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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
「Ⅱ. 통곡의 시대, 일어나라, 조선의 승병들이여!!」
조선을 말할 때 가장 뛰어난 인물둘이 많았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찌리한 임금 선조 때문에 나라는 순식간에 일본군들에게 점령당하고 7년간이나 백성들은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관군과 유생들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어 역할을 못할 때 조선을 지켜낸 이들이 의병과 승병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승병은 유교국가의 희생양 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그 당시 승병을 최초에 일으킨 스님이 바로 서산대사 휴정이다. 단순한 스님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유·불·선을 융화하려했던 학승이었고, 시인이었다. 수많은 자료들이 뒤죽박죽되어 있어서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봤다. 종교를 떠나서 이 나라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터를 있게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도리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서산대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후대에 이르는 이들에게 삶의 책임감과 바른 자세를 일깨워주는 구절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아 더욱 유명해졌다.)
휴정(休靜, 1520년 3월 26일~1604년 1월 23일)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최(崔), 본관은 완산,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이다.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한다.
대사의 탄생에 대하여는 『동사열전(東師列傳)』에 기록이 보인다. 대사의 어머니는 40이 넘도록 자손을 얻지 못했는데, 47세가 되는 하루, 창가에서 졸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노파가 나타나서 「아들을 가진 것을 축하한다」고 하였다. 이래서 중종 15년(서기 1520년)3월에 탄생 하였다. 아버지는 완산 최씨 세창(世昌)이고, 어머니는 김씨였다. 아버지는 시를 잘 짓고 술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는 술을 잘 빚어서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은 다정한 분들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아명이 운학(雲鶴)인데, 이 운학(雲鶴)이라는 이름에 대하여도 역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대사가 3세가 되는 해 4월8일 부친이 누각에서 졸고 있는데 역시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어린 스님을 찾아뵈러 왔소이다」하고는 어린 아기를 안아 주면서 무슨 주문인지 몇 번 외웠다. 그리고는 「아기 이름은 운학이 좋겠습니다. 아기의 일생이 구름 속의 학과 같을 것입니다.」하였다 한다. 이래서 운학(雲鶴) 또는 소사문(小沙門)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가진 대사는 어렸을 때부터 기이한 데가 있어서, 흙장난을 하여도 탑을 만들었고, 돌을 모아서는 절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심은 어른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사의 세속 인연은 쉽게 끝나기로 되었던 모양이다. 9살에 어머니를 10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아가 된 것이다. 똑똑하다는 소문을 들은 당시 평안도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이 한번은 불러서, 눈이 덮인 솔을 가리키면서 글을 짓게 하였다.
운자(韻字)를 처음에는 ‘사’를 다음에는 ‘화’자를 불렀는데 각각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香擬高閣日初斜, 千里江山雪岩花 」라 지었다. 스님의 문장의 재능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일화다.
香凝高閣日初斜(향응고각일초사)
千里江山雪岩花(천리강산설암화)
향기 그윽한 높은 누각에 해가 기울더니
온누리에 덮인 눈이 꽃밭 같구나
이런 인연으로 이 목사는 기뻐서 운학을 양자로 삼아 함께 서울로 들어갔는데 그때가 대사는 12세였다. 여기서 의부 이사증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해본다. 명종 재위 시절의 임꺽정 체포 작전 때의 기록이다.
그리고 동대문 밖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을 수학하고, 15세 때에 진사과(進士課)에 응시하였더니 그만 낙방하였다. 이 낙방이 역사 위에 서산대사를 탄생께 할 인연인 것을 누가 알았을까? 운학은 울적한 마음을 안고 몇몇 벗들과 함께 유랑의 길을 나섰다. 호남지방으로 발걸음을 옮겨 두류산(지리산), 청학동, 칠불암 등 산과 절로 6개월여를 돌아 다녔는데 한 노숙(老宿 : 법이 높은 선사)을 만났는데 숭인장로(崇仁長老)였다. 숭인(崇仁)은 대사를 보고서
“그대의 용모를 보아하니 심공급제(心空及第 : 마음이 허공처럼 광대하면서도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 대자유의 경지에 올라간 것)를 하면 영원히 세상의 명리를 끊고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운학은 “어떤 것이 심공급제입니까”라고 물었다. 숭인은 말없이 눈을 꿈뻑(瞬目)하며 “알겠느냐”고 물었다. 대사는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다시 숭인은 “심공급제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야”하고는 『전등록』, 『화엄경』 등 수십 권의 대승경전을 주면서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면 점차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조선 최고의 스님이 될 재목을 발굴한 숭인장로(崇仁長老)는 누가일까? 여러 가지 확인되지 않는 설들이 난무한다. 쌍계사, 황령사, 영원암 스님이라고도 한다. 물론 오랜 세월 사명(寺名)이 변경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불교계에서 이런 것 좀 정리한 자료를 내놓으면 좋겠다. 다음은 조용헌 작가의 주장을 실어본다. 그리고 필자도 여기에 등장하는 원통암(圓通庵)에 올라가 봤었다.
1560년 12월에는 엄가이라는 도둑 두목이 잡혔는데, 그는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라는 자였다. 관아는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번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후퇴하였고, 부장 연천령이 죽고 군마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사건이 이렇게 커지자, 임금이 직접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었는데, 한낮에 도둑떼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해 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관군은 본격적으로 도적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그 해 12월에 황해도 순경사(巡警使)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였다. 이사증은 허위 보고 책임을 지고 파직당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1537년(중종 32) 영해부사를 역임하고 1541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자 훈련원도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52년(명종 7)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1554년 초곶(草串)에 사는 야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무리를 지어 변경의 백성들을 노략질해가므로 이를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안마(鞍馬)와 특상을 받았으며,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군사기밀이 누설되어 야인에게 크게 패한 책임을 지고, 평안도 인산진(麟山鎭)으로 유배되었다.
1555년에 다시 기용되었고, 1560년 황해도 순경사(巡警使)가 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金世澣)과 함께 임꺽정(林巨正)을 토벌하는데 참가했으며, 1565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에 올랐다. 무인이면서도 시에 능하여 후세 문인들이 높이 평가하였다.
서산대사는 한양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친구들과 이별했다. 이런 출가시(出家詩)를 남겼는데 출가시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때만 해도 삭발하지 않고, 공부 한 번해보고 결정하겠다는 심정이었다. 필자 생각에는 친구들과의 작별시가 더 어울리겠다.
花開洞裏花猶落(화개동리화유락)
靑鶴巢邊鶴不還(청학소변학불환)
珍重紅流橋下水(진중홍류교하수)
汝歸滄海我歸山(여귀창해아귀산)
이름은 화개동인데 꽃은 오히려 지고
청학동 둥우리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
잘 가거라 홍류교 아래 흐르는 물이여
너는 바다로 가고, 나는 산으로 가리라
이후 행자생활하면서 경전 공부를 시작했다. 행자생활 한 곳은 지금의 하동군 대성리 의신마을의 연암(蓮菴)과 인근 산 위에 앞에서 언급된 원통암(圓通庵)으로 추정된다. 행자생활을 하면서 공부한 6년 후, 부용 영관(芙蓉 靈觀, 1485~1571) 스님과 인연을 맺는다. 부용선사는 대사를 보고 곧 그의 법 그릇 됨을 인정하고 입문을 허락 하였다. 3년을 하루같이 연구하고 탁마(琢磨)하더니 마침내 깊은 경계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물을 길어서 지고 돌아오다가 문득 이렇게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忽聞杜宇啼窓外(홀문두우제창외)
滿眼春山盡故鄕(만안춘산진고향)
汲水歸來忽回首(급수귀래홀회수)
靑山無數白雲中(청산무수백운중)
홀연히 창문 밖에서 소쩍새가 우는데
눈에 가득한 봄 산이 모두 다 내 고향이로다
물을 지고 돌아오는 길에 홀연히 고개를 돌려보니
청산이 무수히 흰 구름 속에 갇혀 있구나.
그리고는 스스로 칼을 잡고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이제 행자생활을 끝내고 진정한 출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세하기를 “내 차라리 평생을 바보 천치로 살지언정 결코 문자법사는 되지 않겠다” 하였다. 학문과 이론에 얽힌 학자승이 되느니 보다 차라리 바보 천치가 되겠다 하였으니 이는 문자이전의 본심을 파득하고자 하는 장부의 대발심인 것이다.
대사는 이렇게 하여 제대로 승려의 길에 들었다. 일선(一禪)대사를 수계사(授戒師)로, 석희(釋熙)법사와 육공장로(六工長老), 각원상좌(覺圓上座)를 증계사(證戒師), 영관(靈觀)대사를 전법사(傳法師),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양육사(養育師)로 하여 계(戒)를 받았다.
이때 휴정(休靜)이라는 법명을 받으니 행자 생활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휴정스님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默)스님 회상에 참예(參詣), 인가를 받고 두류산(頭流山,지리산)으로 들어가 삼철굴(三鐵窟)에서 세 철을 나고, 대승암(大乘庵)에서 두 철을 보냈다. 의신동으로 돌아와 삼철굴(三鐵窟)에서 3년을 지내면서 본격적인 선법(禪法) 정진에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철굴(三鐵窟)이란 상철굴암(上鐵窟菴), 중철굴암(中鐵窟菴) 그리고 하철굴암(下鐵窟菴)이다.[아래지도참조] 그리고 의신암, 원통암, 원적암, 은신암 등 여러 암자에서 몇 년을 보내며 더욱 정진했다.
하루는 용성(龍城,전북 남원)에 사는 벗을 만나러 가는 도중 별마을(성촌星村)을 지나다가 한낮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아 연거푸 두 수의 오도가(悟道歌)를 읊는다.
髮白非心白(발백비심백)
古人曾漏洩(고인증누설)
今廳一聲鷄(금청일성계)
仗夫能事畢(장부능사필)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 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마쳤네
이어서 또 이렇게 읊는다.
忽得自家底(홀득자가저)
頭頭只此爾(두두지차이)
萬千金寶藏(만천김보장)
元是一空紙(원시일공지)
홀연 제 집을 발견하니
온갖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천언만어의 경전들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그리고는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본격적인 정처없는 운수행각(雲水行脚)에 나선다. 명종 1년(丙午,1546)가을, 갑자기 제방을 유력(遊歷)하고 싶은 생각이 일자 간편한 행장으로 길을 떠난다.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 풍악산(楓嶽山, 가을의 금강산 이름) 미륵봉에 들어가 구연동(九淵洞)에서 한 철, 향로봉에서 한 철, 성불암(成佛庵), 영은암(靈隱庵), 영대암(靈臺庵)등 여러 암자에서 한 철을 나고 함일각(含日閣)에서 한 해를 머물렀다. 이때의 나이는 30살이었다.
경술년(1550년) 가을에 나는 금강산 향로봉에 있었다. 어느 날 묘향산에서 왔다는 한 수행승이 부처와 중생은 무엇이 다르고, 번뇌는 왜 일어나는지를 몹시 간절하게 묻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했다.
불성을 보려거든
마음이 바로 불성인 줄 알고
3도(途, 지옥 · 아귀 · 축생의 생존)를 벗어나려거든
마음이 바로 3도인 줄 알라.
정진이 바로 석가모니
청정한 본성이 바로 아미타불
밝은 마음이 문수보살
원만한 행위가 보현보살
자비가 관세음보살
희사(喜捨)가 대세지보살이니라.
성내는 마음이 바로 지옥
탐욕이 바로 아귀
어리석은 마음이 축생
음욕과 살생 또한 그러하니라.
일어나는 마음이 천마(天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음마(陰魔)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그것을 번뇌마(煩惱魔)라고 한다.
허나 우리의 바른 법 안에는
본래 그런 것 없느니라.
그대가 그런 줄 알았거든
속히 금강의 칼을 잡고
한 생각 속으로 빛을 돌리면
모든 현상이 다 환상이 될 것이다.
환상 또한 병이 되니
모름지기 한 생각 놓아버려라.
놓아버리고 또 놓아버리면
본래의 청정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淸虛堂集』 제4권, 禪敎偈語
이 무렵 조정에서는 연산군 때 폐지했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일으키고 승려들을 등용하는 승과(僧科)제도를 부활시켜 명종 6년(辛亥,1551) 11월 19일 첫 시험을 실시한다. 휴정스님은 주위 사람들의 권청(勸請)에 못 이겨 응시, 합격자 4백 6명 가운데 수석으로 급제하여 31살에 대선(大選)이 된다. 34살 되던 명종 8년(1553) 1월 19일 나라에서 내린 도첩을 받고 주지명(住持名, 中德)에 오른다.
휴정스님은 일체의 승직을 버리고 서울을 떠난 뒤 자신의 빛을 갈무리하여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나 도를 물으러 찾는 이는 날로 늘어났다. 이 무렵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라 불리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기도가 조정에 알려져 그 일당은 모조리 잡히고 정여립은 자살했으나 역모에 가담한 무리 중에 승려 출신이 많은데다 역모의 본거지가 계룡산,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절이라는 점이 불교계를 난처하게 했다.
이때 포도청에 검거돼 문초를 당하던 무업(無業)이라는 중이 휴정스님의 ‘향로봉시(香爐峯詩)’를 들어 마치 모반에 가담한 것처럼 진술하고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도 끌어들여 관련이 있는 듯이 무고했다. 역모의 혐의를 받은 휴정은 묘향산에서, 유정은 강릉에서 각각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된다. 휴정스님은 비록 역모의 누명을 쓰고 잡히긴 했으나 그의 태도는 의연했으며 말은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다.
선조는 휴정의 억울함을 간파, 즉시 석방하게 한 뒤 휴정스님의 시집을 열람하고는 뛰어난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며 자기가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에 시 한수를 지어 하사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葉自毫端出(엽자호단출)
根非地面生(근비지면생)
月來難見影(월래난견영)
風動未聞聲(풍동미문성)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는 땅에서 난 것 아니네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바람이 흔들어도 소리 아니 들리네
이에 휴정스님은 임금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린다.
瀟湘一枝竹(소상일지죽)
聖主筆頭生(성주필두생)
山僧向執處(산승향집처)
葉葉帶秋聲(엽엽대추성)
소상강 변의 우아한 대나무가
임금님 붓 끝에서 나와
산승의 향불 사르는 곳에서
잎마다 가을바람에 서걱거리네
선조는 이 시를 보고 또 한 수를 지어 스님에게 내린다.
東海有金剛(동해유김강)
雄賢幾種胎(웅현기종태)
高名山斗仰(고명산두앙)
今世是如來(금세시여래)
동해변 금강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인걸이 나왔던가
태산북두처럼 높은 이름
오늘의 여래이어라
휴정스님은 임금의 시에 대해 또 답시를 짓는다.
寂照非千世(적조비천세)
虛靈豈入胎(허영기입태)
金剛山下石(김강산하석)
大小自如來(대소자여래)
세상 일 잊고 존재의 실상을 조견하나니
허령한 진면목 어찌 윤회(輪廻)에 들랴
금강산의 돌들은
모두 크고 작은 여래이어라
선조는 후한 상을 내리며 위로한 뒤 산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은 지 불과 3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倭軍)은 삽시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맹렬한 기세로 북상(北上)했다. 사세가 위급해지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북으로 향해 마침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홀연 휴정이 생각나 좌우에 그의 소재를 묻고 시급히 찾아오도록 명한다. 이때 휴정은 묘향산에서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의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했다.
선조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나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으니 경은 부디 나라와 백성들을 구제해주오.” 휴정스님은 울면서 다짐한다.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불보살의 도움을 빌도록 하고, 그 밖의 모든 승려들은 신이 통솔하여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휴정스님의 충성에 감동한 선조는 즉석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내렸다. 어전을 물러나온 그는 곧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格文)을 보내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모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조선 건국 이래 조정으로부터 줄곧 억압 받아온 승려들이었으나 불교의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기로부터 건지려는 의승병(義僧兵)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사명당 유정(惟政)은 강원도 관동지역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은 호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權慄)장군을 도와 행주(幸州)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또 충청도에서는 영규(靈圭)가 조헌과 금산전투에 참가 했다가 전사했다.
‘민족불교의 3대 정신사(精神史)’는 불교가 민족의 고난과 현실에 어떻게 응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보이다. 서산대사 휴정은 전란 속에서 수행을 전장으로 옮겨 호국의 불교를 세웠고, 용성스님은 산을 내려와 한글 경전과 사회개혁으로 민중 속에 불법을 심었으며, 만해 한용운은 시와 사상으로 식민의 억압 속에서 정신 해방의 불교를 완성했다. 하나같이 걸출한 세 선승(禪僧)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수행과 실천을 올곧게 이어갔던 한 줄기 국가수호의 맥이 시대를 넘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한양을 함락하고 선조(宣祖)가 평양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조는 묘향산에 사신을 보내에 휴정을 부르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할 방도를 물었다. 휴정은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약속하고, 선조(宣祖)로부터 최고 승려 관직인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벼슬을 부여받는다.
그의 제자 가운데 사명대사(속명 朴惟政)가 있었다. 하루는 사명이 물었다. “스승님, 부처님은 자비를 말 하시는 데, 칼을 잡는 일이 자비입니까?” 휴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칼의 끝에도 자비가 깃들 수 있다. 중생을 구하는 일이라면 칼날 또한 불심의 길이 된다.” 이 대화는 훗날 사명대사가 외교사로 나서 왜장과 담판을 벌일 때까지 이어진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 평남 순안 법흥사에서 전국적으로 모집해 몰려온 의승군(義僧軍) 수는 5천 명에 달했다. 그는 영규(盈奎), 처영(處英), 사명 등 수행 제자들을 각지에 파견했다. 영규 대사는 승병 1천 여명과 방어사 이옥의 군대 500명으로 청주성을 탈환했으며, 평양성 전투 참여 등 승군의 활약상은 조정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전쟁의 끝 무렵 심신의 노쇄함을 느낀 휴정은 사명대사 유정에게 승군 전체의 통수권을 맡기고 묘향산 은거처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휴정의 공로를 높이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내리고, 시 한 수를 지어 공을 칭송했다. ‘산은 말없이 나라를 지켰다.’ 서산대사와 의승군의 묵묵한 헌신과 용맹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전후 법흥사에서다. 제자들이 서산대사에게 세속의 명예를 권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명예는 바람과 같고, 도는 산과 같다.” 1604년 여름, 그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조용히 적멸에 들었다. 향년 85세, 법랍은 67세였다.
인생의 황혼기임에도 서산대사는 법흥사에서 제자들을 이끌며 수행의 길과 나라를 지키는 길을 하나로 결집했을 터, 산사의 고요를 깨우는 그곳에서 수행과 무예는 마치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오늘날 서산대사의 입적지 법흥사 대신에 해남 대흥사가 서산대사와 의승군의 추모·기념 공간으로 기억되는 것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클 것이다.
남도 불교의 거점 대흥사(大興寺) 내 사당 표충사(表忠祠)에는 서산, 사명, 처영 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돼 세월에도 바라지 않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품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사찰의 깃발, 고요히 자리를 지키는 진영 앞에 서면, 그들의 헌신과 나라를 위한 희생이 아직도 숨결처럼 잔잔히 살아 있다. 서산대사가 남긴 ‘선가귀감’은 4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국 선방에서 낭독되며 수행자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참된 수행은 세상사 외면 안 해
산중의 고승이면서 동시에 생사일여의 전장 한가운데 섰던 승군 지도자 휴정. 그의 삶은 ‘깨달음은 고요 속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붓다의 설법은 인간의 고통과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진정한 빛을 발함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대사께서 연로하신데, 어찌 전쟁터로 나가시렵니까?” 묘향산 제자 처영이 간곡히 만류했을 때, 노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중생이 고통받는데 어찌 선방에만 머물겠느냐. 이 몸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서 있어야 한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화마가 온 조선을 삼키던 봄, 서산대사(1520~1604)는 73세였다. 그럼에도 한 손에는 염주를, 한 손에는 격문을 쥐고 전국 사찰에 글을 보냈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승군을 일으켜 구하라.” 조선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사회적 역할이 제한됐던 불교는 그의 붓끝에서 다시 살아나 민중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며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휴정은 직접 문도를 1천5백여명을 거느리고 명나라 원병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선조 26년(1593) 10월, 의승병들 100명이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의 복구 작업을 폈다.
의승병들의 전공을 시기한 유신(儒臣)들의 비난 소리가 높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병을 보낸 명나라 조정과 명군진중 및 적진에까지 휴정의 이름은 떨쳤다. 명나라군의 총지휘자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비롯, 삼협총병(三協總兵)이하 여러 장수들은 다투어 글월을 보내 휴정의 전공을 치하했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니 태양을 꿰뚫는 그 충성에 우러러 존경할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여송은 또 송시(頌詩)한 수를 지어 휴정에게 보냈다.
無意圖功利(무의도공리)
全心學道仙(전심학도선)
今聞王事忽(금문왕사홀)
摠攝下山嶺(총섭하산령)
공리에 관심 없이
불도만 닦더니
나라일 위급하매
산을 내려왔네.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유생들이 하는 짓이 정말 웃긴다. 명나라 군이 얼마나 욕을 했을지 눈에 선하다. 이런데 이나라의 가장 큰 문제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본다. 전쟁 후 논공행상 때도 승병들은 거의 홀대를 받았다. 그런데 위험한일엔 또 스님을 찾는다. 그래서 사명대사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된 것이다. 꼴갑들을 떠는 게 선비라는 작자들이었다. 입만 가지고 백성을 힘들게 만든 계급이었다.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선조들을 모신 칠백의총(七百義塚)에 가보라. 그 속에도 승병들 이야기는 거의 없다. 분명히 승병들이 전투에 더 참여했다. 칠백의총(七百義塚)이 1970년에 조성되었다고 생각하면 하는 꼴들이 참 가관이다. 칠백의총(七百義塚)이란 명치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나라가 내편 네편 가르는 게 우연이 아니다.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피 말이다.
승병들이 잘 싸운 이유!
첫째 처자식이 없다.
둘째 죽어도 극락이란 갈 곳이 있다.
선조 27년, 휴정스님은 사직할 뜻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의 나이 팔십, 이제 근력이 쇠하였아오니 군사를 제자 유정 및 처영에게 맡기고, 도총섭의 인장을 반납하고 신이 본래 머물던 묘향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이에 임금은 그의 뜻을 아름다이 여기고 늙음을 민망히 여겨 떠나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號)를 내렸다. 묘향산으로 돌아온 휴정스님은 또다시 유유자적한 본래의 한가로운 도인(道人)이 되었다.
선조 37년(甲辰, 1604) 1월 23일, 휴정스님은 원적암(圓寂庵)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날따라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휴정스님은 눈발 속에 견여를 타고 가까운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절한 뒤 방장실로 돌아왔다. 목욕재계하고 가사장삼을 수한 뒤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른 다음 스님은 법상에 올라 마지막 설법을 했다.
설법을 마친 후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영정(影幀)에 시 한 수를 쓴다.
八十年前渠是我(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후아시거)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 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네 그려
그리고는 유정과 처영에게 보내는 글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85세, 법랍 나이 67세였다. 기이한 향내가 방 안에 가득하여 사라지지 않더니 삼칠일(21일) 뒤에 비로소 그쳤다. 제자 원준(圓俊), 인영(印英)등이 다비한 뒤 영골 한쪽과 사리 2과를 습득하여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 봉안했다. 또 정골 한 조각은 제자 유정(惟政), 자휴(自休) 등이 봉산(蓬山, 蓬萊山)으로 받들고 가 그에서 사리 몇 과를 수습하여 유점사 북편 언덕에 봉안했다.
제자들은 1천여 명에 달했고 그중 당대에 이름을 떨친 스님만도 70여 명이었으며 그 중 사명 유정(四溟惟政)·편양 언기(鞭羊彦機)·소요 태능(逍遙太能)·정관 일선(靜觀一禪)은 4대파(四大派)를 형성했다. 이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선가귀감(禪家龜鑑)》,《유가귀감(儒家龜鑑)》,《도가귀감(道家龜鑑)》,《선교석(禪敎釋)》,《선교게어(禪敎偈語)》,《심법요초(心法要抄)》,《운수단(雲水壇)》,《설선의(說禪儀)》,《삼로행적(三老行蹟)》,《청허당집(淸虛堂集)》8권, 《회심곡(回心曲)》1편
①《선가귀감(禪家龜鑑)》은 당시의 불교계가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서로 혼합되어 있어, 불교인들이 수행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선문(禪門)은 견성법(見性法)을 전하고 교문(敎門)은 일심법(一心法)을 전하는 것임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올바른 길을 밝히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첫째 당시의 승려들이 불교학에 마음을 두지 않고 유생(儒生)들의 문장이나 시만을 읊고 귀중히 여기는 타락된 풍조를 시정하여 승단(僧團)의 가풍(家風)을 바로잡고자 함이며, 둘째 불교전적이 너무나 방대하여 갈피를 잡기 어려우므로 그 가장 중요하고 핵심 된 사상을 뽑아서 후학(後學)들로 하여금 쉽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셋째 당시에 불교의 입문자(入門者)를 위한 알맞은 교과서가 없었으므로 후학의 지도를 위한 그 지침서로 삼고자 함이었다.
②《선교게어(禪敎偈語)》에 있는 ‘선교결(禪敎訣)’은 제자 유정에게 보낸 글인데, 선(禪)과 교(敎)의 차이점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며, 선은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고, 교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라 정의한 다음,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면 누구도 그것을 무엇이라 할 수 없으므로 억지로 말하여 마음이라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얻는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고, 교를 배우는 이는 교 가운데도 선이 있다고 하나, 선은 교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선교게어〉에 있는 ‘염불문’은 그의 염불관이 잘 드러나 있다.
| 염불문 입으로 외우는 것을 송불(誦佛)이라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한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부처님은 근기가 높은 사람을 위해서는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정토이며, 자신의 청정한 성품이 아미타불이라 했으니, 이것은 이른바 서방정토가 멀지 않다는 뜻이다. 또 근기가 낮은 사람을 위해서는 10만 8천리나 된다고 했으니, 이는 이른바 서방정토가 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서방정토의 멀고 가까움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누구나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 곧 자신의 아미타불의 정토가 드러날 것이다. 〈선교게어〉 중에서 |
③《선교석(禪敎釋)》은 선을 중심으로 해서 선과 교의 특징과 차이점을 제시한 저술이다. 여러 어록과 논서에서 요긴한 글귀를 인용해서 선에 대해 밝히고, 마지막으로 50여 명의 학식 있는 불도(佛徒)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를 배우는 사람이 묻고 선을 닦는 사람이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2. 해탈시(解脫詩) -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인생의 덧없음과 집착을 내려놓는 지혜를 담은 구절로, 생사가 한 조각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1]
12. 입적 후 선양(宣揚)
인조 8년(1630) 문인 언기(彦機), 의경(儀), 쌍흘(雙)등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에게 비석 글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을 세웠다. 인조 9년(崇禎4, 1631년) 봄, 문인 태능(太能)원철(圓徹), 해안(海眼)등이 계곡(谿谷) 장유(張維)에게 비석 글 짓기를 구걸하여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대둔사(大屯寺)에 비석을 세웠다.
그 이듬해(壬申, 1632) 가을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전남 해남의 두륜산 대둔사(大屯寺, 현재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보관시켰다. 대둔사에는 의승대장 황금가사(黃錦袈裟) 한 벌, 홍금(紅錦)가사 한 벌, 백금(白金) 장삼 한 벌, 벽옥의 바리대(碧玉鉢벽옥발) 3좌(座), 가죽신(唐鞋벽규) 2켤레, 검은 거문고(烏瑟오슬)와 염주 두가지, 옥사자(玉獅子) 모양의 연적(硯滴) 1좌, 중덕대선(中德大禪)의 승과 합격증서(紅牌홍패) 1장, 낙산사 주지 임명장 1장, 유점사 주지 임명장 1장 등의 휴정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는 제자 영잠(靈岑)대사가 휴정의 3년상(三年喪)을 마친 뒤 대둔사로 가져가서 보관한 것으로 휴정스님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휴정스님은 임종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적한 뒤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둔사에 보내어 보관케 하라고 당부했었다. 뒷날 나라에서는 임진란에 공이 큰 의승장(義僧將)들의 충의(忠義)를 길이 기념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이때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사명당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의 표충사(表忠祠)다. 여기에는 휴정, 사명, 영규의 위패가 안치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 대둔사에 있던 휴정의 법손(法孫)들은 크게 개탄했다. 휴정이 입적한 뒤 1백85년 되던 해 정조 12년(乾陵 戊申, 1788) 대둔사 스님 계홍(戒洪)과 천묵(天)은 글을 올려 임금께 탄원했다.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대둔사에 대사의 충의(忠義)를 길이 기릴 수 있게 사당을 세워달라는 요지였다. 이에 임금은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할 것을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는 한편 사명(四溟)과 뇌묵(雷)을 좌우에 배향(配享)토록 했다. 이듬해(己酉, 1789) 4월 위령제(慰靈祭)를 봉행함에 조정에서는 예조정랑(禮曺正郞) 정기환(鄭基煥)을 보내 제향(祭享)에 참석하게 했다. 홍문관 수찬(修撰) 송익효(宋翼孝)가 지은 제문(祭文)은 휴정의 충의(忠義)를 이렇게 추모했다.
그 옛날 임진년 왜구들 침략할 제 불교계의 충의는 휴정이 으뜸이라. 머리 깎고 가사 걸친 몸으로 인륜을 다했고 지혜의 칼 빼어들고 서편으로 달려가니 의로운 이들 그를 따랐네. 명군과 함께 난리를 평정하고 어가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돌아오니 공훈 더욱 빛났어라, 당시 임금 공로 기려 하사한 글 찬란커늘 어찌하여 표충사는 유정을 우선 했나 머물던 옛 절 웅대한 새 사당 지어 법풍을 세우고 공로를 권장하니 뭇 사람 청에 따른 임금의 윤허 일세. 편액과 제물 내리신 임금님의 각별한 배려에 외진 남녘 사람들 어깨 으쓱하니 비록 승려지만 존경스러워라.
또, 승지 정약용(丁若鏞)이 쓴 상용제문(常用祭文)에서도 휴정스님의 충의는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선정과 지혜 모두 탁월하고 충성과 의리 다 같이 융성하여라. 큰스님 나라 위한 의거 두 제자가 가풍이었네. 수많은 왜적 사로잡으니 임금은 그 공적 적게 했네. 솥과 제기에 기록 새겨지고 제물 풍성하도다. 봄빛 완연하매 사모의 정 더욱 간절하여라. 영가들의 천도를 위해 임금님의 은전이 내려졌네.
삼가 홍제존자사명당선사(弘濟尊者泗溟堂禪師)와 우세존자뇌묵당선사(佑世尊者雷堂禪師)를 좌우에 모시고 배향한다.
홍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隣)이 <표충기적비(表忠記蹟碑)>의 명문(銘文)을 지었다. 정조 18년(甲寅, 1794),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西山大師畵像堂)의 명문(銘文)을 지을 때 서공(徐公:有隣)이 곁에서 도와준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알려진 것이다. 다섯 집의 복호결(復戶結)과 보솔(保率) 30명으로 하여금 제향을 지내도록 했다.
고종 8년(同治10, 1871) 그동안의 재정적 지원을 끊고, 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을 봉행토록 했다. 제문은 구계각안(九階覺岸)이 지었다. 대둔사에는 대대로 전해져 오는 《연화경(蓮華經)》 1권과 황금 병풍 1좌가 있다. 《연화경》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손수 쓴 것이고, 병풍은 일본의 관백(關白)이 바친 것이다.
청허당집 서(淸虛堂集序) / 허균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삼한(三韓)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佛門)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교장(敎藏)이나 율장(律藏)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묘(塔廟)를 존숭(尊崇)하고 과보(果報)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켰을 뿐이었다.
그 염화(拈花)의 밀지(密旨)와 면벽(面壁 달마(達摩)가 9년 동안 벽을 향하여 참선한 고사)의 미의(微意)는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사(師)는 아무 전(傳)을 받고 아무 조사(祖師)는 아무 법(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門徒)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碑)를 세우고 커다란 종(鍾)을 만들어 공렬(功烈)을 과시하는가 하면, 보전(寶殿)과 연궁(蓮宮)이 총림(叢林 사찰(寺刹)을 이름)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참람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道峯) 영소 국사(靈炤國師)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法眼 일체의 법을 환히 비춰 보는 눈)ㆍ영명(永明 영원히 밝은 불법)의 전수를 받고, 송(宋) 나라 건륭(建隆 태조의 연호)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풍(佛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여 말법(末法)을 구제함으로써, 조사(祖師 달마(達摩)를 말함)가 서쪽에서 온 뜻이.비로소 선양(宣揚)되고, 동토(東土)에 가사(袈裟)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臨濟 교종(敎宗) 이름)ㆍ조동(曹洞 교종이름)의 종풍(宗風)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禪宗)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사(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장 신범(道藏神範)에게 전수되어 청량(淸涼)의 도국(道國), 용문(龍門)의 천은(天隱), 평산(平山)의 회해(懷瀣)ㆍ현감(玄鑑)ㆍ각조(覺照), 두류(頭流)의 신수(信修) 등 6세(世)를 거쳐 보제 나옹(普濟懶翁)을 얻었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널리 찾아 두루 통[圓通]하고 즉시 체득[卽詣]하여 울연(蔚然)히 선림(禪林)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 받은 이는 남봉 수능(南峯修能)이 적사(嫡嗣)가 되었고, 정심 등계(正心登階)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道)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淸虛老師)를 수위(首位)로 일컫고 있다
사의 휘(諱)는 휴정(休靜), 고향은 안서(安西 해주(海州)의 옛이름)로 소시에 유가(儒家)의 글을 익혀 이미 대의(大義)를 통하였고 사장(辭章)에도 능하여 과거(科擧)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두류산(頭流山)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誓願)을 발(發)하여 부용(芙蓉)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팔교(八敎)를 통(通)하고 삼관(三觀)을 통하였으며, 도(道)는 기미(機微)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達摩)ㆍ노능(盧能 혜능(慧能)의 속명)의 맥락을 접하고, 심ㆍ성(心性)을 설(說)하는 묘(妙)는 남양(南陽 남양의 혜충(慧忠)을 말함)ㆍ영가(永嘉 영가의 원각(元覺)을 이름)ㆍ백장(百丈)ㆍ남천(南泉)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혜일(慧日)이 거듭 밝고 지등(智燈)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삼사(三舍 1사(舍)는 30리)나 물러설 것이며, 진ㆍ정(眞正)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지을 것이니, 소위 하등(下等)사람은 도(道)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사는 대법(大法)을 간직하고 명산(名山)에 두루 머무른 법랍(法臘)이 이미 70년이나 된다. 은고(銀鼓)를 보방(寶坊)에서 울리고 금륜(金輪)을 향지(香地)에서 굴려 군미(群迷 중생의 미혹)를 다 깨뜨리고 현불(玄拂 승도(僧徒)를 지휘하는 봉(棒))을 혼자 세워, 도봉(道峯)ㆍ보제(普濟)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교(敎)ㆍ율(律)에 구구하여 과(果)ㆍ보(報)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由旬)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금언(金言 부처의 말)이 장차 부결(剖決)되려고 옥첩(王氎)이 갑자기 재(灰 청허(淸虛)의 죽음을 뜻함)로 화(化)하여, 기수(祇樹 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이름)에 그늘[陰]이 없어지고 자항(慈航 자비의 배로 제도중생을 뜻함)에 노[櫂]를 잃었으니, 인ㆍ천(人天)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정공(鍾峯政公 정공은 유정(惟政)을 높인 말)은 사(師)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興起)한 이이다. 지당(智幢)이 이미 꺾이고 계보(戒寶)가 오랫동안 사장(死藏)된 것을 염려하여, 그 유문(遺文)을 주워 모아 영모(永慕)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정공(政公) 또한 가고 말았다. 열반(涅槃)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門人)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사부(師父)의 유문(遺文)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地下)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居士 허균(許筠)을 이름)는 우리 교(敎)와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惠球)가 나를 찾아와서 그 망사(亡師)의 말을 전하고 서(序)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집우(執友 뜻을 같이한 벗)와 같이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書札)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客舍)에서 노사(老師)를 만나 직접 묘체(妙諦)를 듣고 봉심(蓬心 흐트러진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死後)의 비문(碑文)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儒家)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模寫)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사부가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先代)의 세의(世誼)를 감념(感念)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법(師法)의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釋迦)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를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舌]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유문(遺文)의 현묘(玄妙)하고 탈쇄(脫灑)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기원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4) 맹춘(孟春)에 양천(陽川) 비야거사(毗耶居士) 허단보(許端甫)는 쓴다.

첫댓글 •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는 화살을 받는 것처럼 하라."
•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지언정, 신심(信心) 있는 이가 주는 옷을 함부로 입지 말라."
• "말을 잘하면서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것은 선(禪)이 아니요, 행동은 바르나 말에 법도가 없는 것 역시 온전한 도가 아니다. 말과 행동이 모두 일치해야 비로소 도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