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1~8)
'그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도, 고통의 신음도, 통곡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세상 올무가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4절)
어제 본문까지 심판을 통해
영원한 징계를 부여하는 내용 중심으로 묵상하였다.
하나님께서
기나 긴 시간을 인내와 설득으로
천국을 선택하기를 원하셨지만
끝끝내 반대의 길을 선택한 이들에게
더 이상 구제의 길이 없는 상태임을 보여주는 과정이 심판이다.
표현할 길이 없이... 우주에서 가장 안 좋은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하신다.
7절의 내용,'
'He who overcome will inherit all this...' 처럼
이 땅에서의 어려움과 시험을 끝내 극복한 이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
그 세계는 아마도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지극히 찬란한 어떤 지경이라고 추측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절망 가운데 있게 하는
'죽음, 고통의 신음, 통곡, 고통....'
이런 것들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니
그 기쁨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런 것들이 아예 제거된다고 선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폭력과 부조리의 고통으로부터,
비상식적인 피해로부터,
치유가 어려운 질병과 그 증상의 아픔으로부터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모든 어려움과 통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러고 보면,
아무리 신자의 명함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과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죄의 유혹으로부터, 세상 고통의 절망으로부터
딛고 일어서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 성령의 touch는 분명 위력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touch에 등을 돌리는 신자가 있다.
그러니 죄의 유혹, 욕망의 선택을 딛고 일어서는 '극복'과 '투쟁'은
분명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올까?
나의 의지는 너무 빈약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만이 극복할 힘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가지려는
선택권을 용기 있고 단호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 내 몫이다.
그리고 모든 전인격적 요소를 발휘하여
그 선택권이 실현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아래의 명언을 참고하자.
<오늘의 명언>
이 땅에서 '잠시' 고통당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도에겐 '영원히' 고통 없는 나라가 준비되어 있다. -휴 마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 -C.S. 루이스-
나의 궁극적 희망이 천국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지금의 이생도 조금씩 천국으로 느껴지는 기적을 맛볼 수 있으리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각이 복잡합니다. 나라도 혼란스럽습니다.
원래 이 세상이 그렇지요?^^
저 앞에 다가오는 시험과 유혹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의 길을 결국 선택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지금 저에게 당한 시험과 죄가 있습니다.
숙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의 길을 따르려는
분투의 삶을 놓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주변의 아픈 이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인, '평안'의 힘을 불어 넣어주십시오.
현영이와 수연이의 새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축복의 길, 복음적 사랑을 실현하는 처소가 되게 해 주십시오.
감사 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