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개방(盧蓋邦.1563.명종 18∼1592.선조 25)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경상북도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 출생.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유한(維翰). 아버지는 노일(盧馹)이라고 전한다. 부인은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이경옥(李慶沃)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시 병과(丙科)에 24위로 급제하였다. 고향인 밀양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자청하여 동래부(東萊府)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봄 부모를 뵈러 밀양에 가 있던 중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동래읍성의 <남문비기(南門碑記)>에 따르면 노개방은 동래성이 왜군에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양에서 급히 돌아와 동래향교로 달려갔으나 동래향교에 봉안되어 있던 위패들은 이미 동래성 정원루(靖遠樓)로 옮겨진 후였다.
이에 노개방은 정원루로 가 위패 앞에 예를 올린 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항거하였다. 이윽고 동래성이 함락되자 노개방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부인 여흥 이씨도 밀양에서 자결하였다.
사후 동래성에서 항전하다가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을 비롯하여 여러 충신들의 충정을 기리고자 세워진 옛 송공단(宋公壇) 터에서 1709년(숙종 35)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1736년(영조 12) 동래의 충렬사(忠烈祠)로 옮겨 배향되었다.
1742년 현재의 송공단(宋公壇)이 세워지면서 노개방은 북쪽 제단에 배향되고, 그의 부인인 여흥 이씨는 서쪽 제단에 배향되었다. 또한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고,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송공단에 노개방 순난비(盧蓋邦殉難碑)가 세워졌다.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노개방(盧蓋邦)의 자는 유한(維翰)이요,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밀양(密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文才)가 있었음은 그의 동학(同學)인 배대유(裵大維)의 제문(祭文)과 조존성(趙存性) 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던 것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피나는 가난 속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끝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 없어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려는 뜻에서 자원하여 동래향교의 교수직을 맡았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174년 되는 해에 동래부사 엄린(嚴璘)이 적은 <동래교수 증도승지 노공 유사기(東萊敎授 贈都承旨盧公遺事記)>에는 노개방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참작하여 가장 완비된 전기를 쓰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노개방(盧蓋邦)의 선대(先代) 사적은 확실하지 않고 다만 <국조과방록(國朝科榜錄)>에서 아버지는 노일(盧馹)이라 하고, 밀양 유림에서 기록한 것에서는 부인이 여흥 이씨(驢興李氏)로 학생 경옥(慶沃)의 딸이며, 그 증조부는 한림(翰林) 태(太) 라고 하였다.
그는 가정(嘉靖) 계해(癸亥), 즉 명종 18년(1563)에 나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래교수로 부임하여 30세에 동래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남문비기(南門碑記 : 송시열이 찬한 사적비로 지금은 부산박물관에 이관 보존 중임)에서도 노교수는 임란 직전에 어머니를 뵈러 밀양에 가 있었는데 난이 일어나 동래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와 향교로 갔으나, 이미 선성(先聖)의 위패를 성중의 정원루(靖遠樓)로 옮겼으므로 통곡하여 성문을 두드렸다.
성문이 열리매 곧장 위패 앞으로 나아가서 예를 올리고 위패를 모셔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았다. 적이 쇄도함에 부사 송상현과 제생(諸生) 문덕겸(文德謙) 등과 같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그 처(妻)도 또한 밀양에서 적을 만나자 남편의 과거 합격증을 안고 벼랑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이상이 노개방에 대한 간략한 인적사항이다. 충과 효와 예는 선비들의 기본교양이므로 이 선비정신을 다 실천하려고 노력한 이가 바로 노교수인 것이다. 미관말직(微官末職)이지만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이러한 그의 충절로 뒤에 그의 사적(事蹟)이 알려지자 도승지에 증직(贈職)되고 동래 충렬사와 송공단에 배향되었으며, 또 향리(鄕里)인 밀양의 중봉서원(中峯書院)에 봉안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노개방 순난비(盧盖邦 殉難碑)】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 송공단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한 노개방(盧盖邦)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조정에서 임진왜란의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한 노개방에게 도승지(都承旨)를 추증하고 동래 충렬사(忠烈祠)와 밀양 중봉서원(中峰書院)에 배향하여 그를 기리고 추모하였다. 1795년(정조 19) 송공단 내에 임진왜란 당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비롯하여 다른 순절자들의 순난비를 세웠다. 노개방 순난비(盧盖邦殉難碑)는 송공단에 조성된 순난비 가운데 하나이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며 크기는 높이 87㎝, 너비 30㎝, 두께 12㎝이다. 송상현 순절비(宋象賢殉節碑) 좌측의 순난비들보다 높이가 높은 편이다. 비에는 ‘노공개방순난비(盧公蓋邦殉難碑)’라고 새겨져 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 시장 내에 있는 송공단에 여러 순난비들과 함께 있다. 송상현 순절비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으로 두 번째, 조영규 순난비 옆에 있다.
임진왜란 시기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송상현과 관련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송공단 내에 순난비들이 세워져 있다.
▲송공단
▲노개방 순난비
[출처] 조선 문신 노개방(盧蓋邦)
[출처] 조선 문신 노개방(盧蓋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