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⑪북어 세 마리로 차린 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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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7월 7일 오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장인기와 이호관을 팀장으로 하는 문화재연구실 조사단 4명이 도착한데 이어 이날 오후 3시쯤에는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원룡이 현지에서 합류함으로써 발굴단 진용은 갖춰졌다.
공주 현지에서는 공주박물관장 김영배와 공주사범대 교수들인 안승주, 박용진이 합세했다. 김원룡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무령왕릉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 알기 어렵다.
다만 김원룡이 남긴 글 한 대목을 보면 이날 오후 도착하자마자 '우선 문제의 전벽(塼壁-전돌로 쌓은 벽)과 아-치형 구조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전벽 앞에 방형(方形. 사각형)의 수광(竪壙)을 파 내려가기로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방침에 따라 본격 발굴은 이날 오후 4시쯤 시작됐는데 이때 상황을 김원룡은 '전벽 정상으로부터 약 1m 밑에서부터 아-치형 입구를 횡적(橫積.옆으로 쌓기)한 전(塼)으로 폐색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증언이 정확하다면 김원룡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령왕릉은 전돌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위쪽 벽면 일부와 그 한가운데서 아치형으로 생긴 무덤방 입구 윗 부분이 겨우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원룡에 따르면 무덤 전면만큼은 완전히 노출시킨 다음 본격 발굴은 다음날 들어가기로 이날 결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첫날 발굴작업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8일 자정 30분 전까지 계속됐다. 무령왕릉 입구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 때쯤 이날 오전 공주 발굴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발굴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려 서울로 되돌아갔던 이호관이 다시 도착했다.
이때 작업 진척상황에 대해 김원룡은 매우 더뎠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전축분 입구 쪽 땅이 대단히 단단했고 둘째는 저녁 무렵 내리기 시작한 비가 갑자기 폭우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때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는 '양동이처럼 쏟아붓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엄청난 비는 난생 처음이었다'는 이호관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폭우로 돌변한 비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다. 아치형 무덤방 입구가 있는 무덤 앞면을 완전히 노출시키기는 했으나 이를 위해 마치 구덩이식으로 땅을 파내려간 게 문제였다. 빗물을 빼낼 곳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는 장마철이었는데도 혹여 있을지 모를 비 생각을 아무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빗물은 점점 고이고 있었고 자칫 무덤 안쪽으로 역류해 들어갈 염려가 생겼다. 놀란 발굴단은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허겁지겁 구덩이 한쪽 귀퉁이를 파헤쳐 배수로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작업이 모두 끝난 것이 7일 밤 11시 30분쯤이었다고 한다. 칠흑 같은 밤을 뚫고 배수로 개설 작업을 한 것이다.
폭우다, 배수로 작업이다 하면서 발굴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폭우를 뚫고 홀연히 나타난 한 인물이 김원룡을 비롯한 발굴단을 경악하게 한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허영환이 사진기자 1명을 대동하고 난데없이 이날 저녁 무렵 김원룡이 머물고 있던 동명여관에 나타난 것이다.
허영환은 분명 공주에 도착한 첫날인 7일에는 송산리 발굴 현장에는 가보지 못했고 이날 오후 6시쯤 김원룡을 여관에서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자신이 이날 자정 무렵까지 마치 무령왕릉 발굴현장에서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 개설 작업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김원룡의 증언과 배치되는 듯하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있는 조유전은 '내 기억으로도 7일은 그렇게 늦게까지 작업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하고 있다. 혹시 김원룡을 비롯한 발굴단은 현장에서 철수하고 인부들만 남아 이날 자정께까지 배수로 공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김원룡은 또한 '이 무렵부터 전축분 출현의 뉴스를 들은 서울의 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김원룡의 착각이 아닌가 싶다. 첫날 현장에 나타난 기자는 허영환 정도였고 다른 언론사 취재단이 물밀듯이 밀려든 것은 허영환이 '공주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기사를 조간(지방판) 1면에 보도한 8일이었기 때문이다.
발굴단이 철수하고 난 다음 밤새 현장을 지킨 것은 공주경찰서였다. 발굴단 숙소는 두 곳이었는데 김원룡을 비롯한 이른바 수뇌급은 동명여관이란 곳에 묵었고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과 같은 '졸병'들은 금강여관에 투숙했다.
그러면 허영환은 어떻게 했을까? 고급 정보를 캐내려면 수뇌급에 붙어야 한다. 그래서 허영환은 동명여관을 골랐다. 그것도 김원룡 바로 옆방을 잡았다.
날이 밝자 억수같던 폭우도 씻은 듯 사라졌다. 8일 새벽 5시쯤 현장을 다시 찾은 발굴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히도 걱정했던 빗물은 말끔히 빠져 었었다.
이 대목을 김원룡은 '8일 아침 5시에 발굴단 간부들은 보도진과 함께 현장으로 가 보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때 동행한 기자로는 허영환에 따르면 그를 포함해 지방지 및 중앙지 지방주재 기자 몇 명이 있었다고 한다.
발굴은 이날 오전 8시에 인부 12명을 투입한 가운데 재개됐다. 전날 채 파지 못한 무덤 입구 쪽을 완전히 노출시켜야 했다. 하지만 전날과 마찬가지로 작업은 미적댔다. 왜냐하면 무덤 입구 쪽 땅이 석회가 섞여 매우 단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날 오후 3시쯤에는 무덤 입구 바닥까지 완전히 모습이 드러났다. 수많은 전돌을 가로눕혀 차곡차곡 쌓은 벽면 한가운데로 누가 봐도 무덤 방 입구로 생각할 수 있는 아치형 문이 완연해진 것이다. 이 무덤이 그 바로 앞쪽 송산리 6호분과 거의 똑같은 전축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벽돌로 덕지덕지 쌓아놓은 아치형 문을 뚫고 들어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무령왕릉은 공개적으로 발굴된 최초이자 마지막 유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거의 모든 발굴 장면과 현장이 고스란히 일반인에게도 공개됐기 때문이다. 발굴단이 현장을 공개하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오전 전축분 발견 뉴스를 듣고 각 언론사 취재단은 물론이고 공주 현지 주민들까지도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당시 발굴 장면 사진들을 보면 발굴단이나 취재진은 물론이고 아이를 등에 업은 아주머니에서 밀짚모자를 눌러쓴 농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해야 할 현지 경찰관들조차 경비는 뒷전인 채 발굴 현장을 보겠다고 서로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웅성대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최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덤 입구가 완연히 드러나자 분위기는 돌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보다 취재진이 김원룡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빨리 무덤을 열어 보라고 아우성쳤다. 덩달아 공주 주민들도 가세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닫기 시작했다.
이런 소란과 아우성을 뒤로 하고 발굴단은 무덤 문을 열기에 앞서 제사상을 차렸다. 이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 줄도 모르고 발굴단이 제사를 올리는 장면이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는데 제사상에는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덩이가 올라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으로는 잘 판독되지 않으나 제사에 빠질 수 없는 술로는 막걸리가 동원됐다고 한다. 제사상을 물린 뒤 드디어 김원룡과 김영배가 1500년 동안이나 막혀 있던 무덤방 입구 전돌을 걷어내기 시작하니 이 때가 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15분이었다.
첫댓글 주먹구구식의 초기 발굴의 현장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역사의식도 생겨났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 분들께 고마움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