야겠소.(씨익)” 같은 식으로 질책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요.
정조는 당대 최고 수준의 유학자였고, 책을 달달 외우는 경지에 이른 독서가였습니다. 대다수의 신하들은 그의 학식을 따를 수가 없었지요. 본디 신하가 임금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가 경연이지만, 정조는 경연 자리에서 역으로 신하들을 가르쳤습니다. 당대 학자 중 정조의 유학적 소견에 제대로 반론을 한 인물이 드물지요.
상황이 이러니 누가 누구에게 공부하라고 진언하겠습니까. 그리고 초계문신제가 유교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누가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전례가 없던 초계문신제가 유지될 수 있던 것은 정조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지요.
여하튼 이 초계문신제를 통해 능력 있는 학자들이 중용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존 관료 세력과는 연이 없는 서얼 출신 인물들도 많았지요. 왕이 직접 뽑는 만큼 이들은 왕의 친위세력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조 정치의 핵심인재들이라 할 만 하지요. 대표적인 인물이 규장각 4검수라 불리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그리고 정약용이 있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초계문신들은 본래 직무를 면제받고 학문에만 몰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규장각에 박혀서 책만 읽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의 학문적 성과는 보통 실학이라 불리는 결과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실학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에서 허황된 면을 배제하고 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학문이란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즉, 성리학의 대체가 아닌 보완입니다.)
깨끗한 신진 관료 육성이라는 장점을 가진 초계문신제지만 이 제도는 동시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건 초계문신제를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가 정약용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요.
“나라에서 과거 보이는 법을 마련한 까닭은 어진이를 택해서 뽑고 그 능함을 알아서 등용하려 함이다. 이미 과거로 뽑아서 벌써 벼슬을 제수했고 이미 청화의 지위에 좌정했는데, 이 사람을 다시 시험하고 이 사람을 다시 평가하니, 이것이 어찌 어질고 유능한 자를 대우하는 도리인가! (중략)
한번이라도 이 선발을 거친 자는 의기가 움츠러들어서 감히 낯을 들어 일을 논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머뭇거리기만 하며, 문득 임금의 사인이 되어버리니, 이것은 좋은 법제가 아니다. (중략)
초계해서 과시(課試)하는 법은 지금부터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과거에 붙은 신하들을 다시 교육한답시고 기를 다 죽여 버리니, 이런 신하들이 어찌 직언을 하며 제대로 된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정약용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신하보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신하를 가까이 해야 하는 법인데, 정조의 초계문신제는 왕의 측근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즉, 균형의 붕괴입니다. 왕권이 지나치게 강화되고 군신간의 소통마저 원활치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후기의 정조는 경연을 사실상 폐지하고 유력인사들에게 어찰을 보내며 정책을 이끌어가는 막후정치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정조의 막후정치가 나라에 해악을 끼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개인적인 능력만으로도 나라를 이끌만한 역량이 충분했고 군주로서의 책임감도 남달랐지요. 그러나 정조가 천년만년 통치하는 것이 아닌 만큼 후대의 임금들이 정조만큼의 능력을 보여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살펴보면 뛰어난 군주보다는 평범하거나, 혹은 무능한 군주가 더 많이 나타나지요. 왕조국가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왕조국가인 조선이 세계사의 다른 왕조에 비해 비교적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던 비결 중 하나는, 신하들이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의 분배를 통해 절대권력의 출현을 배제한 것이지요.
그러나 정조는 이런 장기적 시스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본인의 능력이 워낙 출중한 나머지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정치의 문제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첫댓글 장단점이 있군요
감사합니다.^~^
정조의 왕권강화와 초계문신.
초계문신제를 통해 능력 있는 학자들이 중용되었고
정조의 초계문신제는 왕의 측근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