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안침례교회의 역사는 미국 엘라씽기념 선교회에서 파송된 스태드맨(Frederick W,Steadman)선교사가 1898 년에 충남 공주에서 강경으로 이주하여 복음 사역을 시작하므로 비롯되었습니다. 파울링(E,C,Pauling)선교사가 구축한 강경의 선교 사업을 이어받은 스태드맨 선교사는 1898년부터 금강 연안의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1898년 여름에는 스태드맨 선교사에 의하여 임천군 칠산리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해 8월에는 칠산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6명의 새신자들이 금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침례를 받은 장교환, 김치호, 김도정, 최준명, 홍봉춘, 고내수가 칠산 침례교회의 개척 교인들 이었습니다. 이들은 서촌의 당산 밑에 있는 한 집을 사서 예배당을 삼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칠산교회는 그 후 스태드맨 선교사와 장교환, 장기영, 홍봉춘 등의 활약으로 1900년에 인근 지역인 두곡, 입포와 그리고 금강 건너 해안 지역인 용안, 법성, 성광, 웅포, 난포리 등지에 23개의 학습반을 조성했습니다. 이때 용안의 학습반 신자들도 처음에는 칠산교회의 전용 나룻배를 타고 강경과 칠산을 왕래하면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1901년 4월에 엘라씽 기념 선교회의 충청도 선교 사업은 펜윅 선교사에게 인수되었습니다. 이 선교 사업을 인수한 펜윅 선교사는 유능한 한국인 전도자인 신명균에게 공주, 강경, 칠산지역의 선교사업을 보살피도록 맡겼습니다. 1901년에 이 지역의 전도 사업을 관장하게 된 신명균은 이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자라나고 있던 12개의 학습반을 택하여 독자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만들었습니다. 1902년에는 드디어 12개의 학습반을 12개의 개척교회로 발전시켰습니다. 1902년에 조직된 12개의 개척 교회들 가운데 가장 크고 성공적인 교회가 바로 용안교회였습니다. 이 당시 용안은 지역적으로 강경, 군산, 익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요, 금강의 연안지역으로 인구와 물산의 집산지로서 다른 지역들보다 교회 성장의 유리한 여건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902년에 조직된 용안교회는 큰 주택을 지녔던 교우의 가정(교동272번지의 김점용의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정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용안교회 개척과 인근 지역의 복음전도에 가장 크게 활약했던 분이 칠산교회의 장기영 전도인 이었습니다. 그는 용안 인근의 난포리 교회의 개척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05년에는 김희서를 이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1902년에 개척된 용안교회는 1906년에 조직된 이 교단(대한기독교회)의 창립 대화회(강경교회)에서 5명의 초신자들 -한태영, 유내권, 이자삼, 이장운, 장봉이-를 간도, 시베리아의 선교사로 파송하므로 교단 최초의 해외 선교사를 배출한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06년의 교단 창립총회인 강경 대화회에 이어 2차 공주 대화회, 제 3차의 칠산 대화회를 이어 제 4차 교단 총회인 용안 대화회를 1909년에 용안교회에서 개최했습니다. 이것은 이 당시 용안교회가 교단에서 4번째인 교세를 지닌 큰 교회였음을 교단의 역사가 입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4차 용안 대화회에서 본 교단은 장석천, 손필환에게 목사 안수를 하였으며, 용안 인근 지역인 영광, 법성, 무안, 줄포 등지에 활발한 복음사역을 펼쳤습니다.
1910년에는 한일 합방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가 한국 전역으로 뻗어나자 교회들은 핍박과 고난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용안교회는 한찬필감로, 이상로감로, 백남신의 당숙인 백반장, 김순덕집사의 부친인 김정용반장이 교회의 임원으로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이때 대한기독교회는 개 교회 담임목사 제도가 없었습니다. 한사람의 순회목사가 수개 구역의 교회들을 맡아 순회 목회를 했으며, 개 교회는 감로 및 통장, 반장의 임원들이 보살폈습니다.
전북 익산군 웅포면 송천리에서 출생한 김용해는 용안 초등학교 학생 때에 용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34년에는 교단에서 교사로 임명되어 모교회의 목회자가 되었고, 1940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 시대에 용안교회 출신으로 교단에서 활약한 또 한 사람의 인물은 1918년에 교사의 직분을 받은 이현태 교사였습니다. 이현태교사는 이방 선교에 뜻을 두어 중국 길림성에 파송을 받아 10여 개의 중국인 교회를 개척했으며, 1924년에는 방사현교사와 함께 몽골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다 그곳에서 1939년에 장렬한 순교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용안교회의 역사에 남을 또 한사람의 교인은 강요한나 전도인이었습니다. 충남 홍성군 장곡면 화개리에서 출생한 강요한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 1919년에 광천의 화개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1926년에 가족과 함께 용안교회로 옮겨 오면서 강요한나 전도인은 용안교회를 중심으로 강경, 공주, 송천, 함라, 신리, 송담, 나포, 두동 등지로 불철주야 선교여행을 펼치며, “할렐루야 할머니”로 이 교단의 복음 전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1942년 6월에 용안교회의 김용해 목사와 이상필 감로는 신사참배 불복으로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원산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끝까지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한 본 교단에 대한 탄압과 교단 지도자들의 검거로 이때부터 교단은 혹심한 일제의 교회 탄압과 교인 핍박에 직면했습니다.
1944년 5월10일에 일제가 본 교단에 대하여 교단 해체령을 내리자 용안교회의 모든 재산은 총독부에 의하여 국방헌금으로 강제 압수되고, 교회종각도 철거 압수되었습니다. 교회예배는 금지되고 교회재산은 일반인에게 공매 처분되었습니다. 이때 김정용 반장이 몰수당한 교회당 건물을 일제로부터 다시 몰래 사들여 가옥으로 개조하고, 맨 끝방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비밀리에 예배를 계속 했습니다. 이때는 김정용 반장의 집에서 한상필감로, 이윤환집사, 박재봉집사, 김봉국집사, 오봉엽집사 및 약간의 신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1945년 8월15일의 해방은 용안교회에 예배의 자유와 신앙의 생기를 되찾게 해 주었습니다. 일제의 몰수되었던 적산 재산은 정부가 연고자에게 불하해 주자 김용해목사의 노력으로 교동리에 적산 가옥을 불하 받아 예배당으로 개축하여 새로운 교회를 마련했습니다(교동419-3번지). 1945년에 이후 용안교회는 김용해목사의 지도 아래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으며, 1950년에 본 교단이 미국 남침례교와 선교사업 제휴에 주도적 역할을 한 김용해목사가 용안교회를 전담하자 교회는 튼튼한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52년에 김용해목사가 강경교회로 옮기게 되어 용안교회는 이창송전도사(1952-55), 서중선전도사(1956-59), 김현중전도사(1959-61), 오재천전도사(1962-64)가 부임하여 사역하고, 1965년에는 김현중목사가 다시 부임하여 1985년에 오늘의 용안교회의 본당 건축을 완공하고 부흥을 이루어 가던 중 1995년10월14일 교통사고로 소천하였다.
용안교회는 1953년에 창리교회, 1956년에 신은교회를 지교회로 개척했습니다.
- 1997. 12. 28 허긴 박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