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계화 투쟁현장 답사
『세계화와 싸운다』(창비 2004)의 원제는 One No, Many Yeses다. 그래서 한글본의 제목도 처음에는 '문제는 하나, 정답은 많다'로 정했었다. 세계화라는 문제가 있고, 그에 맞서는 무수한 저항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새로운 말은 아니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이미 반세계화 투쟁의 고전적인 구호가 됐으니까.
제목만 놓고 보면, 반세계화론자의 프로퍼갠더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세계화를 비판하는 데 쓸 수 있는 흥미롭고 유용한 각종 수치와 사례들이 인용되어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반세계화 논의의 이론적, 현실적 성과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 가지고는 이 책의 성격을 제대로 말할 수가 없다. 사실 이 책의 장르를 대라면 기행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여행의 테마는 물론 '반세계화 투쟁현장 답사'이다. 저자인 폴 킹스노스(Paul Kingsnorth)는 8개월 동안 다섯 개 대륙을 넘나들며 현지인들의 고통과 저항을 기록했다. 이 책은 그가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벌어지는 크고 작은 에피쏘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에피쏘드들 중에는 이국취향의 독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이색적인 경험들도 적지 않다. 저자는 부족민 의식에 참여해 전사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고, 지명수배중인 게릴라 두목한테 무기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가 하면, 내전중인 마을에서 주민들과 토속음식을 먹으며 정부군의 동향을 파악하기도 한다.
반세계화 투쟁의 중심지는 서구가 아니다
저자는 이런 경험을 통해 많은 편견이 깨졌다고 말하면서 무엇보다 반세계화 투쟁의 중심지가 서구가 아님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마야족 사빠띠스따, 파푸아 부족민, 브라질 노숙자, 남아공 빈민들을 만난 후,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던 이 엘리뜨 백인남성은 마침내 '더 좋은 세상이 온다면, 그것은 모두 이 사람들 덕분'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물론 반세계화 투쟁은 서구에서도 진행된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다국적기업의 광고카피에 장난을 치는 시인도 있었고, 신자유주의를 전파하는 명사들에게 파이 세례를 퍼붓는 투사도 있었으며, 스타벅스 커피를 사마시지 말라고 설교하는 목사도 있었다. 그러나 투쟁과 멸종의 기로에서 투쟁을 선택한 현지 부족민과 서구의 악동들 중 누가 반세계화 투쟁의 주인공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남반구에서 반세계화 투쟁은 많은 경우 반정부 투쟁이다. 파푸아 부족민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인도네시아나, 아파르트헤이트를 뒤엎었다며 갖은 생색을 내고 있는 신생 남아공정부는 세계화에 기생하는 특권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 대의제에 기초한 국가단위 정당정치가 제대로 굴러가는 나라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누가 권력을 잡든지, 국가는 폭력적인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경직된 제도일 뿐이다.
정당성 없는 체제는 무너지게 마련
이 책『세계화와 싸운다』는 별다른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정당정치를 비판하고 대중자치를 주장하는 면에서 그 어떤 정치학 이론서보다 설득력을 발휘한다. 저자의 사고방식은 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가 『제국』(이학사 2001)에서 보여준 대중주의 아나키즘과도 멀지 않다. 『세계화와 싸운다』에서 비판하는 거대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야말로 '제국'의 정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책에 나오는 현지의 투쟁이 바로 '다중'(multitude)의 실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중은 양쪽에서 세계화의 공격을 받는다. 우선, 거대기업이 만들어내고 각국 정부가 선전하는 황당한 국제조약들이 생존을 압박해온다(저자는 우리나라 독자를 위해 이경해씨의 죽음을 환기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사회의 환상이 우리를 잠식한다. 광고에 길들어가는 우리는 사치성 재화와 행복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을 우울의 핑계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다. 흥미롭게도, 많은 사람들은 정당성 없는 현실이지만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울해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화와 싸운다』의 저자는 '정당성 없는 체제는 무너지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금 싸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창비 웹매거진/200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