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9월10일
김밥과 수육
더워지기 전에 병원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아홉 시에 진료를 시작하니 집에서 걸어가는 시간을 고려해서 출발했다.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선 길을 따라 20분 정도 보통 걸음으로 가면 병원에 도착한다. 은사님이 선물로 사주신 레이스가 달린 하얀 양산을 챙겼다. 햇볕에 모자나 양산을 쓰지 않고 다니는 제자에게 젊어서는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 피부가 엉망이 된다고 지금부터 양산도 쓰고 번거로워도 모자를 챙겨서 쓰고 다니라고 당부하셨다. 그때는 양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 어색하고 따로 챙겨서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았다.
내 취향의 양산은 아니다. 레이스가 달린 흔히들 말하는 공주 스타일 양산이다. 옷장에 소중하게 보관해서 색상도 눈부시게 하얗고 레이스도 사랑스럽다. 양산을 쓰고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그늘이 지고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니 산책하기 딱 좋은 아침이다.
병원에는 막 진료실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 진료실 앞에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어서 진료 대기실에 켜놓은 에어컨 바람을 진료실로 선풍기가 몰아주고 있었다. 혈압약을 처방받으러 매달 병원을 방문한다. 혈압이 많이 내려가서 약을 낮춰준다는 말씀에 기분이 좋았다. 열심히 걷고 근력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니, 관리가 잘 되는 것 같다.
점심으로 무엇을 해줄까? 늦게 일어난 아들에게 물어본다. 속마음은 어제 배달해서 먹고 남은 찜닭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희미하게 어제 아들에게 오늘 점심에 김밥을 말아주겠다고 약속한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아침에 김밥 만들 생각에 밥을 미리 지어놓았는데 아들이 그냥 찜닭으로 먹겠다고 하면 저녁으로 미룰 생각이었다. 아들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무슨 생각이 있는 듯했다. 어제 약속한 김밥을 잊지 않고 지금 머릿속에 김밥을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밥하고 남은 찜닭하고 먹을까?’일찍 병원에 다녀온다고 아침을 걸러서 무척 배가 고팠다. “김밥 속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겠어?”물으니 자기는 괜찮은데, 하면서 말을 줄인다.
내가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조금 무안했다. 얼른 마음을 고쳐먹고 김밥 말기에 들어갔다.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일사천리로 김밥 만들기에 들어가니 후다닥 10줄을 말았다. 아들이 김밥을 좋아한다. 찜닭과 김밥을 멋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잘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남편 월급날이다. 수고한 남편에게 수육을 만들어서 저녁에 술 한 잔하기로 했다. 막바지 무더위가 장난이 아니다. 34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불 앞에서 요리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펄펄 끓는 곰솥 열기에 거실 온도가 올라간다. 고기 냄새도 만만치 않다. 에어컨을 켜놓고 한 시간 정도 삶았다. 오전에는 김밥을 말고 오후에는 수육을 삶으면서 나도 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거실에서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소주에 야들야들하게 삶은 수육을 안주로 술 한 잔하니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 달 수고했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