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二 章. 인갑(鱗甲), 비늘과 껍데기
( 一 )
주위는 너무 평온했다. 청순한 꽃들이 활짝펴 고아한 정취가
물씬 풍겨 나왔다. 당문의 겉모습은 아름다움과 포근함으로가
득했다.
사천 당문은 양자강(陽子江)을 끼고 강 연안으로부터 올려다보
이는 높은 바위 위에 세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뒤로 올라가면
서 높아지는 추단(雛壇)형식을 취한다.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 가옥 같지만 실은 긴 기둥을 세워 사층
으로 만들었다. 양자강에서 수직으로 된 암벽 위에 세워진 거
대한 전각, 천군만마(千軍萬馬)를 단기(單騎)로 막아 낼 수 있
는 천험의 요새.
고풍(古風)이 풍기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한아름은 족히 되
는 거대한 원주(圓柱)가 보였다. 다시 안마당이 나타나고 조리
대와 목각(木刻)그릇에 가느다랗고 향내나는 약초들이 담겨져
햇볕에 말려지고 있었다.
한쪽의 인공 연못에는 연꽃잎이 수면을 완전히 덮었다.
사천성 거의 대부분 마을이 그렇듯이 당문도 암벽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물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마시는 음료조차도 지게
에 물통을 지고 돌계단을 내려가 양자강 탁류를 길어 와야 했
다. 그런데도 방원 십장에 달하는 연못을 만들었다면...
당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커다란 힘으로 어깨를 짓눌렀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실력이 도사렸다.
단비하는 그 점을 결코 잊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당문인들을 꺼린다. 방문좌도(房門左道)라고 욕하
는 이도 있다. 독과 암기는 하류 잡배나 사용하는 것 진정한
무인들의 정신을 더럽힌다고 성토한다. 하지만 아무도 맞대 놓
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분노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까.
경비하는 무인 한 명 없는 중지(重地).
커다란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철휘와 한연지는 가벼운 경
장(輕裝) 차림으로 마차 결을 서성거렸다. 출정(出征)을 마중
나온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한결같이 하늘의 별처럼 신분이
지고한 사람.
단비하는 쭈삣거리며 종종 걸음으로 뛰어갔다.
"이놈의 새끼가 떠나는 첫날부터..."
말을 채 듣기도 전, 사나운 발길질이 복부에 틀어박히며 뼛골
까지 울리는 묵직한 통증이 불꽃처럼 일었다.
"켁!"
단비하는 복부를 움켜쥐고 나가 떨어졌다.
하얗게 탈색된 안색, 빠짝빠짝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 몸은 경
직된 듯 잔뜩 웅크리고 펴지 못했다.
"허허! 존장(尊長) 앞에서 버릇이 없구나."
무독천살 당운담이 자식의 경망된 행동을 나무랬다. 하지만 크
게 나무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자식이 무사히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차기 문주로 벌써 내정된 듯한 기분에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사마전이 다가와 단비하의 등에 일장을 격출했다.
턱!
"커억!"
가벼운 일장이지만 막힌 숨통에 바람이 스며들었다. 정작 몸이
경직되는 순간에는 무슨 고통인지도 몰랐는데 숨통이 트이자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 한 욱신거림이 몰려들었다.
"그럼..."
당철휘와 한연지는 가볍게 포권지례(包拳之禮)를 취해 보이고
는 마차에 올랐다.
단비하는 마차에 타려다 쭈뼛거렸다. 주눅든 모습으로 여러 사
람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되는지 물어 보는 듯했다.
"어자석(馭者席)에 타거라."
사마전이 대신 일러주었다. 하기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단비하에
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헤헤헤!"
단비하는 언제 맞았냐는 듯 히쪽 웃으며 어자석에 올라탔다.
마차에 탄다는 것만 해도 황감한 듯 한 표정이었다.
"그럼..."
사마전 역시 포권지례를 취하고는 어자석에 올랐다. 사마전만
한 고수가 마부 역할을 하다니.
'치밀한 사람이군.'
단비하의 눈에 아무도 모르체 기광이 스쳐 갔다.
언뜻 보아도 꼼꼼히 준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고관 대작이나 타는 꽃술 달린 마차 문에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끔 검은 휘장이 쳐져 있었다. 누가 탔는지 숨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마차 위에는 긴 여정에 쓸 물품이 질서있게 놓여졌다. 하다못
해 식수까지도...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당문주 당기룡은 용의주도한 사람
이니까.
사마전은 간단한 무복(武服) 차림이었다. 평범한 차림새에 미
해 허리에 찬 장검이 유난히 돋보였다.
히히헝! 푸드득...!
길게 푸레질한 말 네 필은 힘차게 발굽을 울렸다.
* * *
단추강은 흐릿한 눈을 들어 뿌연 먼지를 날리며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어자석에 앉아 연민의 눈길을 보내 온 자
식. 희미한 미소로 응답했다. 보았을까? 일 각 전에 대장간 앞
을 지나친 마차는 이미 굽이 길을 돌아서 보이지 않지만 눈길
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부자간에 마지막 대면 같아서...
문득 단추강은 자신의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소름이 돋는
살기도 같이 다가왔다. 전에도 이런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자식놈이 당동한과의 비무에서 이긴 다음날 이었던가? 마을 사
람들이 몰매를 주지 않았다면 검의 이슬로 사라졌으리라.
단추강은 살갗을 저며 오는 살기를 모른 척하고 망치를 집어
들었다.
따앙! 땅...!
이번에 만드는 호미는 마을 어귀에 사는 부강(扶剛)이 주문한
것. 그는 전해 받지 못하리라, 엊그제 풍칠(風七)에게 건네 준
괭이가 마지막 일거리였다는 예감이 들었다.
등뒤 인기척은 어깨를 건드림으로써 현실화되었다.
계집애처럼 단정한 용모에 불면 날아갈듯 문약했다.
"누구요?"
"검을 다듬고 싶어서..."
"검! 후후후!"
가슴에서 격한 감정이 치민다.
자신도 검을 배웠고 자식에게도 가르쳤다. 하지만 진검(眞劍)
을 잡고 휘둘러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목검(木劍)을 잡을 적
에도 사람이 잠자는 야심한 시각에 도둑괭이처럼 몰래 일어나
익혀야했다.
자식, 그에게 자신이 만든 검을쥐여 주고 싶었다.
번듯한 세상에서 마음껏 용트림할 수 있는 세상에서 검을 쥐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그저 마음 편하게 땅이나
일구며 살면 그만인 것을...
눈길은 이미 낯선 사내에게서 떨어져 빨간 불기가 가셔 버린
미완성 호미를 바라봤다. 이어 무뚝뚝한 억양으로 쏘아 붙이듯
내밸었다.
"여기는 농기구를 만드는 곳이오. 살상 무기는 손대지 않소."
"농기구 만드는 곳인 줄은 알지만 하도 급해서..."
낯선 사내는 가까이 다가오며 검을 디밀었다.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고검이었다. 검집을 휘감은 가죽이 제
색깔을 잃을 만치 바랬다. 하지만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는
지 손때가 묻어 번들거렸다.
기이한 향기도 풍겼다.
고검(古劍)에서는 이런 냄새도 나는구나 싶었는데 맡을수록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묵은 연륜의 냄새가 아니라 검 자
체에서 발산하는 훈향(薰香)이었다.
'응! 이 냄새는...'
분명 지주(支柱)의 분비샘에서 나는 냄새였다. 아마 뇌마향(腦
麻香)이라 부르지 하지만 단추강은 내색할 수가 없었다.
독을 안다는 것이 표출되면 자식놈의 생사가 위태로우니까.
- 세상에 산재한 지주(蜘蛛)의 종류는 삼만여 종에 이른다. 그
중에 독을 가긴 지주는삼십여 종, 사람에게 치명적인 증세를
일으키게 하는 강한 독을 가진 것은 단 두 종류다. 섬서성 태
백산에서 발견되는 청살지주(靑殺蜘蛛)와 이곳 사천에 있는 홍
지주(紅蜘蛛). 그러나 지주는 성격이 온순한 편이라 적극적으
로 사람을 쏘지 않는다. 그래서 지주 독을 끓여 고형질(固形
質)로 만든 다음 분쇄해 분말로 사용한다. 무색이고 피부에 연
향을 주지 않지만 치명적이다. 발작 속도는 완만한 편이고 증
상은 호흡곤란이다.
'오십여 년 전 얼굴도 어렴풋한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 십이
년 전 개천에서 영태혈(靈台穴)에 면도를 날리며 일러 줬었지.
비하 잊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뱃속에서 기어나오는 신음을 터뜨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투...욱!
손에서 떨어진 망치는 발등으로 떨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아
픔에 여느 때 같으면 한동안 쩔쩔맸겠지만 지금은 내려다볼 겨
를도 없었다.
숨이 막히고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허...억! 헉...!"
항거 못 할 힘에 숨통이 조이듯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것도
얼마간, 하늘이 샛노래지면서 쇠처럼 단단한 몸이 공구 더미
위에 무너지고 말았다.
'비하...살아야 한다.'
하지만 힘들 것 같다. 이번 일은 정말 사지(死地)라는 예감이
든다. 낯선 사내가 흘리는 뒷 구절은 그런 확신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구천에서조차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알고나 죽으시오. 내가 후위대 부대주 당자인이오. 이제 당문
은 내부를 정리해야겠지. 당신은 쓸모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단
가(段家)의 가주니까."
당자인은 볼품없는 대장장이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움
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큰 숨을 몰아쉬고 잔떨림조차 완전히
멎자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 *
부강은 방금 전에 날아온 전서구(傳書鳩)에서 눈길을 떼지 못
했다.
고죽촌(枯竹村)이란 마을에 뿌리를 내린 지 백년 당문은 마지
막까지 대항했던 삼가(三家)를 한곳에 밀집시켰다. 그리고 마
을 어귀에는 항상 당문 무인들이 기찰을 돌았다.
'위험하다.'
순간적으로 느낀 심정이었다.
밤에만 날아들던 전서구가 백주 대낮에 기찰 무인들의 이목도
아랑곳 않고 날아 들었다면 상황이 급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부정(扶正)!"
등이 굽어 간신히 허리를 펼 정도로 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쩌렁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문이 열리며 벌써 오십줄에 들어선 아들이 들어섰다. 태어나서
한번도 입지 않은 무복을 입고서...
부강은 콧등이 찡해 왔다.
부정이 입고 있는 무복, 가슴에 날개를 활짝편 학 두 마리.
의술로 일대(一代)를 풍미하던 부가(扶家)의 문양(文樣)이 아
니던가.
"알고...있었느냐?"
부강의 음성은 심하게 떨려 나왔다.
"아버님이 하시는 일 소자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허허...숨길 필요도 없었던 것을..."
"소자 또한 무인입니다."
"농군이 아니더냐?"
"검을 잡은지 사십 년 입니다. 이제 그만 인정하시지요."
부강은 자식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다. 검만 잡으면 무인이던
가, 무혼(武魂)이 살아 있어야 무인이 아니던가. 자식에게 검
을 가르쳤으되 무혼은 없다고 판단했는데...다늙어 죽을때에
이르러서야 자식을 알아보다니.
"너는 가문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문에 대항하는 것을 언제나
반대했지."
"힘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지금 당문은 백년 전 귀속칠가가 합
심한다해도 당적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너의 생각이 나보다 깊었구나. 오늘을..."
부강의 눈에는 체념의 눈빛이 사라지고 활활 타는 불덩이가 일
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압니다. 전서구가 날아온 것을 보고...당
문 기찰 무인들도 봤을 겁니다."
"일 각만 막을수 있겠느냐?"
"일 다경이라면 몰라도 일 각이라면 힘들겁니다."
"허허허! 부가의 대(代)가 끊기는구나."
너털옷음을 홀린 부강은 보나 안 보나 마찬가지인 전서를 펼
쳐 들었다.
< 부가주(扶家主) 전(前).
점삼호(點三號) 실종 나흘째.
당기룡에게 생포되었을 공산이 농후함.
즐거운 만남이었음.
점일호(點一號) >
부강은 전서를 힘껏 구겨 버렸다. 세상 모든 인심이 야박한줄
은 알지만 이럴 수가...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무가(武家)에
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천하제일 무가에서 태어나 못
가진 자의 설움을 모두가 맛보게 하고 싶었다.
'이런 놈들을 믿고 일을 진행했다니.'
어느 날 날아든 전서구는 삶의 희망을 날라주었다. 창법(槍法)
한가지. 그 후에도 전서구는 계속 날아들었다. 창법의 뒷 초식
을 적어서.
비록 강호에 널리 알려진 창법이지만 기름 다한 등잔을 되살리
기는 충분했다.
부가(扶家)는 의가(醫家)였다.
가전무공이래야 산속에 떠도는 맹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 호
신술(護身術) 이상의 무공은 탐하지도 탐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당문의 협박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림이 무림인의
것이듯. 의가 역시 독자적인 길이 있다고 믿은 까닭이다.
결과는 멸문으로 이어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죽촌으로 끌려왔고, 평생을 탐구하던 의
서(醫書)를 버려야했다. 손자까지 셈하면 벌써 오(五) 대(代).
그간의 고초와 한을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부강은 점일호가 보내 준 창법을 부단히 연마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의기있고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을 모았다. 당문에서 벗
어나는 것이 염원인 사람들을,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떤 경우에도 협조해 주고 도와 주겠다던 점일호가 이렇게 떠
날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였다. 당문과 당문을 견제하는
다른 세력 간에 이용당한 볼품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까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수 있으리라.
부강은 품속에서 독단(毒丹)을 꺼내 들었다.
창! 창...!
방문 밖에서는 검창 부딪치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 왔다. 분
명 자식놈과 손자놈이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일 게다.
부강은 손에 든 독단을 망설임없이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부가비전의 독단, 이음단(二陰丹).
엄밀한 의미로 말하자면 이음단은 독단이 아니었다. 혈액이 막
혀 피가 잘 돌지 않는 노인들을 치료하는 영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방대한 양을 복용하면 심장에 무리가 간다. 혈액이
도는 속도는 급속히 빨라지고 종래에는 뇌혈관이 터져 버린다.
일반적인 독단을 복용하면 잠복하는 시간 발작하는 시간이 필
요하다. 그시간이면 당문도들은 자식과 손자를 도륙내고 짓쳐
들리라. 검으로 자진한다 해도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당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살리려 할 게다. 그래
야 자신과 동조했던 반도들의 뿌리를 뽑을수 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암중에 숨어 있는 젊은 무인 이십여 명의
죽음은 필연이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만은 살려
야 한다. 그래야 권토중래(捲土重來) 할 수 있다. 자신은 죽어
도 뜻은 이루어진다.
생포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확실한 죽음이 필요했다.
"크윽!"
급속히 빨라진 혈액 순환 때문에 얼굴이 대춧빛으로 붉게 달아
올랐다. 이윽고 앞이 노래지면서 반신이 자르르 마비되었다.
뇌혈관이 터진 것이다.
쿵!
쓰러지는 눈길에 피를 흠뻑 먹은 장검과 냉랭한 표정의 무인들
이 보였다. 그들의 가슴에는 전갈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
다.
"크훗! 전갈이 학을 잡아먹었군."
부강은 눈을 뜬 채로 큰숨을 몰아쉬었다.
* * *
엄삼태(嚴三泰)는 뱀집게를 들고 야산을 휘저었다.
아직은 초봄인지라 뱀들의 차디찬 피는 더워지지 않았다. 뱀
굴 하나만 발견한다면 몇 달간 편히 지낼 수 있는 동전을 벌
수 있다.
오늘은 초장부터 한 건 올렸다.
뱀 굴을 발견했고 늘무기와 독사, 살무사가 뒤엉킨 것을 그대
로 건져 담았다. 늘무기 한 마리당 동전 여섯 문이니 모두 칠
십이 문, 독사가 한 마리에 열 문이니 모두 백 문, 더욱 기쁜
것은 살무사가 네 마리나 섞여 있었다. 살무사는 독사의 세 배
에서 많이는 이십배까지 받았다. 모두 삼백칠십이 문, 쌀 두
가마는 거뜬히 번 셈이다.
'근처에 굴 하나 정도는 더 있을텐데...'
엄삼태는 이빨이 다 빠져 합죽이가 된 입을 우물거렸다. 씁쓸
한 맛의 송화(松花) 가루지만 공복을 채우는 데는 그만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엄삼태는 뱀 집게를 힘없이 떨궈 버렸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불
길이 마을 전체를 휘감았다.
'방화...빌어먹을!'
엄삼태는 거송에 등을 기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부가주가 하는 일이 애당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의 말을 믿고 어설픈 잔재주 몇 수 배웠다고 당문을
치려 하다니...그럴 상대 같았으면 긴긴 세월 침묵 속에서 굴
욕을 당하지도 않았으리라.
귀속칠가중 무공이 강하기로 말하자면 엄가가 제일일 것이다.
순수 무공만 놓고 본다면 당문도 한 수 접어 주는 상대였다고
했으니 지금은 모든 것이 당문에 흡수 아니 갈취당했다.
비록 외부 세력이 쳐 올 경우에만 대응하기로 했다손 치더라도
기찰이 심한 상태에서는 무리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종적은 이미 발각되었으리라.
부가를 쳤다면 단가 역시 쳤을 테고 잠시 후에는 전갈 몇 마리
가 지척에 다가설 것이다. 자식, 며느리, 손자, 동생 일개 사
촌 일가...몇 남지 않은 엄가의 식솔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화염속에 뒹굴고 있을 테고.
엄삼태는 품속에서 소검을 꺼냈다. 남루한 행색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검(古劍)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집은 가죽으로 만들었
으되 평범하지 않았고 겉면에는 엄가지검(嚴家之劍)이란 글씨
가 뚜렷했다.
스...윽!
검집을 빠져 나온 예리한 검날에는 맹독이 묻어 있는 듯 푸르
스름한 귀광을 발산했다.
푸욱!
소검은 정확히 심장 한가운데를 파고 들었다. 살결 베이는 소
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솜씨였고, 날카로운 검날이었
다.
'주머니 속에 든 칼은 언젠가 옷을 찢게 되어 있지. 비록 삼가
는 몰살되지만 당문에 반심(反心)을 품은 젊은이들이 남아 있
는 한...남아 있는 한...'
잠시 후, 당자인이 당문도 네 명과 함께 도착했다.
엄삼태는 눈을 부릅뜨고 싸늘히 식어 있었다. 살결 자체가 푸
르다 못해 검게 보일 정도였다.
'이게 무슨 독이란 말인가?'
당자인은 엄삼태의 가슴에 박힌 소도를 뽑아 냈다. 살결이 꼭
물고있어 뽑아내는 감촉이 섬뜩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떤 독
이 이렇게 치명적인지 그 점이 더욱 궁금했을뿐 엄삼태의 몸에
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분명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신인데...
당자인은 감히 독을 만지지 못했다. 종류를 알수 없는 독이라
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 독문 사람들의 철칙. 경고를 망
각하고 섣불리 달려 들었다가 죽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검집을 집어 소검을 넣고 품속에 갈무리했다. 분명 맹독(猛毒)
이니 언젠가는 크게 소용될 날이 오겠지.
"지독한 놈들...나 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려고 발버둥쳤
을 덴데..."
그랬다. 부가의 가주 부강의 죽음도 뜻밖이었고 엄가의 엄삼태
가 자진한 것도 의외였다. 이들을 죽이려면 최소한 이십여 명
의 당문도들이 희생될 것이라 추측했는데...하지만 그편이 나
았다. 이십여 명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사로 잡을수만 있다
면...
"태워라!"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당자인은 신형을 날려 산 아래로 치달렸
다. 신법을 전개하는 발걸음은 가볍기가 미풍(微風) 같았다.
희망에 들뜬 탓이었다.
바보 같은 당철휘는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목숨을 내걸었다.
한데 자신은 문주의 직접적인 명을 받고 고죽촌을 멸살했다.
귀속칠가 중 삼가를 뿌리째 뽑아 버린 것이다. 단비하, 한 놈
이 살아 있지만 터럭 만큼도 염려되지 않았다.
"으하하하핫...!"
광소가 절로 터지는 당자인이었다.
* * *
당자인은 공손히 부복했다. 행동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이 스며나왔다.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가 비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죽촌을 멸살했습니다. 개미 한 마리까지 전부..."
"잘했다."
당기룡은 여전히 귀태가 흐르는 모습을 유지했다. 입가에 띤
미소까지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음성은 단호했다. 화선지
에는 난초가 한올 흐트러짐도 없이 그려졌다.
잠시 후 당기룡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어 왔다.
"육실 삼대 일원에 있는 삼가의 후예들은 처리했나?"
"모두 십이 명, 일제히 제거했습니다."
"그래?"
당기룡은 벼루에 붓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옆에 놓인 세검수
(洗瞼水)로 손을 씻었다.
"삼가를 멸살했다면 다른 사가(四家)에서 불안해 할 텐데...대
책은 서 있나?"
"네?"
당자인의 희망에 들떠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었던 안색이 창백해
졌다. 이런 물음을 던져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버지 당잠
청도 만채실장 당중화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
다.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난다.
한연지,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하던 말이 송곳처럼 가
슴을 찔렀다.
- 우리가 떠나고 나면 문주님은 삼가를 칠 거예요. 밖을 치려
면 내부가 안정되어 있어야죠. 그렇다고 삼가를 치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아시다시피 삼가 사람들은 얼마 남
지 않았거든요. 남은 사가가 문제예요. 그들의 수는 근 이백여
명. 문주님이 어떻게 처리하실지 궁금하네요.
그때는 무심결에 흘려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물음이 바로
자신에게 이렇게 빨리 떨어질 줄이야.
"그, 그것은 아직..."
"생각 안 했단 말인가?"
"네."
모기 소리보다도 가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고개를 푹 떨구고
어깨에 힘빠진 모습이 애처로웠다. 하지만 당기룡의 호통은 사
정없이 몰아쳤다.
"당문에 아직 너 같은 놈은 없었다. 네가 내 조카란 말이냐?
무슨 놈이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른단 말이냐?"
"무, 문주님 그건 문주님이 시켜서..."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망발을 하는 게냐?"
당기룡의 호통은 집무실을 쩌렁 울렸다. 방금 전까지의 온화하
고 침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서슬 퍼런 눈동자만이 이글
거렸다.
분노에 치가 떨리는지 바르르 떠는 전신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당자인은 비로소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주는 애초부터 자신을 후계자로 내정하지 않았다. 희생양,
철없이 날뛰다가 주인에게 잡아 먹히고 마는 가련한 신세가 바
로 자신이었다.
"무, 문주님! 아버님을 좀..."
당기룡의 호통을 감내할 수 없겠기에 간신히 뱉은 애원 하지만
그것이 더욱 당기룡의 노화(怒火)를 부추겼다.
"네놈이 아비를 믿고 그토록 방자했단 말이냐?"
말과 동시에 각(脚)이 날아왔다.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
은 평범한 각법이었다.
당자인은 황급히 몸을 뒤로 제치며 한 바퀴 재주를 넘었다. 그
대로 각을 맞으면 내장이 파열될 것이 분명했기에 순간 품에서
소검을 뽑아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가의 가주가 자결하며
남긴 귀광 어린 소검. 그냥 맞아 죽을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
다.
"네놈이 엄가지검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네놈에게 문주를 내주
었다면 큰일날 뻔했구나."
당기룡의 음성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오랜 세월 동안 결에서 지켜봤으니 백부(伯父)의 습성을 손금
보듯 안다. 백부는 지금 자신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자신이 죽은 다음 모든 허물을 뒤집어 씌우리라.
'도망가야 한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꼭...'
당자인의 눈은 빠르게 사위를 훑었다.
문주와 자신과의 거리는 일 장 반, 봉창까지의 거리는 반 장.
강호에 나서는 무인은 무공의 칠 할만 드러내라고 했다. 그래
서 남몰래 익힌 구룡십팔변(龜龍十八變).
'충분하다.'
당자인의 발길은 대청 바닥을 박찼다. 순간,
"네 이놈!"
고막을 찢어발기는 고함과 함께 혈리표 다섯 자루가 날아들었
다. 손끝에서 묵빛이 번쩍인다 싶었는데 어느새 바윗덩이보다
더 크게 확산되었다.
"형님! 손에 사정을..."
창! 창! 창...!
망치로 쇳덩이를 두들기는 듯한 음향과 함께 불똥이 튀어 올랐
다. 당문주가 던진 혈리표는 유엽도(柳葉刀) 다섯 자루와 부딪
쳤으면서도 계속 날아와 몸을 할퀴었다.
"아버지!"
절망에서 구원자를 만난 심정이랄까? 그러나 당잠청의 다급한
일갈은 한 가닥 희망을 여지없이 뭉개 버렸다.
"도망쳐라! 어서!"
휘익...!
당자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봉창을 부수며 뛰쳐 나갔다. 그리
고 정신없이 치달려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형님, 자인이를 언제쯤 다시 부르실 계획이신지..."
조금 전 분위기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휴우! 한 사오 년쯤 뒤를 돌봐 주게. 그때가 되면 어느 정도
마무리되지 않겠나."
"마음이 여린 놈인지라 충격이 컸을 겁니다."
"배워야지. 험한 세상 아닌가? 젊었을때 부지런히 배워야 돼."
부서진 봉창을 통해서 조금 쌀쌀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암계
(暗計)가 난무하는 무림을 쓸어 버리려는 듯 바람은 집무실 곳
곳을 누볐다.
당기룡과 당잠청의 밀담(密談)은 한동안 계속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
고맙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합니다 ㅡㅡㅡㅡ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6.24 22:32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