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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운명(運命), 진가의 구분
( 一 )
선창에서 내린 네 사람은 마방(馬房)을 찾아야했다.
이번 일만큼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원강에서 하선(下船)하고, 대기해 놓
은 마차로 형산까지 달리면 된다. 배로 열흘, 그리고 마차로
나흘을 예정했던 여정(旅程). 물론 쉬지 않고 달린다는 전제하
에 계획된 일정이었다.
"여기서는 얼마나 걸리겠소?"
당철휘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분명히 알아 둬라. 형산에 도착할 때까지 앞에 나서지 마라.
선원들은 출발하기 전에 구품을 준비한다. 네가 무작정 암기를
날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지경은 되지 않았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을 때..."
사마전은 분기가 많이 가신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있을 때는..."
당철휘가 되받는 말은 곱지 않았다.
사마전은 시비조의 말투에 어이가 없었다. 검을 잡은 손에 힘
이 들어갔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 놈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고 싶었다.
그것은 당철휘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을 기화로 사마전을 확
실히 밑에 두려 했다. 사마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
지만 당씨에게만 비전되는 비폭십팔수(飛暴十八手)라면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주위 공기가 싸늘히 얼어붙고, 눈동자에 한광(寒光)이 깃들였
다. 서로의 생각을 읽은 이상 남은것은 무공 대 무공.
그때였다.
"아악! 사람살려!"
난데없는 비명이 터지며 두사람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드는 인
영.
으르릉...!
뒤로 한걸음씩 물러난 두 사람은 어이가 없어 실소(失笑)를 터
뜨리고 말았다.
그새 무슨 장난을 했는가 성이 잔뜩 나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개 한 마리,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는 단비하 쫓고 쫓기던
일인일구(一人一狗)의 경주는 개의 승리로 끝났다.
"아악!"
사마전은 단비하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는 똥개의 배를 걷어찼
다. 공력도 싣지 않은 발길질이었다.
깨앵! 깨앵...!
"아앙! 아파! 아프단 말야!"
단비하는 이빨 자국이 선명한 다리를드러내고 엉엉 울었다.
"당신이 졌어요."
"뭐라고?"
딩철휘는 요염한 웃음을 흘려 내는 한연지롤 바라보며 이맛살
을 찌푸렸다.
"나이를 헛먹었군요."
"뭐야? 말조심하지 못해!"
"호호호! 무인이 감정에 치우치다니..."
한연지는 나흘 동안 당철휘가 어떤 사람이란 걸 완전히 파악했
다. 퇴폐적이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다. 자신 위에 사람이 있
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질투심이 강하다. 소심한 성격이었다.
장점도 찾아냈다. 선상에서 딩철휘가 보여 준 무공은 놀라웠
다. 일수에 추혼전 하나씩만을 날렸지만 그 방위와 각도는...
암기를 가장 위력있고 빠르게 쳐낸다는 비폭십팔수임이 분명했
다. 그렇다면 다른 비기들도 익혔을 것이다. 한마디로 무공에
는 하자가 없었다. 부족한 실전 경험만 보완한다면...
사마전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지만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당철휘는 소심한 성격이기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완전한 자
신이 있을 경우에만 앞으로 나선다. 그러자니 암계(暗計)가 뛰
어날 수밖에 없다.
집념도 강하다. 마음에 새긴 일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완벽한 기회가 생길 때까지...
이런 인간을 요리하는 것은 쉬울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당철휘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됐어. 이제부터....'
한연지는 뇌살적인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당철휘의 부릅뜬
눈 속에서 정염을 읽은 이상 칼자루는 손에 들어왔다.
"말을 하지 말라면 안하겠어요."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뇨. 그럼 말해 볼까요? 사마전은 강검(剛劍)을 익혔더군요,
당문은 환검(幻劍)에 치중하는 편인데...조금 뜻밖이죠? 아마
사가(査家)에서 비전되는 검법일 거예요."
당철휘는 기이한 표정으로 한연지를 쳐다보았다. 부화를 돋우
면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말해 주는 여자. 관심이 있다는 표시
인가! 분명 그가 알고 있던 빙지설화의 면모는 아니었다.
"사마전과의 거리는 두 간, 비폭십팔수를 전개하는 순간 머리
가 갈라질 거예요. 사마전은 경상(輕傷), 당신은 사망(死亡)
이것이 제가 내링 결론이에요."
당철휘는 안색을 풀었다. 그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 한연지의
말대로 그 상황에서 부딪쳤다면 자신이 패했으리라.
"좋은 지적이요. 한데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뭐지?"
"나이 찬 여자는 사내를 고르게 되죠. 당신을 가다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이유가 될까요?"
"뭐? 나를 가다듬어! 하하하...자신있나?"
"못할것 같아요?"
순간 당철휘는 뜨거운 정염을 쏟아 냈다. 빙지설하가 손에 들
어왔다.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을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다가온 여
자. 하지만 쉽게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어떻게 다듬을 작정인가?"
한연지는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금 더 지켜봐야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가치?"
"당문을 천하제일 문파로 만들수 있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꺾
이지 않는 강자, 이것이 내가 찾는 사람이에요."
"으음!"
당철휘는 깊은 침음성을 토해 냈다. 당문주가 될 만한 사람이
기에 접근한 줄 알았다. 그러나 한연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
아갔다. 자신이 생각해 본적 없는 야망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당신이라면 충분하리라 믿어요. 두고 볼 거예요. 그런 확신이
들면 다듬어 보죠."
"건방진..."
당철휘는 앞서 나아가는 한연지의 뒷머리를 뚫어지게 응시했
다. 희롱당한 느낌이랄까? 그러나 심장이 급하게 뛰는 것은...
눈을 쳐다보면 그 속에 빠지고 싶고, 입을 쳐다보면 입안 가득
베어물고 싶은 여자. 그 여자가 한 말이 사실로 실현될 것 같
은 예감.
당철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 * *
< 선창마방(宣昌馬房) >
당철휘와 한연지가 마방으로 들어섰을 때 사마전은 벌써 말을
고르고 있었다. 형산까지는 근 천이백 리 길이므로 튼튼한 말
이 필요했다.
여포(呂布)가 탔던 적토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렸다고 하지만
그런 신마(神馬)가 있을 리는 없고, 비루먹지 않은 말을 골라
야 고생하지 않는다.
마방 안은 말똥 냄새가 심하게 풍기는 가운데 말 투레질 소리,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들의 홍정 소리로 시장 바닥을 방불
케 했다.
사마전은 적갈색의 말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건강한 준마였다. 영양상태가 좋고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았다. 갈색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눈에는 광
채가 어렸다. 발굽이 너무 자라지도 않았고 복대찰상(腹帶擦
傷)이나 안상(眼傷)도 없었다.
이런 말은 쉽게 짜증을 내지 않고 등에 올라탈때도 가만히 있
으며, 홍분하여 함부로 날뛰지도 않는다. 속도 조절이나 방향
전환도 무척 용이하다.
"좋은 말을 골랐군요."
한연지가 가볍게 말을 건네며 자신이 탈 말을 고르기 위해 눈
을 돌렸다. 순간,
"그 말은 내 말이야."
맑은 목소리가 들리며 가죽옷을 걸친 여인이 마상(馬商)과 함
께 걸어왔다.
'지겹게 만나는군. 무슨 인연이 이렇게 질기지!'
방긋 웃는 입가에 보조개가 깊이 파여 앙증 맞으면서도 아름다
운 용모. 그녀는 의식적으로 사마전에게 말을 건넸으나 눈은
연신 마방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또 만났군. 선창에서 내렸소?"
사마전은가볍게 응대했다.
"당신 덕분에 나까지 쫓겨났잖아. 호호호! 그 사람, 앞으로 무
인들이라면 이를 갈거야. 그 난장판을 만들어 놨으니..."
갈홍아는 마지막 말을 힘없이 흘렸다. 아무리 찾아도 단비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까닭에...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도 왠지 속상했다. 정신이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선실에서
자신을 구해 주고 입 안에 해독제를 넣어 준 사람이 꼭 단비하
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연지가 고른 말은 회색 털에 밤색 농담(濃淡)이 섞인 말이었
다.
그말 역시 탐날 정도로 균형이 잘 잡혔다.
"어떡하지? 그말도 내가 샀는데..."
다른 말을 고르던 사마전은 비로소 갈홍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지만 결에 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임자가 분명했다.
"도대체 몇 필이나 샀소?"
"다섯 필. 왜? 많이 사면 안돼?"
길을 급히 재촉하는 사람들은 종종 많은 말을 사기 때문에 이
상한 일은 아니었다. 입에서 거품을 흘릴 때까지 말을 심하게
몰았고, 그러다 지쳐 죽을 지경에 이르면 말을 갈아탄다. 이런
식으로 달리면 하루에 이백여 리도 나아갈수 있었다.
"일행이 많소?"
"꼭 대답해야 돼?"
갈홍아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다시 한번 마방을 훑어보았다.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할지라도 꼭 찾을 필요는 없었다.
우연히 마방에서 만나지 않았던들 찾을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덜 떨어진 사람이니 고맙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
갈홍아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질렀다.
단비하, 그는 말들 속에 섞여 있었다. 우리 안에 들어가 있었
기에 한눈에 찾아내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벌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성난 말의 뒷굽에 채일 위기, 말총을 잡아당겼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퍼억! 어이쿠! 히히힝...!
마방이 난장판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씨이! 나도 말 고를 줄 안단 말야."
갈홍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는 단비하를 보며 머리를 내저
었다. 이런 멍청이가 그렇게 날카로운 검공(劍功)을 익혔을 리
만무했다.
'누가 나를 구해 주었을까? 저 사람? 아니면 이 여자?'
단비하에게 주던 관심을 거뒀다. 그대신 날카로운 눈매는 사마
전과 한연지를 훑고 지나갔다.
"후후후! 말을 좀 양보해 주면 안되겠소?"
당철휘가 느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붙여 왔다.
당철휘는 야생녀에게 일행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방에서
그토록 소란이 일어도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먼 길을 급하게 갈일이 있다는 결론이 된다.
당철휘가 야생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선상에서부터
였다.
첫째는 그녀의 기질(氣質).
당문의 여인들은 척박한 환경의 영향으로 선머슴처럼 살아간
다. 그래서 빙지설화의 아름다움이 돋보일지도 모른다. 하나
야생녀처럼 자유분방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
격으로 다가왔다.
둘째는 고절한 무공.
자신이야 대문파인 당문에서 자란 몸이니 당연히 갖출것을 갖
줬다.
그런데 야생녀는 출신 내력이 어찌 되기에 고절한 무공을 익히
고 있을까? 자신과 겨뤄도 결코 밀리지 않을것 같았다.
셋째는 특이한 아름다움.
치렁하게 기른 머리가 검은 살결과 썩 잘 어울렸다.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매에서 발산되는 육향(肉香)은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렀다. 한연지가 그림처럼 고결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면, 야생녀는 황폐한 들녘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연지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
지만 야생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건드려도 좋을 성 싶었다.
책임지고 싶지도 않았지만 놓치고 싶지도 않은 여자, 하롯밤
풍류를 즐기는 것은 몰라도 평생을 같이할 반려자는 결코 아니
었다.
당철휘의 여성 편력은 당문 내에서도 유명했다. 단지 그와 접
촉한 여인들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기에 문제
가 되지 않았을 뿐. 뒷전에서 수군거리는 비아냥거림 정도는
무시해 버렸다. 자고로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했으니...
당철휘는 야생녀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머리를 부지런히 굴
렸다.
야생녀는 대꾸도 안하고 다섯 필의 말고삐를 거머잡더니 그 중
한 마리에 올라탔다. 말 다섯 필을 교대로 갈아탄다면 하루에
이백 리 정도는 족히 갈수 있으리라.
순간, 당철휘의 오른쪽 소매가 살짝 떨쳐지고 하얀 분말이 바
람결에 흩어졌다. 마침 갈홍아는 남은 말 네 필을 추스르고 있
는 중이라 바람에 섞인 흰 가루를 보지 못했다. 상황을 절묘하
게 이용한 하독술(下毒術)이었다.
"끼럇!"
갈홍아는 힘차게 고삐를 잡아당겼고, 당철휘는 입가에 묘한 미
소를 그려 냈다. 한데,
"응? 이건 전에 내가 맡았던 미혼향(迷魂香) 냄새인데? 아이
쿠! 나 전에 이 냄새 맡고 죽을 뻔했다. 사흘동안 꼼짝도 못했
어."
당철휘는 등골이 섬뜩해지면서 황급칙 몸을 돌려 음성의 주인
공을 찾았다. 단비하, 멍청한 인간이 코를 벌름거리며 상큼한
바람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이놈의 새끼가...'
당황한 당철휘는 사마전과 한연지의 종적을 찾았다. 다행히도
그들은 마상과 마차 한대를 교섭하는 중이었다.
'휴우! 다행이군.'
가슴을 쓸어 내린 당철휘는 다시 단비하를 돌아보았다. 눈에
전신을 갈가리 찢을만한 살광(殺光)을 싣고...
* * *
장강 물줄기를 따라 호아산(虎牙山)에 이른 일행은 호아객잔
(虎牙客殘)에 여장을 풀었다.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온누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였
다. 그속에 호랑이 어금니처럼 날카롭게 솟은 호아산의 정봉이
뚜렷한 자태를 드러냈다. 티 한점 없이 맑고 평화로운 정경이
었다.
단비하는 뜨거운 물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전신이 자르르 저려 오면서 여독(旅毒)이 풀리는 느낌은 언제
맛보아도 기분 좋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깐, 눈길이 몸에
새겨진 도흔(刀痕)에 이르자 전신이 벌집에 들어간 듯 온갖 고
통이 밀려들었다.
골기도찰법(骨氣塗擦法), 저주의 비전술(秘傳術)이었다. 비록
죽지 않고 살아났지만 그때 받은 고통만은 살아 생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악몽으로 되새김 될 것이다.
눈앞에 굳은 얼굴로 안쓰럽게 쳐다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 잘못하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을수도 있다. 기적의 기억술
(記憶術) 이지만 그만큼 고통이 따른다. 네가 싫다면...포기할
수도 있다.
분명 약(藥)을 배울 때와는 다른 고통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왔다.
골기도찰법은 복사뼈 아래 금문혈(金門穴)에서부터 시작되었
다. 통증의 정체는 흑사(黑蛇). 길이는 다섯 치 정도 될까?
전신은 칠흑같이 검었고, 파랗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섬뜩했
다. 독사인 듯 싶었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더니 검푸른 기운
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크으윽! 시작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고통이 약해서가 아니
라 가슴에서 치민 오기(傲氣)가 만들어 낸 여유였다.
"독(毒)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내성(耐性)이다. 처음에는 어
렵겠지만 나중에는 참을 만할 게다. 당문의 독에 비하면 조족
지혈(鳥足之血)이란걸 명심해라."
독기는 무척 강했다. 푸른 독 기운은 무릎을 지나 허벅지 가운
데까지 올라오는 중이었다. 짜릿한 기운과 함께 복통이 일고
구토가 치밀었다. 이마는 펄펄 끓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버지는 적절한 시기에 꼭 적량의 해독제만 투여했다.
해독약은 역겨울 정도로 비릿했다. 하지만 복용한지 채 일 각
이 안되어 신체에서 일어나던 고통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흑사 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맹독을 지닌 독
사도 아버지의 손에서는 장난감처럼 볼품없이 축 늘어졌다.
"이놈은 흑살무사라 한다. 몸 길이 두 척, 몸은 비교적 짧고
굵은편이며 머리는 넓고 꼬리는 짧다. 색깔은 흑색이지만 자세
히 보면 등면에 둥근 갈색 무늬가 있다. 이의 위아래 부분은
흰색이고 혀는 흑색이다. 몸 중앙에서의 비늘 줄은 스물 한 줄
이고 용골을 가지고 있다. 원래 이놈은 흑룡강성에서만 발견되
지."
단비하는 북풍한설에 알몸으로 내세워진 양 극심한 추위를 느
꼈다. 참으려 이를 악물어도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
렸다. 검을 잡은 이후 처음으로 발열(發熱)과 오한(惡寒)을 겪
어야했다.
"계, 계속해요...!"
아버지의 눈에는 물기가 고였지만 이를 악물고 다음 말을 이었
다.
"독은 동물에서 얻을 수도 있고, 잡풀에서 얻을 수도 있다. 모
기같이 미세한 놈에게서 얻을수도 있으며 흔히 굴러다니는 돌
멩이에서도 얻는다. 얻는 방법을 따지자면 한량없지."
아버지는 흑살무사의 머리를 잡고 작은 나뭇가지로 이빨 안쪽
을 힘껏 눌렀다. 그러자 시꺼먼 독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독액을 손가락에 묻혀 비벼댔다.
"독은 약의 반대다. 즉 인체에 해로운 변조(變調)를 일으키는
것, 그게 독이다. 이놈의 독은 지금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
다. 더욱이 이 독액 일 푼에 우각(牛角) 사 푼, 선령초(仙靈
草) 오푼을 섞어 복용하면 황달을 순식간에 고칠 수 있다. 그
럼 이것은 독인가, 약인가?"
기운을 잃어 축 늘어진 흑살무사를 한쪽 구석에 던져 버렸다.
"독을 규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종류를 따질 수는 있단다.
부시독(腐屍毒), 장기독(臟器毒), 혈액독(血液毒),신경독(神經
毒), 효소독(酵素毒).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은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우선 신경독부터...인후, 위, 장에 극통과 균
열감이 생길 게다."
아버지는 약봉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는 죽통(竹筒)에 분말을 틀어 넣었다. 그리고 죽통 한쪽 끝
을 단비하의 코에 이어 놓은 다음 힘껏 불었다.
"헉!"
절로 나오는 헛바람.
흰 분말은 코 점막을 자극하고 목구멍을 막았다. 충격에 머리
가 텅하니 울렸다.
"독가시치의 등, 배, 뒷지느러미에서 추출한 독이다. 신경독의
특징은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로 독성이 매우 높
다. 오감(五感)에 의한 감지(感知)는 불가능하지만 분광기(分
光器)를 사용하면 탐지할수 있다."
파악!
"크윽!"
다시 터져 나오는 비명, 어깨 살점이 한 점 뭉턱 베어졌다. 발
끝까지 저려 오는 고통은 소도의 날이 무딘 탓이다. 살을 으깨
며 베어 냈기에 아픔은 더욱 컸다. 톱으로 써는 느낌이랄까!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릴 때, 독가시치 독은 가슴을 후벼 팠
다. 솜털까지 곤두설 정도로 괴로웠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렀고, 전신에서는 끊임없이 땀이
배어 나왔다. 물에 빠진 생쥐보다 흉한 꼴이었다.
마지막 숨 한모금을 들이 쉬었다.
정신이 편안해지며 새처럼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독가시치독의 끝인가? 천상낙원(天上樂園). 희한하게도 참을수
없는 쾌감이 다가왔다. 마음에도 육체에도...
단비하는 배설물로 바지를 적셨다는 사실도 몰랐다. 고통속에
쾌락이 가져 온 부산물이었다.
"참아야 한다. 내성을 기르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력(精神力)뿐
이다."
저 멀리 딴 세계에서 울리는 듯 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
고 청량하다 못해 싸한 기분까지 드는 단약이 입에 물려졌다.
약기운은 식도를 타고 내려와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
다.
독가시치독이 해소되면서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어둠을헤치고 들어온 한 줄기 빛이라고 할까! 공기가 너무 시
원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던 피도 멈췄다. 살점이 베어진 어깨에서는
짜릿한 전율이, 전과는 분명 틀린 고통이 느껴졌다. 단가 고유
의 금창약(金創藥)을 발라 준 듯 했다.
"허억! 헉...!"
단비하는 천리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것처럼 지쳤다.
이것이 정녕 독이 주는 고통이란 말인가.
아버지는 한시도 짬을 주지 않고 다음 독을 집어 들었다.
혹여 당문기찰 무인에게 발각된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이 벌어질 것이다.
"신경독은 반드시 연무(煙霧)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면서
도 하독(下毒)할때 연기는 물론 냄새도 나서는 안 된다. 그게
어렵다. 이 모든 점에서 독가시치독은 신경독 서열 일이위를
다투는 맹독이다."
독이 준 고통, 소도에 베어진 상처.
앞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독가시치독에 당할 염려는 없으리
라. 무색무취의 독이나 초기 증세만으로도 어떤 독인지 금방
알수 있을 정도 그만큼 고통은 지독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부귀해졌을 때 천했던 시절을 잊기 쉽고, 안락해졌을 때 고초
겪던 시절을 묻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몸에 잔흔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상처를 볼때마다 언제 어디서 얻은 상처인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소도로 아픔을 주고 잔흔(殘痕)을 남긴다.
도흔(刀痕)이 몸에 남아 있는 한,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밖에 한가지 효능이 더 있었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인간은 삶의 불길을 스스로 꺼뜨린다. 자
살하고 싶은 충동, 그 시점에서 색다른 고통이 밀려오면 잠시
나마 모든 신경이 새로운 아픔에 밀집한다. 꺼지려는 불길을
잠시나마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했다. 복용시키는 분량, 체력,
체질, 의지, 삶에의 집착...
이백 일흔 다섯 가지의 독 그리고 그 수만큼의 해독약을 복용
하고 배웠다.
"네 몸은 이미 독에 대해 면역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 일반적인 독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한
번 독에 중독되면 웬만한 해독약으로는 치유할수 없다. 면역성
은 독이나 해독약이나 마찬가지로 작용하니까."
흰알광대버섯을 내놓으며 하신 말씀이었다.
"해독약에는 세 가지가 있다. 보통 일해(一解), 이해(二解),
삼해(三解)라고 한다. 가벼운 독은 시일이 오래 걸리더라도 일
해를 써야 돼. 삼해를 쓰면 바로 해독이야 되겠지만 나중에는
약이 듣지 않게 된다."
독버섯을 복용했다. 아무 증세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 독물이라 잠복기를 거쳐야 발작한다. 설혹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아 독이 발작하더라도 지금 정도의 상태
라면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들었다 깨어나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당문에 대한 주의 사항을 잊지 않았다.
"당문을 과소평가 하지 마라. 당문이 가진 독은 네가 견식한
독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치명적인 독들이다. 반항할 시간을
주지 않는 독, 중독되는 즉시 절명하는 독이 허다하다. 그 중
에서도 당문이 자랑하는 십대절독(十大絶毒)은...서열 일위는
단연 무형지독(無形之毒)이다.
냄새도 맛도 형태도 없다. 전개되는 즉시 죽는다. 문주만이 가
지고 있고, 시전 방법 역시 문주만이 안다. 서열 이위는 투골
독(透骨毒)..."
동녘이 밝아올 무렵 단비하는 혼절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땀을 철철 흘리며 당문의 대문을 두들겼다.
"이놈아, 목간에서 자는 놈이 어디 있냐?"
단비하는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성에 정신을 차렸다. 목욕
물은 이미 차디차게 식어 있었고, 날이 저물어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밀려들었다.
몸에 거미줄처럼 자리한 도흔. 제 살색과 구분할수 없을 정도
로 희미한 자국이었지만 단비하만은 뚜렷이 구분할수 있는 고
통의 흔적.
픽, 하고 쓰디쓴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잊고 싶은 순간들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떠오르다니.
"멍청한 놈,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꾼 게냐?"
사마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꿈쩍도 하지 않는 놈이 궁금해
서 목간까지 찾아온 모양이다.
"씨이! 멍청한 놈이라고 부르지 마. 나는 타락방자란 말야. 다
른놈 같으면 몇 대 쥐어박았겠지만...한번 봐주는 거야."
단비하는 눈을 흘기며 몸을 일으켰다.
나무판자 사이로 무심한 별빛이 흘러들었다.
당철휘와 한연지는 용호투(龍虎鬪)와 원홍주(元紅酒)를 먹는
중이었다. 용호투의 용(龍)은 세 종류의 독사와 독을 뺀 삼삭
선사(三索線蛇), 백화사(白花蛇)였고, 호(虎)는 광동(廣東) 지
방에 사는 너구리의 일종이었다. 몸이 따뜻해지고 정력에 좋다
고 널리 알려진 음식.
"히히히! 같이 앉아도 돼?"
단비하는 승낙도 받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맑은
호박색의 원홍주를 들어 단숨에 마셨다.
"캬아! 좋다. 나, 이것 좀 더 사주라."
단비하의 눈은 한연지를 향했다. 어떠한 색깔도 담지 않은 어
린아이의 맑은 눈동자,
"네 음식은 방안에 갖다 놓았다. 들어가서 먹어라."
한연지는 어린아이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한때는 선망의 대
상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로 보였지만 지금은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로만 보였다.
"싫어, 나도 여기서 같이 먹을거야."
"안 들어 갈거야!"
"알았어. 들어갈게 화내지 마."
단비하는 싸늘하게 변한 한연지의 얼굴을 보고 풀죽은 음성으
로 말했다. 그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이층 계단을 올라가
기 시작했다.
"후후후! 그래도 사내라고 한(韓) 매(妹) 말은 잘 듣는군."
한연지는 당철휘의 비웃음을 못들은 척 술한잔을 들이켰다.
그때였다.
히히힘! 푸덕! 히히힝...! 두두두...!
객잔 뒤켠에 있는 마굿간에서 요란한 음향이 들렸다. 일제히
광란하는 말, 적어도 십여 필이 일제히 우리를 박차고 뛰쳐 나
가는 소리였다.
쉬익! 쉭! 쉬이익!
당철휘와 한연지, 그리고 사마전은 동시에 신법을 펼쳤다. 객
잔 마굿간의 말들은 전부 투숙한 손님들이 타고 온 말 그렇다
면 자신들이 타고 온 말들도 이상이 생겼을 터였다.
"어! 저, 저거..."
사마전은 오랜 세월 무림을 떠돌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
다. 꼬리에 불붙어 마구 날뛰는 말 두 필, 어두컴컴한 밤에 불
붙은 말들이 날뛰는 광경은 아름답기조차 했다.
"저, 저건 선상에서 만났던 소저가 샀던 말인데..."
갈색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 자신이 골랐던 말이기에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 말뿐 아니라 야생녀가 샀던 말 다섯 필
이 모두 보였다.
"말들을 잡아!"
객잔 주인은 점소이들과 함께 날뛰는 말들을 잡느라 동분서주
(東奔西走)했다. 원인은 곧 밝혀졌다. 단비하가 마굿간 안쪽에
서 손에 횃불을 든 채 걸어나왔기 때문에...
"이놈아,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객잔주인은 단비하의 멱살을 잡아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씨이! 왜 이래! 전에 저놈이 나를 걷어찼단 말야."
"뭐?"
"정말이라니까. 봐, 아직도 아파서 죽겠는데..."
단비하는 웃통을 열어 말에 걷어챈 자국을 보여 주었다.
중인들은 너무 기가 막혀 할말을 잊었다. 성난 점소이들이 일
제히 달려들어 뭇매를 주었지만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
이 순간 당철휘의 눈가에는 시퍼런 살광이 솟구쳤다.
"그만!"
모골이 쭈뼛해지는 살음이 터져 나왔다. 사마전이 일갈을내지
른 것이다. 그냥 놔두면 몰매를 맞아 죽겠기에,
"말을 타고 온 소저는 어디 있느냐?"
소란으로 마을 전체가 들썩이는데 말 주인이 나타나지 않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어 한 말이었다.
"어이구!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까? 다행입니다. 송장 치우는
줄 알았네."
객잔주인이 오히려 반색하며 반겼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말도 마십시오.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나타났는데..."
사마전은 객잔주인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자 신형을날렸다.
아무래도 독에 중독됐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연지는 당철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신형을
날려 안으로 들어갔다.
"죽일 놈의 새끼. 다된 밥에 코를 빠뜨려?"
퍼억!
당철휘는 쓰러져 있는 단비하의 몸에 일퇴(一腿)를 날렸다.
하지만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인사불성 상태였으니
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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