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주제 폐지론이 구체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할 무렵 'never...'님이 호주제폐지론에 대해 저의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저는, 언젠가는 폐지될 그러나 시급한 문제부터 차츰차츰 개선될 제도라고 원칙적인 대답만 했습니다. 홍대 앞 감자탕 집에서의 일입니다.
그 이후, 그렇게 대답한 것이 꽤나 멋쩍어 각 방송사에서 시행한 관련 토론 프로그램들과 인터넷 신문기사들을 샅샅이 탐독했던 기억이 납니다.
호주제의 찬반여부에 대해 논하고자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아일랜드>를 보다 문득 호주제와 호주제가 안고 있는 태생적 의미에 대해 와 닿는 것이 있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호주제는 가부장적 가족문화로 상징되는 우리의 결혼제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우월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불평등의 원죄를 안고 있습니다. 사실 호주제가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파생돼 나온 건지, 아니면 제도가 생겨난 후에 그러한 사고방식이 조장되었는 지는 전문가적 지식이 부족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결과론적으로는 그리 됐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최근 수구꼴통 딴나라당조차 호주제 폐지론에 찬성한 것을 보면, 이제 우리 사회가 고도 문명사회가 되면서, 제도권 안에서도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가족 구성원의 역할분담론의 변화를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적극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연이 띠동갑 백수 건달 재복이를 같이 살자고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부터 지금껏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결혼의 법칙하고는 거리가 있는 듯 합니다.
재복을 벌어 먹이겠다는 발상자체도 그렇지만, 지 살림 잘 한다고 찾아온 첫날부터 넙죽넙죽거리는 넘이나 가족까지 개무시하며 사내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뇬이나 그다지 평범해 보이진 않습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깁니다.
중아와 국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둘이 연인 사이인지 뭔지 도무지 헷갈립니다. 제가 보기엔 걍 한 대만 콱 쥐어박았으면 좋겠을 싸가지 공주와 맘 착한 보디가드 정도로만 보입니다.
그러기엔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시연의 눈치를 보며 백수건달 사내를 데리고 들어와도 딸내미한테 찍소리 못하는 식구들이나, 늙은 남편이 싫어한다고 아들을 나가라고 내쫓는 엄마도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가족의 절정은 박 사장 가족인데요, 얘길 들어보니 박 사장은 재벌 가문의 사생아인 듯 합니다. 거기다 그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이복형들... 뭐 대충 이 정도는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구도입니다. 근데 그런 이복동생을 죽이겠다고 차에다 폭탄을 설치하고 쾅하고 터뜨린다? 이 정도면 오바가족의 극치입니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그런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습니다
2.
<네 멋대로 해라>가 남성 중심적인 드라마라면 <아일랜드>는 여자들의 이야깁니다. <네 멋...>에서 전경이 한 남자의 진심을 발견하고 그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캐릭터였다면, <아일랜드>에서의 재복과 국은 여성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해줄 줄 아는 캐릭터들입니다.
시연이 재복이를 집으로 끌어들였을 때는 그가 살림을 곰살맡게 잘해서만 아닐 것입니다. 그는 가정에서나 일에서나 찌그러진 하류 인생을 살아가는 시연의 마음을 보다듬을 줄 알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에로배우라는 음지에서 벗어나 예전처럼 대중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되길 원하는 시연은 지치고 힘들 때 자기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녀는 어린천사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겁니다. 그런 그녀를 알아주는 게 남자가 바로 재복입니다.
재복의 인생은 스스로 밝힌대로 쓰레기 그 자체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내면의 배려심으로 상대를 끌어당기는 남자입니다.
재복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남자라면, 국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감싸안을 줄 아는 남자입니다.
그가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를 내쫓은 새아버지에게 고등어를 선물했다면, 국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헤아릴 줄 알기에 늘쌍 어리광만 부리는 박 사장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했으며,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인정옥 작가에게 있어 죽음이란 필연인 것 같습니다. 죽음은 때론 사랑을 가로막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IRA단원인 오빠와 양부모가 살해당하는 순간, 중아는 가족을 부인해야만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섭니다.
살아남기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부정하는 사람의 심정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고 이 땅에 홀로 남은 사람의 심정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알란 J. 파큘라 감독의 <소피의 선택>에서 소피(메릴 스트립 分)는 나치군인에게서 두 아이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며, 가스실로 보낼 아이를 선택하라고 강요당합니다. 소피는 피눈물로 절규하며 딸 아이를 선택합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그 순간 소피는 가스실로 보낼 자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중아 역시 그 순간 자기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부인한 것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녀가 서울에 온 것은 죽으러 온 것입니다.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일랜드에서 가족을 부인했던 순간 그녀는 자아를 상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죽는 것 역시 마음 먹은 대로 되질 않습니다. 죽을 때 추울까봐 목도리까지 준비했지만, 더워서 죽질 못합니다. 죽을 려면 그 때 죽었어야 했습니다. 가족을 부인하지 않고 죽었어야 했고, 오빠에게 총을 건네 주고라도 죽었어야 했습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족하고 행복하게 살던 시절로만 돌아가고 싶습니다. 취해있어도 깨어있고, 살아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기댈수 있는 남자는 국 뿐입니다. 국은 강한 남자입니다. 그러나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가 필요하고 또 서로가 좋습니다.
이제 그들의 운명으로 얽힌 사랑이야기가 가족이라는 운명의 전제하에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무엇이 실타래처럼 엉킬것인지, 무엇이 하나하나 풀려나갈 것인지, 또 그 운명이란 것은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기대해 봅니다.
3.
두 여자 주인공의 스타일을 보면 볼수록 인 작가를 연상케 됩니다. 인 작가님을 직접 만나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두 여자의 스타일 완전 인 작갑니다. 전작에서 전경 캐릭터 설정을 위해 스타일리스트들이 인 작가 스타일을 베겼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완전 판박입니다. (착각인가... 암튼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쩝...)
중아의 히피적인 매력도 그렇고, 생기발랄하지만 일면 어두운 그림자를 지닌 시연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국에게 술주정하는 박사장의 모습까지 인정옥 그대롭니다. 너무 인정옥스럽습니다.
'파자마'님의 글을 보니까, 게중에 몇몇 사람들이 불란서 영화속의 캐릭터를 표절했다는 소리를 하나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경에 이어 이번 인물들도 너무 인정옥스러워서 쪼금 식상할랑 말랑(?)하는데, 다른 캐릭터를 베겼다고 소리를 들으니까... 우숩습니다... 그 얘기 인 작가가 들었다면 혼자 백세주 나발불면서 낄낄거리고 있을 겁니다.
......
저는 청순 글래머 송혜교를 좋아합니다. 깜찍발랄 김정은도 좋아합니다. 귀엽고 섹시한 비도 좋아하고, 로맨틱한 박신양도 좋아합니다. 물론 어눌하지만 퍼펙 액터 동근이와 머슴아같지만 착한 이나영도 좋아합니다. 전 누가 나왔다고 드라마를 보고, 아니라고 안 보는 성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아깝기도 합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이나 한숨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뭐 대단한 개똥철학을 갖고 그러는 게 아니라, 30년 넘게 드라마를 봐 보니 그 얘기가 그 얘기기기 때문입니다. 그냥 처음부터 못 보고 중간에 봐도 얘기가 뻔하고 중간 중간 빼먹고 봐도 결론은 빤합니다. 게중엔 좋은 드라마도 있겠지만, 평소에 관심이 적으니 소 뒷걸음질 치다 밟히는 거 아니면 걍 전부 똑같이 보입니다. 제게 있어 드라마는 화장실에 들고 들어가는 잡지책이랑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다. 드라마가 꽉 차있습니다. <네 멋...> 때도 그랬지만, 작가가 한 대사 한 대사 한 장면 한 장면을 혼신을 다해 채워놓는 것이 느껴집니다.
때론 공백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저같이 저 사람이 왜 저런 말과 행동을 하나 그 공백을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숨 쉴 공간이 있습니다. 허나 그 공간들이 핵심 스토리를 제외하면 그냥 허당인 드라마라면 상상하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인정옥 작가는 드라마 대본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소모적인 자극의 편린들을 쓸어버리고, 마치 한 편의 레제 시나리오처럼 한 문장 한 문장 강한 의미를 부여하며 적절한 호흡과 운율에 맞춰 대본을 써나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결코 드라마를 보고 있는 시청자의 소중한 시간들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전 이런 드라마... 시청료 별도로 내라면 내고라도 봅니다.
오늘 3부 또 열심히 보겠습니다.
1) 'never...님'이라... 호형호제(?)하는 사이끼리 님이라 하니 어색어색...ㅋㅋㅋ
2) 근데 마지막에 재복이는 왜 눈을 부라리며 그럼 1년 뒤에 다시볼까 이런겨? 또 뭐가 크다는 거지? 글구 누가 영화판에서 놀다 온 사람 아니랄까봐 드라마에 모티브가 너무 많아... 동전, 하프, 머리 위에 눈... 아 대구리에 바퀴벌레 들어갈라 그래...
첫댓글 명은님 글과 전혀 상관없는 댓글이지만 수구꼴통 차떼기당 버러지들이 호주제 폐지를 찬성한 것은 그것들의 근본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더 버티면 안될 것 같으니까 마지못해서 한 선택 같습니다.국가보안법이 존재의 이유라도 자기들 입으로 밝혔으니 이참에 함께 없어지면 될 것 같은데...
아하하하 호형호제!! 보구잡소 형 ㅋㅋㅋㅋ /근데 나랑 호주제 야그를 했소 험험 기억이...
↑ 지가 대통령 누구 찍었냐 하고 호주제 폐지 어떻게 생각하냐구 물어놓구선... 쯧쯧 설마 누구처럼 술 한잔 걸치면 아무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징? ㅋㅋㅋ
아....... 전 이명은님"을 만나고 싶습니다...+_+
명은님의 절묘한 글때문에 네멋에 더 많이 빠졌다고 하면 오반가요?...후후^^...근데, 아일랜드까지 이러시면...- -;;;.....좋쿠로...^^;..계속 기대할께요...^^
이명은 님의 글 오랜만에 보니까,,정말,,전에,,예전에 우리 "네멋"에 첨 미쳤을때,,그때가 떠오르네요,,그때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그냥 이것저것 재지 않고,,하나에 미쳤던 그때가 좋았는데,,,"아일랜드"는 잡생각이 많아져서.....
재밌게잘읽었어요.저도이드라마넘좋아요.근데이런생각못하고좋았는데.직선적인표현과엉뚱한발상과슬픔을간직한대사와연기...조금의억지도는 있지만....이글읽고더재밌게드라마볼것같네요
딴 얘기인데요..^^; 소피의 선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화 몬스터가 생각나면서.. 그리고 호주제에 관해서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아니 16세기 조선중기까지만해도 정치면을 제외한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남녀는 평등했습니다. 임란,호란 이후에 성리학적 질서가 강조되면서 가부장적 지식이 팽배해지고,
식민지 시대에 일본놈들이 이상한 법을 하나 만들어서 그렇죠. 고려시대에는 여자도 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남자와 진짜로 보듬을 줄 아는 남자. 아하~ 하고 무릎 쳤슴다. 그렇군요~
아. 좋아요. 삶과 사랑에 대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참 좋아요. 좋은 글...
아일랜드가 .....명은님의 글이.... 정말 행복하게 만드네요...
너무 반갑네요. 다시 나타나신 명은님. 명은님 글 발견즉시 프린트했습니다.ㅎㅎ....
"<네 멋대로 해라>가 남성 중심적인 드라마라면 <아일랜드>는 여자들의 이야깁니다"음..이렇게는 생각못해봤네요~~^^좋은글 잘봤습니다~~글구 <소피의 선택> 무지 보고싶어졌어요~~!!
um...um.....
아일랜드..친구랑 아주 열심히 이야기 하며 보고있습니다..네멋도 좋아했지만 아일랜드도 정말 좋네요
살아 있었구나...나 딸 낳았다...알고는 있는지...원!
역시 아일랜드가 시작되니, 다시 걸음을 하시네여... 자꾸 드라마를 해체하고 , 분석하는 버릇 버리세여... 건강에 해로워여. 읽고 있는 우리야 아하 이렇게두 생각할수 있구나 하구 감탄하긴 하지만... 나중에 또 이름 검색해서 글 읽을 생각하니, 벌써 즐겁네여.아일랜드보는대신 님의 감상평으로 대신할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