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기자의 시각
[기자의 시각] 제1 야당 대표의 신경질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입력 2023.05.05. 03:00업데이트 2023.05.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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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월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며 기자들에 둘어싸여 있다./뉴스1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3일 국회에서 돈 봉투 사태 관련 질문을 받았다. 윤관석·이성만 의원 자진 탈당에 대해 취재진 질문이 이어지자 이 대표는 갑자기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의 녹취 문제는 어떻게 돼 가느냐”고 반문했다. 이 대표의 이런 동문서답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달 24일엔 송영길 전 대표 관련 질문에 “국민의힘 김현아 전 의원은 어떻게 돼가요? 몰라요?”라고 되물었다. 다음 날 비슷한 질문엔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은요?”라고 했다. 여당 인사들의 불법 정치 자금 혐의도 있는데 왜 민주당 돈 봉투 사태만 묻느냐는 불만이었다.
이 대표는 여당 대선 후보 시절부터 늘 언론 지형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기울어져도 너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야당도 운동장 탓을 하고 있었다. 황교안 전 대표가 언론 환경이 불리하다며 기자들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자 비판이 쏟아진 적도 있다. 야당 대표는 대통령이나 여당 대표보다 훨씬 겸허한 자세로 국민에게 다가가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이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답변하는 것이 야당 대표의 책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질문이 아니라며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이 국민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대장동 등 이 대표 관련 재판은 매주 2~3회. 이 대표도 격주 출석한다. 제1 야당 대표가 각종 사건 피의자로서 의사당이 아니라 법정에 출퇴근하는 모습은 헌정사에 생소한 광경이다. 사건이 워낙 방대하기에 재판이 진행될수록 당무(黨務) 수행이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민주당 내에선 이 대표 사퇴론이 분출하고 있다. 의원들은 “비대위 출범에 대비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 이 대표 주변에선 ‘엑시트 플랜’ 얘기도 들린다. 이 대표는 지난달 28일 법정에 출석해 측근이었던 유동규씨에게 “많이 힘들죠?”라고 했다. 국회의원과 제1 야당 대표직이라는 이중 방탄복을 입고도 결국은 안팎으로 흔들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1614만7738명. 이 대표를 지난해 대선에서 선택한 국민 숫자다. 역대 대선 낙선자 중 최다 득표였다. 대선 패배 3개월 만에 국회의원, 5개월 만에 제1 야당 대표가 됐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전직 대선 후보이자 국가 의전 서열 8위 최고위 공직자의 입에서 ‘쟤네들 얼굴에 묻은 똥도 좀 보라’는 식의 물귀신 답변이 나오는 건 격(格)이 맞지 않는다. 이 대표는 검찰이 자신을 300번 넘게 압수 수색했다고 주장한다. 검찰 수사가 이 대표 말처럼 야당 탄압이자 정치 수사에 불과하다면 기자들에게 짜증을 낼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임기가 어떻게 끝나든, 그 순간까지 초조와 불안에 떠는 범죄 피의자보다는 의연하고 품위 있는 정치 지도자다운 면모를 보여줬으면 한다. 이것은 그를 지지하거나 지켜봐 온 모든 국민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