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개막
제14회 아시안게임이 2002년 오늘 부산에서 개막됐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이어 16년 만에 다시 우리 나라에서 30억 아시아인의 축제를 벌이게 됐다.
'아름다운 만남'을 주제로 한 개회식은 부산 주경기장에서 치러졌는데 참가자들이 알파벳 순서로 입장하던 관례를 깨고 '가나다'순서로 입장했다.
이번 대회에는 44개 나라의 선수와 임원 등 만8천여 명이 참가하여 10월 14일까지 16일 동안 부산을 비롯해 창원과 마산, 울산 등 인근 도시의 38개 경기장에서 치러졌다.
특히 북한에서 2천여 명의 서포터스를 파견해 남북한 화해의 물꼬를 트는데 큰 역할을 했다.
1위는 금메달 150개를 딴 중국, 2위는 금메달 96개를 획득한 한국, 3위는 금메달 44개로 일본이 차지했다. /YTN
[2000년] 신문 시사만화 ‘고바우영감’ 국내 최장기 연재기록(1만4139회) 세우고 연재 중단
김성환 화백이 2000년 9월29일 '고바우 영감' 신문연재를 접었다. 그간 김화백이 '고방우영감'이란 타이틀로 연재한 횟수는 무려 1만4139회. 신문연재만화로는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고바우영감'의 탄생은 1950년 11월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대구에서 발행되던 '만화신보'에 연재를 한 것.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매체를 바꿔가면서 50년간 사랑을 받았다.
1932년생으로 경기 개성 출신인 김화백은 경복중 5학년때 18세의 나이로 당시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를 연재, 본격 시사만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대학시절에는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학원'잡지에 연재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고바우영감'의 종합일간지 연재는 1955년 2월 동아일보에서 시작됐다. 1970년 3월 연재 5000회를 맞았고 1980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뒤 1987년 5월 1만회를 기록했다. 1992년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직한 뒤에는 그해 9월부터 문화일보로 옮겨 연재를 계속해왔다. 김화백은 자유당 말기 경무대의 위세를 풍자한 경무대 똥통으로, 5·16후에는 엿장수 마음을 그려 한동안 붓은 놓았던 적도 있었다. /조선
[1984년] 올림픽 주경기장(서울 잠실) 개장
서울종합운동장의 주경기장(메인스타디움) 등 제반 시설의 건설계획을 종합 확정하고 1977년 11월 주경기장 및 실내수영장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실내체육관(7,000평 : 수용능력 2만 명)은 1979년 4월에 준공 ·개관하였고, 실내수영장(6000평 : 4,500명 수용)도 1980년 12월에 완공하였다. 1981년 9월과 11월에 88올림픽 대회 및 86아시아 경기대회의 서울 개최가 확정되면서, 필요시설로서 서울종합운동장 건설사업은 박차가 가해졌다. 1982년 6월 야구장(1만 8000평 : 5만 명 수용능력)이 준공되었고, 시설면적 4만 평에 수용인원 10만 명, 2층 구조 관람석을 갖춘 주경기장도 1984년 9월에 개장하였다. /naver
[1954년] 영화인 윤백남씨 사망
← 영화인 윤백남씨
우리나라 대중예술을 개척하고 보급시킨 영화인 윤백남씨가 1954년 9월 29일 사망했다. 충남 논산 태생인 윤백남은 경성학당 중학부에 입학, 신학문에 눈뜨게 되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그는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 조선 황실에서 주는 관비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국비유학생은 정경과목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일제의 방침으로 동경고등상업학교로 옮겨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윤백남은 관심을 문학과 예술로 돌려 일본 현대문학을 섭렵하면서 신파극과 영화에 심취했다. 1912년 일본유학생인 조중환과 극단 ‘문수성’을 창단, 연극활동을 시작했으며, 1922년에는 ‘민중극단’을 설립해 신극운동을 전개하면서 희곡작가로도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문학가로서도 두각을 보여 중국고전 ‘수호지’를 번역하고, 역사소설 ‘대도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활동사진이 보급되자 윤백남은 1923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본격적인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발표하는 등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주요작품으로 영화 ‘운영전’ 소설 ‘흑두건’ 희곡 ‘운명’ ‘야화’ 등이 있다./조선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지명
←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강연회를 갖고 있다.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씨가 71년 대통령선거의 후보로 지명됐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의원의 40대 후보 3명의 경합 끝에 제1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가 추천한 김영삼 후보가 최다 특표자가 됐으나 후보지명의 요건인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차 투표가 실시됐다. 2차투표 결과 총투표자 8백84명의 과반수인 4백58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후보가 됐다. 김영삼씨는 4백10표를 얻었다.
2차투표 직전 이철승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던 비주류계가 이탈해 대세를 뒤집었다. 대통령후보가 된 김대중씨는 후보수락연설을 통해 "앞으로 당이 단결해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교체하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조선
[1950년] 시인 김영랑 사망
← 시인 김영랑
김소월 이후 우리말 구사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서정시인 김영랑이 1950년 9월 29일 타계했다. 전남 강진의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상경해 휘문의숙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서 영랑은 하나의 샘이었다. 김억과 김소월이 그 샘으로 흘러들었고 서정주와 박재삼이 그 샘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시는 ‘북도에 소월,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섬세하면서도 깨끗한 언어 감각과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잘 다듬어진 시형에 의해 고독한 내면의 세계를 주로 노래했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고유어를 발굴하고 향토어인 전라도 방언을 널리 사용함은 물론 독창적인 조어를 활용하는 등 우리 언어의 미적인 가치를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대표시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마음을 아실 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독을 차고’ 등이 있으며, 1935년 ‘영랑 시집’을 출간했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설치
← 제헌국회
1948년 9월 29일 제헌국회 내에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집행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 이하 8명의 위원과 중앙사무국, 각도 조사부,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를 두었다. 반민특위는 구성 후 약 3개월 동안 친일분자들의 행적을 추적해 예비조사를 마치고 1949년 1월 8일 박흥식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여론과 언론, 국민 대다수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49년 1월 25일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장 최난수 등이 반민특위 위원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발표되었고, 1949년 8월 7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 청사를 둘러싸고 특경대원을 강제로 연행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경찰국장 김태선은 특경대의 무장해제는 정부로부터 지시된 사항이라고 해명했고,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은 국회에 법적인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활동은 특경대의 해체와 함께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으며, 1949년 8월 22일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실제 체형을 받은 사람은 7명에 불과했으며, 이들도 감형이나 석방 처리되어 친일파 및 친일잔재 처리문제는 미제로 남게 되었다.
[1943년] 바웬사(Lech Walesa) 출생
← 바웬사
바웬사는 연대자유노조 의장으로 수백만 폴란드 노동자들을 이끈 노동운동가이며 정치가이다. 1980년 8월 4일 식료품 가격의 인상과 바웬사 및 다른 두 노조 활동가들의 해고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된 파업은 그다인스크-소포트-그디니아 지역의 공장들을 묶는 공장연합파업위원회의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결국 8월 31일 바웬사와 폴란드 초대 부총리 야지엘스키는 임금 인상과 더 많은 정치적·종교적 표현의 자유의 허용과 노동자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조직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했다. 그후 공장연합파업위원회는 연대자유노조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정부는 계엄령을 발표하고, 연대자유노조를 불법화했으며, 바웬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대자유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1983년 그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는데, 폴란드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그의 부인이 노르웨이로 가서 수상식에 참여했다. 1986~87년 자서전 <희망의 길 Un Chemin d'Espoir>을 파리로 밀반출해 출판했다. 1988~89년에는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참여해 연대자유노조와 다른 노조들의 법적 지위 회복, 새로 부활된 폴란드 의회 구성을 위한 자유로운 의원선거, 대통령직의 설치, 일정한 경제적 변화조치의 발표 등을 얻어냈다. 1990년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38년] 뮌헨회담, 주데텐란트 獨양도 합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설치 뮌헨회담의 주체들. 왼쪽부터 체임벌린(영국), 달라디에(프랑스), 히틀러(독일), 무솔리니(이탈리아).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자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안전보장을 호소했다. 9월 15일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향후 1주일간 무력 침공을 자제하겠다는 언질만 받아냈다.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체임벌린은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와 이 문제를 협의한 끝에 체코를 독일에 넘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소리만 했을 뿐 영·불의 합의를 따라야 했다. 힘 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2일의 두 번째 회동에서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즉시’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체코와 영·불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함대까지 동원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최후 통첩을 보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영·불은 꼬리를 내리며 타협으로 방향을 틀었다.
9월 29일 당사국인 체코를 제외시킨 채 뮌헨에 모인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는 밤샘 협상 끝에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체코에는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체임벌린에게는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는 영국인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함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1924년] 연극인 장민호(張民虎) 출생
← 장민호
1924. 9. 29 황해 신천~.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를 졸업하고 8·15해방직후 현철이 만든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연기자가 되기 위한 기초교육을 받았고, 1946년 기독교 계통 아마추어 극단인 원예술좌의 성극 〈모세〉에 주인공으로 첫출연했다. 본격적인 연극활동은 피난시절 대구에서 신극협의회 단원이 되면서이고, 정동의 중앙방송 제1기 배우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1967년 국립극단에 입단, 〈세 자매〉·〈성웅 이순신〉·〈남한산성〉·〈파우스트〉·〈꿈하늘〉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한편 1986년 〈바냐 아저씨〉, 1991년 〈소〉를 연출하기도 했다. 1950~60년대에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제작했다. 라디오 성우로는 300여 작품에 참가했고, 텔레비전 드라마 50여 편에 출연했다. 1967~71, 1979~90년에 국립극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적당한 체구에 적당한 음성을 가진 배우'라고 자신을 표현한 그는 대한민국예술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1993년 현재 국립극단 지도위원, 예술원 회원이다.
[1923년] 영국,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개시
1923년 9월 29일 영국은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1917년 11월 2일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을 내놓았다.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투쟁하고 있던 시온주의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주요 연합국들도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은 이러한 밸푸어 선언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위임통치 중이던 1939년 5월 정책을 바꿔, 유대인 추가 이주 대상자의 수를 제한하고 1944년에 이주를 완료할 것을 제안하는 백서를 발표해 시온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팔레스타인 문제는 국제연합(UN)으로 넘어갔고, 1947년 11월 29일 UN 총회는 팔레스타인에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따로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수립이 선포되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영국 관리들도 팔레스타인에서 모두 철수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1913년] 독일의 기계 기술자, 디젤기관의 발명자 디젤(Diesel, Rudolf, 1858~1913) 사망
파리 출생.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 양친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 뮌헨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파리의 린데냉동기제조회사에 입사하여 냉동기 제작에 종사하는 한편 열기관을 연구하여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구조 Theorie und Konstruktion eines rationellen W rmemotors》(1893)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이 이론은 크루프와 아우크스부르크 기계회사에 의해 인정을 받아, 그 원조로 1897년 최초의 실용적인 디젤기관이 제작되었다. 그 후 세계 각국의 기관 제조회사들은 디젤기관의 고능률에 주목, 다투어 특허권을 양도받았다. 1913년 영국 해군성 초청으로 런던으로 항해 중, 영국해협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naver
[1908년] 극작가·연출가 이광래(李光來) 출생
1908. 9. 29 경남 마산~1968. 10. 29.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를 시작으로 30여 년 동안 연극계에 전념했다. 본명은 흥근(興根). 호는 온재(溫齋).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도쿄[東京]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중앙일보〉 기자를 지냈고, 1935년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여 연극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극단 중앙무대를 설립, 1945년에는 극단 민족예술무대를 조직해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족연극운동을 벌였다. 1949년 유치진과 함께 한국연극학회를 조직했고,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인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의 대표,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초대 학과장을 지냈다. 1955~68년 한국문학가협회 희곡분과위원장,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1958년에는 극단 원방각(圓方角)을 조직하고 소극장운동을 벌였다.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장막극 〈촌선생 村先生〉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주로 반사실주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 표현주의극을 썼다. 대표작 〈석류나무 집〉(조광, 1937. 4~6)을 비롯해 〈견우와 직녀〉(1954)·〈대수양〉(1959)·〈지옥문을 열어라〉(1966)등을 발표했다. 1938년 H. J. 입센의 〈헬게란드의 해적〉을 포함하여 모두 40여 편을 연출하면서 뮤지컬과 심포니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 연극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극시형태론〉·〈제4벽을 모색함〉·〈비극미에 관한 서설적 개관〉 등을 발표했고, 평론집으로 〈현대희곡론〉(1982)을 펴냈다. 1965년 오월문예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1758년] 영국의 해군사령관 넬슨(Nelson, Horatio, 1758~1805) 출생
노퍽 출생. 1770년 해군에 입대하여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후, 프랑스의 혁명전쟁에 종군하여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싸웠다. 1794년에는 코르시카섬 점령에 공을 세웠으나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1797년의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도 수훈을 세웠으나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나폴레옹 대두와 더불어 프랑스 함대와 대결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1798년 나일강 입구의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여 ‘나일강의 남작’이라 불렸다. 그러나 나폴리 체재 중 알게 된 해밀턴 부인과의 친교로 일시 군무(軍務)를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1801년부터 다시 해상에 나갔고, 같은 해에 자작이 되었으며, 1803년부터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함대를 견제하였다. 1805년 봉쇄한 풀롱항(港)에서 탈출한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여, 그 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포착, 대담한 분단작전으로 이를 격멸시켰으나, 완승 직전에 적의 저격을 받아,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기함 빅토리아호(號)에서 전사하였다. /naver
그 밖에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에서 북한 정성옥선수 금메달
1997년 제41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개막. 1‘핵폐기물 이전’ 안전협약 서명
1990년 지역의료보험에 의료비 지원제 도입
1987년 국내전화 1천만회선 돌파
1984년 북한, 한국에 수재물자 제공
1983년 서울,인천 등에 하수도료 첫 부과하기로 발표
1982년 제일은행 민영화
1981년 농수산부, 5차5개년 농수산부문계획 발표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공고
1972년 일본-중국 국교정상화
1970년 문공부, ‘사상계’ 폐간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우승(한국,일본,중국,필리핀 참가)
1962년 정부, 인도네시아와 통상협정 조인
1961년 프랑스-튜니지아, 프랑스군의 철수에 조인
1956년 한국참전 16개국 휴전감시위원단 철수결정
1948년 미국-영국-프랑스 3국, 베를린문제를 유엔에 정식 제의
1935년 조선육상경기협회, 제1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개최
1927년 네덜란드의 생리학자 에인트호벤 사망 - 심장의 전기적 성질을 발견한 공로로 1924년 노벨 의학상 수상
1925년 프랑스의 정치가 부르주아 사망 - 국제연맹 결성 추진으로 1920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12년 발칸동맹 성립
1911년 트리폴리 전쟁
1902년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사망
1900년 전신-우편업무 관청 ‘통신원’ 창설
1890년 성공회 선교(조선 고종 27년)
1868년 스페인혁명으로 여왕 이사벨라, 프랑스로 망명
1504년 갑자사화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