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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사천(四川)에서 장강(長江) 연안부두(沿岸埠頭)까지는 이틀 만
에 도착했다. 그 동안 마차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사전에 빈
틈없이 준미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마차가 쉬는 곳에는
반드시 새로운 마차가 기다렸다.
마른 육포(肉脯)도 필요 없었다. 따뜻한 찐빵 혹은 불지 않은
소면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마차가 언제 어느 곳을 통과
할지 정확히 안다는 증거였다.
'쉽지 않겠군.'
단비하는 암울한 눈을 창공으로 던졌다.
쉽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번 일은 특히 어렵게 생각됐
다. 당문 사람들의 준비가 치밀할수록 조직의 강대함이 피부로
느껴질수록 알지 못할 불안감이 엄습했다.
"워...i"
히히힝...!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지금까지 교체된 마차가 여섯 번.
가깝지만 피곤한 여정이었다.
"히야! 바다다!"
단비하는 입을 쩌억 벌리고 탄성을 토해 냈다. 저쪽 끝이 어렴
풋이 보일 정도이니 넓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다라니...
사마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단비하가 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어나서부터
당문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했으니 견문(見聞)을 넓힐 틈이 있
었겠는가. 매양 똑같은 사람들, 눈에 익은 환경만 보다가 새롭
게 펼쳐진 세상은 신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부터는 배로 가야한다."
사마전은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냉랭한 말투로 내뱉으며 검은
휘장을 들어 올렸다. 사마전과 당철휘는 서로 성격이 안 맞는
듯했다. 서로 말도 주고받지 않았고 오가는 말이라는 것도 의
례적인 것뿐이었다.
사마전과 당철휘는 묘한 관계였다.
사마전이 비록 귀속칠가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당문주의 신임
이 두터웠다. 뚜렷한 직책은 없지만 그가 당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당문십절 정도였다. 그가 본 당철휘는 곱게 자란 난초
에 불과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양 한 마리가 늑대 무리를
얕보는 것 같아 위태로웠다.
당철휘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문주의 신임이 두텁고 연배가
높아도 역시 귀속칠가의 사람. 그렇다면 당문 직계 혈통에게는
머리를 숙여야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차기 문
주를 맡은 것이나 진배없는 자신한테는...
보이지 않는 알력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마다 날카로운 검이
되어 부딪쳤다.
"히야! 바다에 집이 있네."
단비하는 강에 떠 있는 커다란 범선들이 대궐로 보인 모양이
다. 연신 감탄음을 토해 내며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 댔다.
사마전은 당철휘의 눈꼬리가 살며시 치켜지는 것을 보고 급히
단비하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이놈아! 저건 집이 아니라 배라는 거다."
"배? 거짓말 마. 아빠가 그러는데 배는 사람이 만드는 거랬다!
사람이 저렇게 커다란 배를 어떻게 만드냐?"
"하하하! 그래, 네 말이 옳다 집이라 하자. 그럼 우리 집에 갈
까?"
"히! 저 중에 우리 집도 있어?"
"그럼..."
사마전은 그들을 제치고 민선(民船)으로 향하는 당철휘와 한연
지를 노려보았다.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자신과 당철휘와의 어색한 관계를 잘 알면서도
아무 소리 안 하는 한연지가 그렇게 미울수 없었다.
'빨리 데려다주는 게 상책이지...휴우!'
"이놈아! 뭐 하냐? 빨리 오지 않고..."
사마전은 애꿎은 단비하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사천에서 중원으로 나오는 길은 장강(長江) 대수로(大水路)와
잔도(棧道)를 거쳐서 북쪽 장안(長安)으로 나가는 산길이 있
다.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노선은 장강수로였다.
대설산(大雪山)에 근원을 두고 흐른 물이 서쪽 서장(西藏) 깊
숙이 청해(靑海)로 모이고 그 물이 다시 흘러 사천 산중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수원(水原)은 사천을 서에서 동으로 관류(貫
流)하여 호남(湖南) 호북(湖北)을 통과, 대평원(大平原)을 질
주하며, 절강성(浙江省) 북우손까지 삼천 리를 달린다.
수로로 삼협(三峽) 선창(宣昌)을지나 원강(沅江)에서 내리면
형산까지는 사백 리 육로로 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양안(兩岸)이 좁아지면서 탁류(濁流)가 거센 물살을 일으켰다.
민선이 나아가는 속도는 겉잡을 수 없이 빨라지고, 바로 서 있
을 수 없을 정도로 요동이 심해졌다.
그러나 배를 탄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태평했다. 하루이틀
겪어 본 바도 아니고 배가 전복될 것을 염려했다면 타지도 않
았으리라.
"어엉차! 영차! 여엉차! 영차!"
사공들이 호령 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거센 물살을
헤쳤다.
큰 노 하나에 칠팔 명이 매달려서 조장의 호령에 맞추어 힘차
게 노를 젓는다. 노는 한쪽에 일곱 개씩 좌우로 열네 개가 있
으며, 배 앞뒤에 큰 삿대가 붙어 있는데 그것을 조정하는 데만
도 몇 사람이 필요하다. 사공만 이백여 명, 이들은 사시사철
항상 나체로 일한다.
부끄러움 같은 것은 애당초 없고 오로지 온 힘을 기울여 일에
만 몰두한다. 지금처럼 급류를 헤치거나 좁은 협곡을 지날 때
면 목숨을 내건다.
민선에는 약재를 운반하는 약선(藥船) ,동유(桐油)를 운반하는
유선(油船) 등이 있지만 단비하가 탄 배는 잡곡과 과일을 적재
했다.
그래서인지 배는 더욱 묵직했고 사공들은 이마에 비지땀을 흘
려댔다.
"야! 이 새끼야! 너 정말 사기 칠 거야?"
불현듯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거씬 뱃사람의 호령 소리를
일거에 잠재우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
단비하는 뱃전에 누운 채 눈을 돌려 소리난 곳을 향했다.
십이삼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를 가졌다. 짐승 가죽으로 된 겉옷
을 걸쳤으나 미끈한 다리가 허벅지부터 훤히 내보였다. 많은
사내들이 힐끔 거리고, 나체의 사공들까지 있었지만 전혀 개의
치 않았다.
얼굴도 제법 예뻤다. 검체 그을린 자그마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커다란 눈망울은 한연지와 흡
사했고 까만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났다.
하지만 행동은 거친 사내를 능가했다.
야생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맞은편 사내의 멱찰을 거머쥐었다.
의외로 사내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반항할 생각을 못하고 쩔쩔
맸다.
"이, 이봐. 내가 언체 사기 쳤다고 그래..."
"이 새끼야. 너 소매 거둬 봐."
"켁켁! 이 멱살 좀 놓고..."
"요 쥐새끼 같은 놈이..."
야생녀는 기어이 사내의 소매를 뒤져 주사위 두 개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의기 양양한 표정으로 사내의 눈앞에 주사위를
들이밀었다.
"너 이게 뭐야?"
"그, 그건..."
"똑바로 말해. 새끼야!"
"내, 내가 잠시 헤까닥해서...저, 정말 미안...케엑!"
야생녀의 무릎은 이미 사내의 복부를 가격했고 사내는 패대기
쳐진 개구리처럼 몸을 바르르 떨면서 파닥거렸다.
"이 새끼가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말은 마친 야생녀는 사내 앞에 놓인 말굽은을 모두 거머쥐었
다. 제법 두툼해 다섯 돈쭝은 나가 보이는 것이 네 개나 놓여
있었다.
"자 자! 저 새끼는 신경 쓰지 말고 놀아 보자고."
야생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주사위를 달그락거렸고 몇 명의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주사위 놀음에 흠뻑 빠져 들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사내는 슬그머니 일어나 뱃고불 쪽
으로 사라졌다.
'훗훗! 귀엽군.'
단비하는 야생녀의 티없는 예절에 구애받지 않는 행동에서 자
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 뭐 저런 여자가. 하는 생각보
다는 이런 여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는 서슴없이
주사위 놀음이 벌어진 곳으로 다가섰다.
"넌 뭐야?"
햇살이 가려지자 야생녀는 눈꼬리를 치켜 뜨며 시비조로 물었
다.
"그, 그러지 마. 너, 너무 무서워."
단비하는 한쪽 어깨를 움츠리며 뒷걸음질치다가 슬금슬금 다가
섰다. 뜻밖에도 이상한 말을 들은 야생녀와 도박꾼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야릇한 웃음을 매달았다.
"이제 보니 덜 떨어진 놈이군. 거, 생긴 것은 괜찮은데..."
"저리 썩 못가!"
도박꾼 중 한 명이 으름장을 놓자 단비하는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그러나 못내 궁금한지 어느 틈엔가 결에 다가와 쭈그
리고 앉았다.
쫘르륵! 쫘르륵...! 탁!
사발에 담긴 주사위가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탁 엎어졌다.
"뜸들이지 말고 냉큼 들어!"
야생녀는 성격이 무척 급한듯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거 참. 삶지도 않은 날콩을 먹으려 드네."
순간이었다.
"날콩이 뭐야?"
단비하가 불쑥 끼여들었다.
"뭐? 이런 재수없는 놈이..."
주사위 놀음중 최악이랄수 있는 일(一), 삼(三)을 펼친 장한이
성질을 버럭 내며 일권을 휘둘렀다.
퍼억!
"아이쿠!"
데구르르 구르던 단비하는가슴을 쓸어 안으며 몹시 아픈 시늉
을 했다. 그러나 뱃전에 나와 있던 사람 누구도 일으켜 주는
사람은 없었다.
"씨이 가라고 하면 되잖아. 때리긴 왜 때려?"
한마디 응얼거리던 단비하는 장한의 매섭게 뜬 눈을 보고는 부
리나케 뱃전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편한 자세로 드러누웠
다.
쳐다보는 눈길에 야생녀가 잡혔다.
여자이기에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풍경, 사람들과 어
울려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이 아름다운 정경이기에 쳐다보았
다. 그런데 따가운 눈총을 느꼈음인가? 야생녀의 고개가 돌려
지고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한 순간 야생녀는 멈칫하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주사위 놀음에 몰입했다.
단비하 또한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생각은 다른 곳을 향했다.
한연지.
가냘픈 모습이 어른거렸다.
언제 어느때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여인.
단비하는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 허공에서
너울대는 여인의 환상을 따라갔다.
검무(劍舞)를 춘다. 깊숙이 패이는 보조개를 부끄러운 듯 살며
시 띄우고 하늘하늘 검무를 춘다. 나비처럼 부드럽고, 한여름
활짝 핀 장미처럼 화사하다.
옷가지를 벗어 던지기 시작한다.
붉은 말흉(抹胸)과 얇은 고의만이 남았다. 대리석처럼 미끈한
옥주(玉柱), 한줌밖에 안될 것 같은 허리, 아아! 만지면 하얀
가루가 묻어 나올것 같은 살결.
이윽고 한연지는 말흉과 고의도 벗어 던졌다.
한걸음씩 다가온다. 방긋 웃음을 지으면서 요염한 정을 담아
뇌살적인 눈길을 보내 온다.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아니, 아니 안고 싶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큼직한 괴물이 비웃음을 띠며 나타난
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한연지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어둠이 너무 깊어 끝을 알수없는 골짜기로 사라져 간다.
'안돼...돌려 줘. 한연지만은...그래서는 안돼.'
괴물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그리고 옷는다. 악마의 미
소...아! 그 얼굴은 점차 당철휘로 변한다. 사악한 웃음이 허
공에 걸리고 한연지는 괴로운듯 아미를 찡그리며 발버둥친다.
'안돼! 제발...안돼!'
"강바람은 오랜만일 텐데 감회가 새롭지 않나요?"
단비하는 식은 땀을 흘리며 꿈결을 헤매다 문득 들려 온 소리
에 고개를 들었다. 한연지가 당철휘에게 다가서며 한 말이었
다. 그러나 거기에 단비하가 꿈꾸던 여인은 없었다. 그녀는 청
순하며 앳되고 발랄했다. 지금의 한연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뭐라고 주고받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밤.
장상(張爽)은 뱃고물로 다가서며 주위를 세심하게 돌아보았다.
밤이 워낙 깊어서인지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 선실로 들어가 혼곤한 잠에 취해 있으리라. 노가
수면을 때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 왔다.
장상은 품속에서 빨간색 철통을 꺼내 들고 잠시 망설였다.
'무공을 익힌 잡종들이 타고 있을 줄이야. 공격하면 안 돼. 그
렇지만 개망신당한 분풀이는...'
채주(寨主)의 노한 얼굴과 주먹만한 계집애의 얼굴이 마구 교
차됐다. 장강십팔수로(長江十八水路)를 휘어잡은 채주는 무림
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각 민선마다 간자(間者)를 심
어 놓았다.
굳이 무림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아도 장강을 넘나드는 배
들은 넘쳐 흘렀고, 먹잇감은 항시 풍부했다.
'에이! 몰랐다고 하면 되지, 뭐. 나를 무시한 년이 어떻게 되
는지 똑똑히 가르쳐 줘야 돼. 입에 젖내가 풀풀 나는 년이...'
빨간색 철통을 집어넣고 파란색 철통을 꺼내 들었다.
'나중에 귀싸대기 두어 대 얻어맞으면 되지.'
장상은 파란 철통밑동에 있는 단추를 힘껏 눌렀다.
파아앗! 퍼억!
파란 불꽃은 아름답게 밤하늘을 수 놓았다.
장상의 눈에는 파란 불꽃이 야생녀의 군살하나 없는 미끈한 다
리처럼 보였다. 아랫도리가 불끈 서는 느낌이었다. 많은 여자
를 품어 봤지만 무공으로 단련된 몸은 품어 보지 못했다. 탄탄
하기 이를 데 없는 몸을 안는 기분은 어떨까?
"녹림(綠林)이다!"
밤하늘을 환하게 물들인 푸른 불꽃을 보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공 중 한 놈이 외친 소리리라 하지만 늦었다. 장강 녹
림도가 타는 배는 민선보다 빠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십 리
를 가기 전에 잡힌다.
배 안에 무공을 익힌 놈이 있을지라도 상관없다. 녹림도의 무
공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패도적인 것. 한 손으로 열 손을 막
을 수는 없다.
하물며 지금 이 배에 탄 무인들 중에는 무산파파 손녀의 무공
이 가장 강해 보인다.
불행히도 장상은 절대고수 세 명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문 독
문 표식이 수놓인 무복을 입지 않고 간편한 경장을 입은 탓이
었다.
'흐흐흐! 계집애, 곧 내 가랑이 사이에서 신음하게 만들어 주
지. 건방지게 내 멱살을 잡아.'
장상은 어둠 속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물체를 보았다. 쌍돛대를
단 이장선(二檣船) 다섯 척. 십팔수로 중 사시(沙市)부터 악양
(岳陽)까지를 관장하는 오수로(五水路)의 다섯 부채주 중 탁탑
천왕(擢塔天王) 구유풍(具楡風)의 쾌속선이다.
구유풍은 칠 척 장신에 황소 한 마리를 거뜬히 들어올리는 장
사였다. 민선의 조장 노릇을 하다가 오채주(五寨主)의 눈에 띄
었고, 철포삼(鐵袍衫)이니 금종조(金鐘早)니 하는 외문기공(外
門奇功)을 절정으로 익혔다.
살가죽이 철판같이 단단해 웬만한 무인들은 철추(鐵鎚)를 들
필요도 없었다. 무공을 익혔다고 까불다가 일장에 머리통이 으
스러지는 무인도 본적이 있다.
'자, 그럼. 나는 또 할일이 있지?'
장상은 낮에 눈여겨 보았던 계집의 선실로 달음질쳤다.
"으...음!"
갈홍아(葛紅娥)는 가위에 눌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심한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신음 소리만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흐흐흐! 계집, 건방지게 내 멱살을 거머잡아?'
음흉스런 목소리도 들린다. 이것도 꿈인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사실처럼 너무 생생했다.
모피(毛皮)가 벗겨지면서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쳐 간다.
'재수없어. 일어나야 되는데...'
생각은 간절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솜털까지 곤두서게 하는 징그러운 육감(肉感)이 느껴지
는 게 아닌가, 전신을 샅샅이 어루만진 육질은 가슴에 드리워
진 말흉을 풀어헤쳤다.
'아니야. 이건 꿈이 아니야, 일어나야 돼...'
평소 부지런히 단련한 내공심법도 소용이 없었다. 마혈을 제압
당했다면 정신이라도 차릴 수 있을 텐데, 이건 꿈처럼 아득하
면서도 모호했다.
꺼칠한 감촉은 드디어 허리에 걸린 고의 끈을 풀었다.
"호오! 대, 대단해..."
감탄음?
'어디선가 들어본 감탄음인데...? 아! 그놈!'
주사위 놀음을 할 때 연신 감탄음을 토하며 정신을 산만케 하
던 족제비 같은놈.
'안돼! 이익! 죽여 버릴 거야.'
내공을 끌어올리려 무진 애를 썼지만 기해혈에 틀어박힌 내력
은 요지부동이었다.
비소(秘所)에서 송충이가 기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할머니, 어떻게 좀...'
황당한 경우, 비참한 경우,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경우, 온갖 상
황을 겪었어도 이처럼 다급한 적은 없었다. 안개에 가린 듯 뿌
옇게 느껴지는 감촉이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이윽고 옷을 벗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두고보자. 네놈 살점을 한점씩 발라 먹고 말거야.'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치밀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
았다.
몸의 모든 감각이 마비된 듯 했다. 그나마 이러한 현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인만이 가진 본능 덕분이었다.
그때였다.
"헉! 누, 누구냐?"
족제비의 입에서 다급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깐,
"크윽!"
숨을 틀어막는 답답한 신음성이 뒤를 받쳤다.
갈홍아는 입 속으로 약간 시금털털하면서도 향곳한 즙액이 흘
러듬을 느꼈다. 꿈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혀와 식도를 타
고 들어왔다. 향긋한 향은 정말 기분이 상쾌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오래 느낄 틈이 없었다.
벗겨진 모피가 몸을 덮는 순간, 알수 없는 수치심에 귓불이 빨
개졌다. 순간 귀공자처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가 떠올
랐다. 왜일까? 그의 결에는 질투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
지 않은가.
위풍당당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사내처럼 신체 균형이
잘 짜여진 사내는 처음 봤다. 천하지 않은 기풍도 밤에 들었지
만, 우수 어린 눈동자는... 느낌이 좋은 사내였다.
육신의 감촉은 서서히 돌아왔다.
"와아..."
"녹림이다."
심한 아우성과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무렵에야 간신히 몸
을 추슬렀다.
족제비 놈은 심장이 뚫려 즉사한 상태였다.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선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찔렀
다.
단숨에 심장을 가른 빠른솜씨.
상처만 보아도 검을 잡은 손에 들어간 힘이 느껴졌다. 역동적
인 힘이 검에 실렸고, 심장을 갈랐다. 장상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죽음을 맞았다. 극히 짧은 고통만 느낀 채.
'고수다.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배에 탔을까?'
이만한 검을 가졌다면 무명지배(無名之輩)는 아니다. 중원에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들은 화물을 나르는 민선보
다 좀더 편안하고 안락한 여객선을 타기 마련이다.
갈홍아는 생각을 접었다.
우선 급한것은 옷을 입는 것,
속곳을 입고 모피를 걸치면서도 족제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
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하지만 일을 당하지 않은 것
만도 어디인가.
허리끈을 질끈 묶어 겉옷을 고정시키고 머리맡에 놓았던 장검
을 집어 들었다.
"네놈은너무 쉽게 죽었어."
쉬...익!
한차례 별빛처럼 찬란한 검광이 훑고 지나자 장상은 목 떨어진
시신이 되었다. 그순간에도 선실 밖에서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아악!"
"제, 제발 목숨만...아악!"
갈홍아는 검에 묻은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수적질에도 법도가 있다.
첫째, 상채(上寨)에서 털린 배는 손대지 않는다.
털어 봤자 변변한 물건도 없고 성가시기만 하다. 장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상 일어설 기력도 없을만큼 두들겨 패서
는 곤란하다. 많이 뺏어야 절반.
둘째, 구품(口品)을 준비한 배는 손대지 않는다.
십팔수채가 있는 것을 아는 민선들은 출항할때 적정 수준의 구
품을 준비한다. 뺏고 뺏기는 실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고, 시간
과 힘도 절약된다.
셋째, 무자비한 살상은 삼가한다.
힘이 있다는 것만 알리면 된다.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민선이니
만치 세월이 지나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된다. 그런 사람
들을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간혹 가다 들뜬 영웅심에 천방지
축 날뛰는 뱃놈, 그런 놈만 제거하면 된다.
탁탑천왕 구유풍은 멧돼지 통구이와 향긋한 금존청(金尊淸)으
로 기분좋은 식사를 했다. 오늘 하루에 턴 것만 해도 민선 다
섯 척이니 벌만큼 벌었다. 특별한 일 아니면 노곤한 몸을 푹
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밤하늘에 떠오른 푸른 신호.
일반적인 민선이었다면 백색 신호탄이 떠올랐을 터, 푸른 신호
탄은 특별한 금은 보화가 실렸다는 의미였다.
푸른 신호를 보고도 움직이지 않을수는 없었다.
한데, 이 무슨 낭패인가!
민선에 오르자마자 수하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졌
다. 한눈에도 명문의 자제인 듯 한 청년, 그는 주로 암기를 사
용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추혼전을 떨쳐 내는 솜씨가 신기에
달했다. 살인 연습이라도 하는 듯이 각기 다른 수법으로 다른
곳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너무도 처참한 죽음이었다.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 그의 검공은 무척 잔인하면서도 깨끗했
다. 정말 기가 질릴 정도로 검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 그녀의 검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
다.
일 검에 한 명씩, 정확히 급소를 베었다. 격전을 많이 치른 무
인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빌어먹을 장상, 이 새끼는 어디서 무얼 하는 거야. 목을 분질
러 버려야지.'
"멈춰라!"
하늘을 나는 기러기조차 놀라 떨어질 정도로 뱃속에서 우러나
는 커다란 일갈을 터뜨렸다. 그러자,
"네놈이 수적(水賊) 괴수냐?"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이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말을 던졌다.
"괴수? 이런...우라질 놈이!"
탁탑천왕 구유풍은 좀처럼 꺼내지 않던 철추를 꺼내 들고 달려
들려다 우뚝 걸음을 멈줬다.
피로 물든 장검을 들고 앞을 가로막는 냉막한 사내. 아니, 오
른쪽 소매 끝에 금색 실로 수놓은 전갈네 마리.
'당문! 그것도 장로급이다. 제길! 장상, 이 새끼 정말...'
구유풍은 눈알만 데룩데룩 굴릴 뿐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당문에서 장로급이라면 채주라 할지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괴물이다. 그런 자를 상대로 철추를 휘두른다면 아무리 힘이
장사라 할지라도 돌아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타, 탁탑천왕 구유풍이라고 하오만..."
무명을 밝히면 어느 정도는 양보해 주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
짙게 깔렸다. 뒤에 장강 십팔수채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암시
하면서, 타협하자는 의미로 음성도 부드럽게 깔았다.
"돌아가라. 검에는 눈이 없다."
중년인의 음성은 북풍한설처럼 싸늘했지만 힘 빠진 목소리였
다. 산전수전 다 겪은 탁탑천왕은 중년인에게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읽었다. 그 순간,
"장강수로 십팔채라...! 이제 보니 형편없군. 제법 무림에 알
려진 인물들이라 한 수 하는줄 알았는데..."
비웃는듯 싸늘한 음성이 팽팽한 긴장을 건드렸다.
'저놈의 새끼! 하지만 저놈의 암기술은...'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탁탑천왕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쥐처럼 송곳니를 곤두세웠다.
"빌어먹을! 모두 죽여 버렷!"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철추를 휘두르며 중년인에게 다가섰다.
위잉! 위잉...!
철추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는 심혼을 울릴 정도로 섬뜩했다.
"오아아..."
득달같이 달려드는 수하들의 기세는 성난 해일을 능가했다.
힘깨나 쓴다는 사공들이 노며 몽둥이며 집어 들고 나섰지만 역
부족이었다. 그냥 죽기가 너무 억울해 병기가 될 만한 것을 손
에 잡았을 뿐이다.
그들은 탁탑천왕과 겨루는 중년인을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
았다. 출발하기 전에 구품을 준비했다. 수적을 무작정 베지만
않았어도 이런 살겁은 벌어지지 않았고 자신들이 죽을 이유도
없었다. 한데.
"타앗!"
맑은 외침과 함께 성난 암코양이처럼 전장으로 뛰어들며 살검
을 전개하는 여자.
그녀의 검 역시 삼인 못지않게 무자비했다.
"와아!"
기세가 오른 사공들은 삼삼오오 짝을 맞추어 수적들에게 대항
하기 시작했다.
퍼억!
"크윽! 아악!"
온갖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
단비하는 한구석에 서서 탁탑천왕과 사마전의 결투를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당철휘와 한연지의 수법도 눈여겨 보았다.
야생녀의 검법에서도 배울 점이 있었다. 자신이 익힌 가람오검
식과 부딪친다면 그들의...겨루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지켜보았
다.
위잉! 윙...!
탁탑천왕은 사마전과 직접 부딪치기를 꺼리는지 철추의 장점을
살려 원거리에서 빙빙 돌며 파상적인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기세가 무척 난폭해 사마전도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철추는 강(剛), 검은 세(細)의 묘리를 살려야 한다. 탁탑천왕
은 강을 살리고 있는 반면 사마전은 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당문에서는 손꼽히는 고수인데...'
단비하는 사마전을 이해할수 없었다. 자신 같으면 철추가 휘둘
리는 틈을 이용해 몸을 붙여 가며 일검을 뻗었으리라.
순간이었다.
"타앗!"
우렁찬 일갈과 함께 사마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당연히
철추는 사마전의 몸을 쫓았고, 순간 번개같은 섬광이 번쩍 빛
났다.
"커억!"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이 잘게 터져 나왔다.
철추와 탁탑천왕을 이어 주던 쇠고리는 반으로 잘린 채 선실
한구석을 구르고 탁탑천왕은 정수리부터 턱까지 붉은 선을 그
렸다. 그리고 수박이 쏘개지듯 머리가 갈라졌다.
"부채주가 죽었다."
누구의 입에서 터진 경악성인지는 모르지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압도하는 음성. 일순 우왕좌왕하던 수적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공들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대신 선주(船主)인 듯한 자가
사마전에게 다가섰다.
"당신 때문에 우리 형제가 삼십여 명이나 죽었소."
분노가 큰 듯 말을 하면서도 계속 입가를 씰룩였다.
"우리는 북우손까지 가야하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장강십팔
수채중 십삼수채를 지나쳐야 한단 말이오. 당신이 북우손까지
이 배를 호위해 주겠소?"
선주는 무림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할말은 하
고마는 단단함이 내면에 간직된 그런 사내였다.
"조용히 해라. 내 검에는 눈이 없으니까."
사마전은 의외인 듯 선주를 한번 쳐다보고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한마디 더 해야겠소. 당신들은 다음 선착장에서 내리시오. 더
이상 당신들을 태워 줄수 없소."
귀밑머리가 희끗한 선주는 할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죽고 싶은가?"
사마전의 몸이 굳어졌다. 평소의 그 같으면 수긍할 만한 말이
었지만 지금은 심정이 복잡했다. 원하지 않은 싸움, 비틀어진
일정, 당철휘의 귀싸대기라도 쳐 올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갈았
다. 그런 화풀이가 선주에게 터진 것이다.
"맞는 말이잖아?"
청량하면서도 톡 쏘는 음성이 선주의 말을 가로챘다. 천성이
존대를 배우지 못한듯 거칠기 짝이 없는 말투지만 일면 귀엽기
도했다.
사마전처럼 가공할 무위(武威)를 보여 주던 야생녀.
그녀는 사마전에게 다가오며 재차 쏘아붙였다.
"당문사람 갈은데...당문이라면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는 거
아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겨도 돼?"
사마전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당철휘가 불쑥 나섰다.
"맞는 말이오. 사람 목숨 귀한 줄을 알아야지. 선주, 미안하게
됐소. 선주 말대로 다음 선착장에서 내리리라. 은자를 넉넉히
보태 드리겠소. 아! 이 사람은 걱정 마시오. 내가 내리면 내리
지 않곤 배기지 못할 사람이니까."
당철휘의 느글느글한 말에 사마전은 분노의 화염을 쏟아 냈다.
그뿐, 그가 할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마전이 몸을 획 돌려 선실로 들어가자, 야생녀가 당철휘에게
다가섰다.
"저, 구해 줘서..."
당철휘는 어려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짓는 안색은 분명
아니었다. 두 눈에서 일렁이는 탐욕스런 눈빛이 그걸 말해 주
었다. 눈초리는 얼굴을 지나 검게 그을렸지만 탄탄해 보이는
목덜미에 머물렀다.
갈홍아는 이런 눈길에 익숙했다. 사내란 작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눈길을 보내 오곤 했다. 그런 인간들은 알몸의 여자를 가
만두지 않는다.
귀공자에 대한 환상이 깨지며 메스꺼움이 일었다.
"소저의 방명(芳名)은 어찌 되시는지...?"
갈홍아는 당철휘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사람을 잘못 봤구나. 그럼 누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던 눈에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웅
크리고 있는 단비하가 들어왔다.
'응? 아까는 분명 서서 구경했는데...'
"무, 무서워. 무서워..."
단비하는 고개를 처박고 울먹였다. 하지만 그의 등 위로 쏟아
지는 갈홍아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알
지 못했다.
선실로 들어갈 때까지 내내 뒤를 쫓았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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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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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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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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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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