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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독접(毒蝶), 왼손과 오른손의 차이
( 一 )
이른 새벽, 눈을 뜬 당철휘는 새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극히 만족스러운 욕정올 채워서인지 몸이 날듯 가뿐
했다. 갈홍아가 무산삼괴를 찾아 떠났다는 말에 한연지나 사마
전이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편한잠을 자게 했다.
무애곡이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독지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
지만 개의치 않았다. 독제실에서 약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
만한 노력을 기울이는지 본인보다 잘아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언제나 완벽한 해독약을 만들어 내던 독제실에서 이번만은 자
신 잃은 음성을 흘려 냈다. 조금은 도움이 될 거라는...그 정
도면 충분했다. 해독약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혀 염려하지 않고 단잠을 잘수 있었던 원인은 단비하, 그놈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든지 몸으로 부딪칠 단비하란 놈이
있잖은가,
'오늘은 견본(見本)만 채집하면 된다.'
만채실에 소장할 한마리와 독제실에 두마리, 제사실(第四室)인
수독실(修毒室)에도 한 마리 줘야 한다. 그리고 중원에 첫나들
이를 한 기념으로 한마리 그렇게 다섯 마리만 잡으면 된다.
잡을 사람은 단비하, 멍청한 놈은 죽을지 살지 모르고 독접을
잡아 올 것이다. 그 다음 독접 무리를 멸살시키는 것은 여반장
(如反掌)이었다.
'오늘은 좋은 일만 있을 것 같군.'
당철휘는 힘껏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예
감은 방문을 여는 순간 어처구니 없이 깨지고 말았다.
독 오른 살무사처럼 고개를 빳빳이 곤두세운 한연지가 점소이
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매, 무슨 일이 있소?"
한연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냉막하게 말했다.
"단비하 그놈이 없어졌어요."
"뭐요?"
점소이들은 한연지의 신경이 당철휘에게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필요없는 인간을 왜 데려와서는..."
한마디 내뱉은 한연지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객잔 문을
밀쳤다.
'단비하, 이 인간이 정말...'
당철휘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는 사마전이 얄미웠다.
"사마전, 당신은 지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오?"
"..."
사마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찐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마전!"
순간, 사마전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지며 비연약파(飛燕躍波)
의 신법으로 면전에 내려섰다. 어느새 검집에서 뽑혀져 나온
검은 목덜미에 겨눠지고...
"당철휘, 네놈더러 함부로 부르라고 지은 이름이 아니다. 앞으
로 이름뒤에 대협이란 말을 꼭 넣어라. 풋내기 알아 들었나?"
사마전은 표정없는 얼굴로 또박또박 말을 끊었다.
"후후후! 사마전이라고 부른 것이 기분 상했다 이건데..."
당철휘는 목덜미에 닿은 검을 오른손으로 살짝 밀어 냈다.
그리고 번개같이 몸을 붙여 가며 비폭십팔수를 풀어 냈다.
타타탁...!
환상처럼 어우러진 양손이 무수한 그림자를 그려 냈다. 그림자
는 정확히 요혈을 노리며 짓쳐 들었다. 극단의 빠름과 변화였
다. 그런데.
"타앗!"
사마전이 일갈을 토해 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몸을 우측으로
약간 비틀고 천중(天中)에 떠서 지상으로 비스듬히 일검을 내
리 그었다.
"헉!"
당철휘는 헛바람을 토해 내며 화들짝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서
고 말았다. 과연 한연지의 예측은 정확했다. 암기나 독을 사용
하지 않고 짧은 거리에서 싸운다면 승산은 사마전에게 있었다.
"이제 그만하지. 사마전...네 솜씨 잘봤다. 하지만 그 정도로
는 아직 멀었어. 시험해 볼까?"
당철휘는 빙긋이 웃음을 머금으며 추혼전을 꺼내 들었다. 웃음
속에는 너 정도라면 얼마든지 자신있다는 의미가, 반드시 무릎
을 꿇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깃들여 있었다.
비폭십팔수는 암기를 사용하기 위해 만든 수공(手功).
거리를 두고 암기를 사용한다면 누구든지 상대할 만했다.
더욱이 품속에는 폭우빙혼통까지 숨겨져 있으니 죽이려 마음만
먹는다면 사마전은 죽은 목숨이었다.
"...!"
한참 동안 노려보던 사마전은 말없이 검을 물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찐빵을 집어 들었다. 검을 휘둘렀다면 약간의 흥분이라
도 남았을 터이고 쉽게 식사를 할수 없을 텐데 그는 태연했다.
애당초부터 싸움 상대라고 여기지 않은 듯 했다.
"으음...!"
사마전은 극히 미미한 신음을 토해 냈다. 자신이 이긴 것 같은
데 개운치 않았다. 꼭 죽여서 맛이 아니라 굴복시킨 것 같으면
서도 자신이 진 것 같은 느낌.
당철휘는 추혼전을 곱게 갈무리했다.
하나를 배웠다. 앞으로 무공을 전개할때는 반드시 명줄을 끊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당문에서 무공을 연습할 때는 배울 수
없었던 실전 감각이었다.
당철휘는 말없이 문밖을 나섰지만 사마전이 가늘게 웃고 있다
는 것은 알지 못했다. 미친 망아지처럼 댓바람에 일검을 전개
한 것이 한연지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음도...자신이 미리 예측
된 패배의 시련 속에 던져졌음도...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점소이에게 멱살이 잡힌 단비하가
질질 끌려 들어왔다.
쫘악!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한연지의 손이 올라갔다.
"방구석에만 있으라고 했지."
"씨이! 답답한걸...누가 돌아오고 싶지 않았나? 길을 잃었는데
어떻게 해? 나는 길에서 잠잤단 말야. 씨이! 남의 사정도 모르
고..."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손자국이 선명한 볼을 만지면서 불퉁
대는 단비하. 그는 맞은 것이 억울하지는 앉은 표정이었다.
늘 그랬다. 다른사람이라면 몰라도 한연지에게 만은 어떠한 푸
대접을 받아도 당연시했다.
"네놈 때문에 반나절을 허비했다. 알아들어? 앞으로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있을때는 죽여 버리겠어."
"알았어."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하면서도 용서 받았다는 기쁨에 얼
굴이 밝아졌다.
* * *
볼을 부드럽게 스친 봄바람이 죽음의 골짜기로 스며들었다.
"여기서부터 십 장만 더 가면 혈반사접의 서식지(棲息地)예요.
희한하게도 혈반사접은 범위를 정해 놓고 서식해요. 마치 어떤
제한을 받는 것처럼 결코 무애곡을 벗어나지 않아요."
한연지는 침착한 목소리로 어제 보고 들은 정보들을 일러주었
다. 독에 관한 한 당철휘를 따를 사람이 없었으니 지금부터 모
든 행동은 그의 통제를 따라야하는 까닭이다.
당철휘는 품에서 밀랍에 싸인 단환 한 개와 녹피(鹿皮)로 만들
어진 가죽주머니를 꺼내 단비하에게 건네 주었다.
"단환부터 먹어라."
일순 단비하는 몸을 움츠리며 사마전의 등뒤로 숨었다.
"이거...먹으면 아픈거지? 나 안먹을 거야."
독제실에서 당한 고통이 생각나는 모양인지 파랗게 질린 얼굴
로 고개를 흔들었다. 복용한 독약 중 거의 대부분을 당철휘가
주었으니 그럴 법도했다.
"하하하! 안심해라. 이번 것은 아프게 하는 약이 아니라 아프
지 않게 해주는 약이니까."
그래도 의심스러운지 한연지를 바라보았다.
한연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밀랍을 벗기고 향긋한 내음
이 풍기는 단환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침에 녹은 단환 냄새가
결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향긋하게 전달되었다.
"잘들어. 지금부터 너는 안으로 들어가야 돼, 알았지?"
"혼자서?"
"너 밖에 들어갈 사람이 없거든."
"싫은데..."
그때 한연지가 다가오며 빙긋 웃음을 띠었다.
"그럼 내가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갈래?"
"정말 나 혼자 들어가야 돼?"
"응."
"안에 무서운 거 있구나. 그렇지?"
"아니야. 나비가 있어. 예쁜 나비. 가서 나비 몇 마리만 잡아
오면 돼."
"그래? 그럼 들어갈게 나비는 잘 잡는다."
"다섯 마리만 잡아와."
한연지는 당철휘의 손에서 나비 채를 받아건네 주었다.
"알았어. 내 금방 갔다올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비하는 사곡(死谷)을 향해 뛰어갔다.
정원을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흥겨운 콧바람까지 흘려
냈다.
"피독약(避毒藥)이 잘 들어야 될 텐데..."
한연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단비하의 신상을 염려
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숲속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가는 숨소
리 적어도 이십여 명은 족히 되는 그들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
였다.
당철휘 역시 많은 사람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다. 분명 중원 각
지에서 그것도 몇 명쯤은 혈반사접의 희생물이 되었고 아직 해
약을 개발하지 못한 독문에서 파견한 고수들,
무애곡으로 진입하자니 목숨이 아깝고 혈반사접처럼 가공할 독
을 구경만하자니 속이 쓰리고...
그렇지만 만약 혈반사접을 채집해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벌떼
처럼 달려들어 갈취하려 할 것이다. 숨어 있는 적은 공격할수
없지만 드러난 사람은 아무리 절대고수라도 공격할 여지가 있
으니까.
"당문에서 하는 일에 실패란 있을수 없소."
멀리 있는 사람도 들을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문을
적으로 삼기 싫은 사람은 끼여들지 말라는 선전포고(宣戰布告)
였다. 하지만 그 말은 별로 효과가 없으리라. 혈반사접과 똑같
은 독을 개발할수만 있다면 능히 당문과도 일전을 겨룰 수 있
을 테니까. 특곱으로 급부상 할수 있는 열쇠가 독접에게 있으
니까.
단비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한연지는 당철휘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이듯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피독약의 지속시간은 얼마나 되지요?"
"두시진."
"그 시간이 지나면요?"
"제십칠력과 운명을 같이 하겠지."
"단비하가 성공 할까요?"
"글쎄...성공하겠지."
당철휘 역시 제발 성공하기를 바랬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는
자신 스스로 목숨을 걸고 무애곡으로 진입하는 수밖에 없으니
까. 자신 또한 믿을 것은 해독약뿐, 그렇지만 아무리 해독약이
완벽하다 해도 일단 독에 중독된다는 것은 께름칙한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 당철휘는 해독약의 효용을 채 일 할도 믿지 않았
다. 대책이라고는 단비하가 독접을 채집해서 돌아오는 일뿐이
었다. 그가 죽든 살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소모품
(消耗品)에 불과한 인간이니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독을 알고, 수많은 전투 경험까지 쌓
았던 제십칠력이 몰살한 곳, 그곳에 멍청이 혼자 들여보낸 일
이 과연 잘한 판단일까? 믿는것은 그의 강인한 생명력 뿐이다.
십중팔구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나가는 독제실에서 십여 년을
버텼고, 한달을 넘기지 못한다는 혈뇌옥에서도 살아남은 놈이
니까.
휘익! 휘익 !
그림자 몇 개가 무애곡으로 숨어 들었다.
"들쥐 몇 마리가 날뛰는 군요."
한연지의 입가에는 작은 고소가 매달렸다.
신법으로 미루어 보건대 광서성(廣西省) 대용산(大容山)에서
겨우 독사 몇 마리 주물럭거리는 대용당(大容黨)의 무리들.
당문에서 피독약을 복용한 사람이 들어갔다고 하니까 혹시나
하고 신형을 띄웠으리라.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무애곡에서 혈반사접을 채집하고 멸살하는 것은 당철휘의 몫이
다. 그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두 번째 일은 혈반사접을 만든 독문을 찾는 것 물론 실패해서
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 앞으로 배당된 일이니까.
단순히 후위대 부대주에게 떨어진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가슴에 불꽃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한 야망을 충
족시키려면 당철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승승장구(乘勝長
驅) 자신과 당철휘는 승리의 가도만을 달려야 한다. 물론 당철
휘를 조련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은 예의가 되겠지만...
"독을 전개하세요."
극히 낮은 소리에 당철휘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중독시켜야 돼요. 단, 죽이면 안 돼
요. 중독시키되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능해요?"
"한매, 이 정도 놈들은 독을 전개하지 않아도..."
"만약 혈반사접을 만든 무리가 이 속에 섞여 있다면요!"
당철휘는 말귀를 알아들은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단비하는 산굽이를 돌아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자 신중하게 사
방을 살폈다. 주위의 나무들은 뼈만 남았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말라 죽었다. 바위의 색깔 역시 누렇게 퇴색되었다.
"지독한 독이군."
경망스럽던 발걸음이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당문에서 만든 해독약이란 무애곡 입구에서 채취한 여독(餘毒)
을 채집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진독(眞毒)과 여독의 차이는 천
양지차(天壤之差), 직접 혈반사접과 부딪친다면 무용지물(無用
之物)이기 십상이다.
당철휘가 직접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생명을 걸고 싶지 않았겠지.'
단비하는 변색된 바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서
짜릿한 느낌과 함께 빨간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치잇! 중독됐군. 정말 지독한 독인데...'
여독이 이 정도라면 진독은 들이키자마자 절명(絶命)할 것이
뻔했다. 여독 정도는 몇 시간 정도 버릴 수 있지만 진독을 만
나면 아무리 내성이 강해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피독약(避毒藥)! 허울 좋은 소리다. 독물과 떨어져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꿈이 있다면 바로 피독약을 만드는
것. 호흡기를 통해, 피부를 통해 혈액을 통해 침투하는 독기
(毒氣)를 전부 막아 낼수 있는 피독약.
영원히 추구해야 될 이상(理想)이면서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약이다. 현재 피독약이라고 시중에 나도는 것들은 전혀 쓸모없
는 것들 뿐이고, 당문에서 만들어 냈다는 것도 인체의 저항력
을 높여 주는 역할 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것도 단지 두 시진뿐.
물리지 않고, 들이키지 말고 피부에 접촉하지 않는다. 이것처
럼 확실한 피독약은 없다.
단비하는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될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사방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를 감지하기 위해
전신 감각을 곤두세웠다. 영민한 독접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작은 나뭇가지조차 밟
지 않으려고 노력한 까닭이다.
십 장을 나아가는데 한 시진이 경과했다.
다시 십 장을 가는 데 또 한 시진.
전신에서 솟은 땀이 흥건히 옷에 배어들었다.
젖은 옷을 벗어 버렸다. 곤충들의 후각(嗅覺)은 무척 예민해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를 이십 장 밖에서 맡는 놈도 있다.
땀 냄새까지 배어 있다면...
봄바람이지만 살갗을 스치는 기세가 매서웠다. 소름이 돋고 몸
이 얼어 왔다. 하지만 하나뿐인 생명, 어찌 죽는 것에 비하랴.
알몸에 바랑하나, 나비 채 하나만 들고 걷는 모습이 영락없이
미친놈의 형색이었다.
'응? 사람뼈...'
머리뼈,가슴, 팔, 다리...영락없는 인골(人骨)이 무수하게 널
려 있었다. 흩어진 뼈마디가 없으니 동물들에게 침해를 당하지
는 않은 것 같고 검푸른색으로 변색되었으니 중독사(中毒死)가
틀림없었다.
시신 중에는 얼마 전에 죽은 사람도 있을 터인데 한결같이 뼈
만 남은 것으로 보아 혈반사접의 맹독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무서운 속도로 육신을 부패시키리라. 한줌 부토(腐土)로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삼 일? 하루? 한 시진?
'지금부터인가?'
가급적이면 맞바람을 맞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이동시켰다.
냄새를 조금이라도 덜 나게 하려는 행동이었지만 그러자니 답
답할 정도로 이동 속도가 느렸다.
'응! 이것은...'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인골 한 구, 키가 무척 작은 편에 속했다. 살아 생전 독안(獨
안) 이었는지 눈알 하나는 안구(眼球) 대신 붉은 구슬이 박혀
있었다. 안구는 썩어 문드러졌으되 구슬은 썩지 않고 영롱한
빛을 발했다.
발걸음을 멈춘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고검(古劍) 한 자
루, 갈홍아의 검처럼 호수에 봉황 무늬가 새겨진 검, 검 배에
는 붉은 혈선이 섬뜩하게 음각되었다.
'무산삼괴 중 한사람이겠군. 무산삼괴도 당할 정도였는가.'
붉은 구슬을 집어 바랑 속에 넣었다. 아직도 이름없는 객잔 침
상에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을 갈홍아에게 건네 주기 위해
서...
해독약을 복용시키고 독기를 뽑아 냈으며 내상(內傷)을 치료해
줬지만 하루 아침에 툴툴 털고 일어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 해도 다행이랄까.
설혹 살아난다 해도 정상적인 몸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내공을 잃은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무거운 물건은 들지도 못하
리라, 무엇보다 여인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잃었으니...그만큼
자포독의 독성은 심했다.
유골을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떼어 놓았다. 순간,
휘익! 쉬리릭...!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무애곡으로 들어선 삼 인 그들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단비하가 있는 곳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안돼!'
커다란 경악성이 속으로 되새김 되었다.
푸드덕! 푸드득...!
어디에 있었던가! 하늘을 날아오르는수십 마리의 독접들,
일순, 신형을 날리던 삼 인의 동공이 경악으로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것도 잠깐 곡구를 향하여 질풍처럼 치달렸다.
그러나...
"커억!"
신형을 날리던 한명이 목을 움켜 쥐더니 땅으로 곤두박질 쳤
다. 그는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잠시 바르르 떨더니 축 늘어
져 버렸다.
다른 두명은 동료가 죽었는데도 쳐다볼 틈 없이 신형을 날렸
다. 자신들보다 뛰어난 독술의 명인(名人)들도 힘없이 죽어 간
사곡을 겁없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수 없다는 진리가 어김없이 통용되었
다. 그들은 채 이 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으윽!"
"크윽!"
두 마디 단말마를 끝으로 볼품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잠시
바둥거렸지만 철없는 몸부림일 뿐.
단비하는 혈반사접이 떠오르는 즉시 호흡을 멈추고 눈을 감았
다. 여독으로 충분히 파악한 독성은 날개짓 몇 번으로 치사량
(致死量)을 만들어 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모한 삼 인
덕분에 혈반사접이 있는 곳을 파악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자칫했으면 맞부딪칠 뻔했으니까.
바랑에서 꺼낸 헝겊을 물에 적셔 코와 입을 막았다. 아무리 내
공을 운용한다 해도 장시간 호흡을 멈출수 없고 분진(粉塵)이
가라앉으려면 최소한 일 각은 필요했다.
"크윽!"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물수건으로 직접적인 흡입을 막았지만 그래도 내부로 들어온
독은 숨통을 막았다. 손을 치우고 마음껏 공기를 마시고 싶었
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독천살 당운담은 잔인한 성격...'
단비하는 애써 다른 일을 기억해 냈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될 수 있는 한 처절한 과거일수록 효과가 있을 것이다.
삶의 의욕이 불타 오를 테니까.
'단가, 엄가, 부가의 자손들은 알게 모르게 끌려왔다. 그리고
실험대상으로 전락했지 해독약을 실험한다고 독을 복용시키고
증세를 파악한다고...'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육체적인 고통과 살려는 의지 간의
싸움이 무섭게 들끓었다.
일 각이 지났을 무렵 단비하는 물수건을 치우고 맥없이 늘어졌
다. 쏟아진 땀방울이 갓 목욕을 한사람처럼 흘러내렸다.
'위험했다.'
독접에 당한 삼 인은 마치 부시독에 당한 사람처럼 썩어들었
다. 이미 형체를 분간할수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 발견된 촌로의 시신은 죽은지 나흘이나 경과했다. 푸른
시반(屍斑)과 더불어 열꽃처럼 돋은 붉은 반점이 뚜렷한 색조
를 잃지 않았고...마치 손으로 만지면 붉은 물감이 묻어날 듯
선명했다고 했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을 정도로 탈진한 단비하는 체력을 회
복하면서 혈반사접에 대해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종합했다.
'그런데 저들은 죽은 지 일 각 만에 시신이 부패하고 있다. 그
렇다면...무서운 일이다. 혈반사접은 시간이 지날수록 독성이
강해진다. 종래에는 날갯짓 한번에 십여 명을 죽일 수 있으리
라.'
당문을 떠나올 때 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단비하는 피식 웃으며 손에 든 나비 채를 던져 버렸다. 신경독
과 부시독을 혼합한 독접분(毒蝶粉). 이까짓 가는 망사(網絲)
로 뭘 어쩌겠다고.
'혈반사접을 채집할 방도는 없다. 죽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기력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돌아오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안전(安全) 지대(地帶)까지의 거리는 겨우 삼십 장
이지만 천 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발걸음이 느닷없이 안쪽으로 향해졌다. 그도 독문에서 자란 사
람 혈반사접의 서식지가 어디이며 몇 마리나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조심해서 이동하면 독가루 공세는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장을 더 나아가 독접이 날아오른 큰 바위 결에 이르렀을때
뼈만남은 여덟 구의 시신이 드러났다. 곡구(谷口)에 있던 많은
시신들과는 어쩐지 조금 달라보였다. 친근감이랄까!
'제십칠력이군.'
인골 사이에 떨어져 있는 묵빛 죽통 한 개가 그들의 신분을 증
명해줬다. 탈혼망, 당문에서도 이십여 명만이 소유한 절정 병
기 독제실에서 몇 번 견식한 적이 있는 병기가 아니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탈혼망을 집어 들었다. 순간
'헉!'
단비하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입 밖으로 쏟아지려
던 경악성을 간신히 안으로 삼켰다.
기다란 더듬이를 휘저으며 공기의 파동을 감지하는 혈반사접.
아아!
수십 마리가 아니었다. 수백 마리도 넘었다. 수백 마리의 나방
들이 뒤엉켜 교미(交尾)를 나누는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귀기스
러웠다.
교미를 마친 수컷은 곱게 날개를 접었고, 암컷은 수컷의 등에
산란관을 박았다. 그리고 통통한 배를 움찔거렸다.
'수컷의 몸에 산란을 하다니...'
수컷은 잠시 움찔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숙명처럼 받아들
이는 죽음 하지만 다음에 태어나는 독접들은 자신들보다 더욱
가공한 독을 지니고 태어나리라.
'마, 말도 안돼. 이건 꿈이야.'
단비하는 호흡을 멈추고 땅에 바짝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
다. 조금이라도 움찔거린다면 독접 수백 마리가 자신의 몸에
산란할것 같았다.
이윽고 산란을 마친 암컷은 축 늘어졌다. 암컷 역시 붉은 눈알
을 몇번 굴리더니 날개를 곱게 접었다. 죽은것이다. 단 한번
교접을 끝으로 죽는 나방들.
죽지 않는 나방도 있었다. 보통 혈반사접보다 조금 더 큰 나방
수십마리는 사방을 에워싸고 움직이지 않았다. 당문을 철통같
이 경비하는 후위대원들처럼...
'독에 중독되고 있다. 제기랄...!'
조금씩, 조금씩 체내에 축적되는 독접분, 호흡을 막았는데 어
디로 들어온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급하다 해도 지금 움직일
수는 없다. 혈반사접의 촉각에 걸린 이상 시신처럼 가만히 있
어야한다. 호흡이나 체온이 감지된다면 그순간으로 끝이다.
- 중원에 있는 나방은 모두 이십만 종(種). 크기는 종류에 따
라 차가 심하고 나비와는 더듬이로 구별한다. 더듬이 종류는
실 모양, 톱니 모양, 빗살 모양, 양빗살 모양, 섬모 모양, 깃
모양...나방은 주로 야행성이지만 뿔나비나방이나 잠자리자나
방, 황나방각시의 일부는 낮에 활동하며 날개를 세우지 않는
다. 저녁 무렵 활동하는 박각시류도 일부있다. 주로 봄부터 가
을까지 활동하나 겨울자나방과 같이 겨울에만 볼수 있는것도
있다.
나방에 대한 모든 지식이 총동원 되었다.
혈반사접은 낮에 활동한다. 겨울에 나타나 지금까지 건재하니
계절을 타지 않는다. 더듬이는 기존 어느 나방과도 닮지 않았
다. 끝이 뾰족한 구절편(九折鞭) 같은 형상이다.
단비하는 내기(內氣)를 밀집시켜 호흡과 모공(毛孔)을 닫고 기
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인내(忍耐)의 싸움.
밤이 깊어 삼경(三更)에 이르자 더듬이를 휘젓던 혈반사접 일
부가 날개를 수평으로 편 채 잠잠해졌다. 곧 이어 한마리 한
마리 더듬이를 움직이지 않았다.
단비하는 십칠력의 인골에서 발가락 뼈 두개를 조심스럽게 집
었다.
그리고 일 척 앞에 죽어 있는 수컷을 향해 조심스럽게 기었다.
이윽고 지척에 이르자 발가락 뼈를 젓가락처럼 잡고 살며시 손
을 뻗었다.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고 눈은 반딪불처럼 빛났다. 조용히
잠들은 혈반사접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은 수컷 두마리를 채집하여 각기 다른 녹피주머니에 집어넣
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토록 가공할
독성을 지닌 독은 당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 자신
역시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도 손해될 것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에는 뒤로 몸을 뺄 차례였다. 후퇴가 전진보다 어렵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이해할수 없었는데 몸으로 겪어 보니 정말
그랬다.
알몸에서는 비지땀이 흘러내리고 추운 밤바람이 그 위를 스쳐
갔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도중 조금이라도 이상한 직감이 들면 숨을 죽이
고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그 누구에게
나 있는 직감은 눈앞에 드러난 사실보다도 정확할때가 있으니
까.
이윽고 바위 뒤로 몸을 뺀 단비하는 깊고 가는 숨을 토해 냈
다. 동녘에 떠오르는 햇살이 검은 어둠을 밀치는 중이었다.
무애곡에 들어온 지 거의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 동안 곡기
(穀氣)를 접하지 못했지만 배고픈 줄도 몰랐다. 팽팽하게 당겨
졌던 긴장감이 늘어지는 듯했다.
녹피주머니에 담긴 수컷 한마리.
혈반사접은 한 번에 몇 마리나 탄생시킬까. 알을 까고 나오는
시기는 얼마나 걸릴까. 분명한것은 계절이 바뀔 무렵에는 더욱
가공한 혈반사접이 나타날테고, 그 시기까지라면 얼마남지 않
았다는 것.
땀에 젖어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보였다.
밤 이슬에 젖어 축축했지만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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