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 5년 무진(1868, 동치 7) 4월 9일(정해) 맑음
좌목 행행할 때 올린 유학 최기헌 등의 상언에 대해 한성부 등에 이문하여 실적을 탐지하여 품처하겠다는 예조의 계
○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행행할 때에 올린 말에 대하여 해조로 하여금 해당 도에 관문으로 물어 상세히 조사하여 계문하게 하라는 일로 하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각각 올린 말에 대하여 취하여 상고하니, 그 내용들이 이러하였습니다. 유학 최기헌(崔箕憲) 등은 동부(東部)의 고 통덕랑 김홍준(金弘俊)의 효행에 대하여 정포(旌褒)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섭원(李燮遠) 등은 서부(西部)의 고 학생 최인섭(崔仁燮)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旌閭)해 달라는 일이었고, 개성부(開城府) 유학 마광래(馬光來) 등은 본부의 유학 한수용(韓壽容)의 효행과 학식에 대하여 포양(褒揚)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원거(金元擧) 등은 본부의 선비 최봉서(崔鳳瑞)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윤헌주(尹憲胄) 등은 본부의 고 학생 최시민(崔時民)의 처 한씨(韓氏)의 효행과 정렬에 대하여 정려하고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수원부 진사 이용달(李容達) 등은 본부의 고 학생 목인수(睦仁壽)와 그의 처 조씨(趙氏)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상호(崔相鎬) 등은 본부의 고 학생 정덕봉(鄭德鳳)과 그의 아들 술제(述制)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광주(廣州)의 유학 유승환(兪昇煥) 등은 본부의 고 학생 이기효(李基孝)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경기 유학 정도(鄭鍍) 등은 마전(麻田)의 고 선비 송은진(宋殷鎭)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교철(李敎轍) 등은 명 나라 총병(總兵) 유정(劉綎)의 7대손인 가평(加平)의 유학 상룡(相龍)ㆍ상완(相完) 등은 황단(皇壇)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안종정(安鍾正) 등은 여주(驪州)의 고 선비 이성익(李聖翊)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근종(李根鍾) 등은 삭령(朔寧)의 고 학생 유석로(柳錫魯)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명수(朴命壽) 등은 용인의 선비 김상집(金相集)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홍대부(洪大溥) 등은 남양(南陽)의 고 선비 김문언(金文彥)의 처 송씨(宋氏)의 효행과 정렬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공충도 진사 이낙주(李洛周) 등은 한산(韓山)의 고 학생 권제민(權躋敏)의 효행과 그의 자부 김씨(金氏)의 정렬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유용주(兪龍柱) 등은 부여(扶餘)의 고 학생 김봉택(金鳳澤)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신익휴(申翊休) 등은 고 헌납 강진태(姜鎭泰)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하고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민구(李敏九) 등은 목천(木川)의 고 선비 김성건(金城健)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정계원(鄭啓源) 등은 충주의 증 동몽교관 권병성(權秉性)ㆍ권명성(權命性) 형제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상진(金尙鎭) 등은 충주의 고 사인 김종귀(金鍾龜)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기돈(朴基敦) 등은 은진(恩津)의 고 학생 서명달(徐命達)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송능수(宋能洙) 등은 서원(西原)의 고 학생 변영박(卞榮璞)의 처 홍씨(洪氏)의 정렬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사구(金思九) 등은 공주의 유학 이기원(李基遠)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강난수(姜蘭秀) 등은 전의(全義)의 고 학생 송인순(宋仁純)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민치흠(閔致欽) 등은 청안(淸安)의 고 학생 강흥창(姜興昌)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제한(金濟漢) 등은 청안(淸安)의 고 학생 이원재(李源栽)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태진(金泰鎭)은 보령(保寧)의 고 학생 전경회(田慶會)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병표(李秉杓) 등은 서원(西原)의 고 학생 오택환(吳宅煥)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노채(李魯采) 등은 한산(韓山)의 고 학생 이국형(李國馨)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면칠(李勉七) 등은 공주의 고 학생 임명원(林命源)의 효행과 그의 처 노씨(盧氏)의 정렬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우근(金愚根) 등은 홍산(鴻山)의 증 동몽교관 윤행문(尹行文)의 처 이씨(李氏)의 정렬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상념(金商念) 등은 서산(瑞山)의 유학 손영만(孫永璊)의 처 조씨(趙氏)의 효행과 그의 아들 석린(錫麟)의 처 이씨(李氏)의 정렬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한광직(韓光直) 등은 옥천(沃川)의 고 학생 유한귀(柳漢貴)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인승(李寅承) 등은 보령(保寧)의 고 학생 김항진(金恒鎭)의 처 이씨(李氏)의 효열(孝烈)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기재(金箕宰) 등은 홍산(鴻山)의 고 사인(士人) 최진익(崔振翼)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신빈(申彬) 등은 보은(報恩)의 유학 최봉진(崔鳳鎭)의 효성과 학문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신석현(申奭顯) 등은 보령의 고 학생 우걸(禹傑)과 그의 아들 고 학생 우대창(禹大昌)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오치귀(吳致龜) 등은 충주의 고 학생 김건형(金虔亨)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민치양(閔致養) 등은 진천(鎭川)의 고 통덕랑 신형(申珩)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박영무(朴永茂) 등은 보령의 고 사인 이필석(李弼錫)의 효행에 대하여 정포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상후(金商厚) 등은 한산(韓山)의 고 학생 이동수(李東秀)와 그의 아들 고 학생 이의범(李義範)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서병오(徐秉五) 등은 보은의 유학 안사량(安思良)의 자부 주씨(周氏)의 열행(烈行)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강원도의 유학 김지수(金芝秀) 등은 홍천(洪川)의 고 유학 최효성(崔孝聖)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정세남(鄭世南) 등은 삼척(三陟)의 고 역리(驛吏) 이주찬(李周粲)의 처 김 조이(金召史)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동목(金東穆) 등은 강릉의 고 학생 최양호(崔養浩)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시욱(金始郁) 등은 인제(麟蹄)의 유학 심종하(沈鍾河)의 처 허씨(許氏)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의수(金義秀) 등은 홍천의 고 학생 이시영(李時永)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황해도 유학 이기승(李基升) 등은 황주목(黃州牧)의 고 학생 홍희규(洪熙奎)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회문(李會汶) 등은 황주목의 고 학생 나덕은(羅德隱)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지홍(李之洪) 등은 신천(信川)의 고 학생 조희일(曺希一)과 그의 아들 조연묵(曺淵默)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현한붕(玄漢鵬) 등은 봉산(鳳山)의 고 학생 정필하(鄭弼夏)의 처 최씨(崔氏)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원장(李源章) 등은 송화(松禾)의 고 사인 이최명(李最明)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조경진(趙景鎭) 등은 황주(黃州)의 고 부사 김도명(金道鳴)과 그의 아들 김수정(金壽鼎)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동식(朴東植) 등은 문화(文化)의 동몽 이연택(李然澤)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전라도 유학 기재현(奇在鉉) 등은 남평(南平)의 고 학생 이우룡(李愚龍)의 처 편씨(片氏)의 효열(孝烈)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권복수(權福洙) 등은 전주 고 학생 박정식(朴正植)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정창신(丁昌信) 등은 장흥(長興)의 유학 백낙흥(白樂興)의 어머니 위씨(魏氏)의 열행(烈行)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병주(李秉柱) 등은 남원의 고 사인 서유경(徐有敬)과 그의 아들 서한보(徐漢輔)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양인영(梁仁永) 등은 나주(羅州)의 고주부 윤의(尹義)의 충절과 그의 처 최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경집(金敬集) 등은 흥덕(興德)의 고 학생 이익성(李益盛)과 그의 아들 이임옥(李林玉)의 충절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장로(李長魯) 등은 담양(潭陽)의 고 사인 진창석(陳昌奭)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정백(李鼎伯) 등은 영광(靈光)의 고 교리 김응수(金應壽)의 충절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민치종(閔致琮) 등은 능주(綾州)의 고 학생 김덕기(金德基)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서영인(徐永仁) 등은 만경(萬頃)의 고 학생 최주곤(崔柱昆)ㆍ최주각(崔柱角) 형제의 효행과 학문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병용(李秉容) 등은 보성(寶城) 고 학생 최봉구(崔鳳求)와 그의 아우 최봉현(崔鳳現)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내진(李來鎭) 등은 강진(康津)의 고 학생 장익수(張益壽)의 처 정씨(鄭氏)의 효열(孝烈)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원우(李源祐) 등은 고부(古阜)의 고 학생 김종려(金宗麗)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권정헌(權正憲) 등은 전주의 고 학생 황석정(黃碩政)과 그의 처 윤씨(尹氏)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학선(崔學善) 등은 전주의 고 학생 백상수(白象洙)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권주헌(權周憲) 등은 강진(康津)의 유학 임백우(林伯雨)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신지(崔愼之) 등은 광주(光州)의 고 유학 김정국(金廷國)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임백원(林伯遠) 등은 부여(扶餘)의 고 학생 김행원(金行元)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고세진(高世鎭) 등은 영광(靈光)의 고 학생 노득좌(魯得佐)의 처 김씨(金氏)의 열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겸택(李謙澤) 등은 남원(南原)의 사인 장창규(張彰圭)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復戶)시켜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흥겸(朴興謙) 등은 전주의 고 학생 이근섭(李根燮)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석균(金錫均) 등은 무안(務安)의 고 학생 정윤진(鄭胤晉)과 그의 증손 고 학생 정인겸(鄭仁謙)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학룡(朴學龍) 등은 전주의 유학 안성환(安性煥)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시켜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강응태(姜膺泰) 등은 김제(金堤)의 고 학생 조동구(趙東觩)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홍기주(洪基周) 등은 나주(羅州)의 고 학생 김위경(金渭慶)과 그의 아들 김한려(金漢麗)와 그의 손자 김양주(金養柱) 삼대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진(李珍) 등은 금구(金溝)의 고 학생 정수열(鄭壽悅)의 처 김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도호(李道鎬) 등은 전주의 사인 이명록(李命祿)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창희(李昌爔) 등은 능주(綾州)의 고 통정대부(通政大夫) 김국정(金國禎)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종기(李鍾器) 등은 곡성(谷城)의 고 학생 이철국(李喆國)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응기(李應基) 등은 장수(長水)의 고 사인 박치기(朴致基)의 처 김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응휴(李膺休) 등은 부안(扶安)의 고 학생 박지복(朴之復)과 그의 아들 유학 박순일(朴淳一)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문영(朴文英) 등은 보성(寶城)의 고 학생 소영동(蘇永東)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황원룡(黃元龍) 등은 전주의 진사 김상린(金相麟)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고시한(高時瀚) 등은 무안(務安)의 고 사인 정사묵(鄭師默)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기수(崔基洙) 등은 강진(康津)의 유학 이동욱(李東郁)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조세묵(趙世默) 등은 김제의 고 학생 강휘순(姜徽珣)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원효(李元孝) 등은 진안(鎭安)의 고 학생 김상현(金尙鉉)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고제만(高濟萬) 등은 태인(泰仁)의 고 사인 김득전(金得全)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최억(崔嶷) 등은 남원의 고 사인 박재춘(朴載春)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재천(金在天) 등은 무장(茂長)의 동몽교관 정희주(鄭熙周)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익성(金翊聲) 등은 전주의 고 학생 김영희(金永禧)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최억(崔嶷) 등은 남원의 고 사인 이정도(李鼎導)의 처 조씨(曺氏)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치붕(李致鵬) 등은 임실(任實)의 고 사인 정성한(丁聖漢)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나정한(羅貞漢) 등은 나주의 유학 박익열(朴益烈)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고제필(高濟弼) 등은 태인의 유학 김일채(金一采)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귀로(李龜魯) 등은 함열(咸悅)의 사인 유택규(劉擇奎)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오상룡(吳相龍) 등은 운봉(雲峯)의 유학 김상일(金尙鎰)과 고 학생 김치일(金致鎰)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한일(崔漢一) 등은 만경(萬頃)의 고 통훈대부 박응권(朴應權)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병규(崔炳奎) 등은 보성의 고 효자 소진국(蘇震國)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유원(柳源) 등은 전주의 고 학생 고이창(高以昌)과 그의 증손 고인국(高仁國)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전세풍(田世豐) 등은 옥구(沃溝)의 고 학생 문희석(文希奭)과 그의 증손 고 학생 문계인(文啓仁)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유영석(柳永碩) 등은 전주의 유학 박재영(朴載瑛)과 그의 누이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조세묵(趙世默) 등은 김제의 고 학생 이응백(李應白)의 처 이씨(李氏)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두환(金斗煥) 등은 함평(咸平)의 고 학생 김정언(金廷彥)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조정현(趙廷顯) 등은 능주의 고 사인 한영진(韓榮軫)의 처 유씨(兪氏)와 그의 종손부인 유석모(兪錫模)의 처 최씨(崔氏)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종명(金鍾鳴) 등은 임피(臨陂)의 유학 고유종(高有鍾)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시켜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신유장(辛裕章) 등은 무안의 고 효자 정중의(丁重義)ㆍ정부의(丁副義)와 그의 종제 정인득(丁仁得)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오승규(吳昇圭) 등은 보성의 고 학생 서두순(徐斗純)의 처 임씨(任氏)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생원 황수정(黃秀精) 등은 흥덕(興德)의 고 학생 임희린(任希麟)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송재한(宋在漢) 등은 전주의 고 학생 박익종(朴益宗)의 처 이씨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유상하(柳相夏) 등은 광주의 고 학생 한석효(韓錫斅)의 효행과 학문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유동섭(柳東燮) 등은 태인의 유학 박치룡(朴致龍)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세흠(李世欽) 등은 무안의 고 학생 임한원(林漢遠)의 처 강씨(姜氏)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고재진(高在鎭) 등은 고부(古阜)의 고 처사 김태운(金泰運)의 충절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정동훈(鄭東勳) 등은 광주의 고 사인 정호흠(鄭浩欽)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조정빈(趙廷彬) 등은 순천의 고 학생 오인규(吳寅圭)의 처 김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정동룡(鄭東龍) 등은 무주(茂朱)의 고 사인 백용진(白龍鎭)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하고 그의 아들 백기수(白基洙)와 그의 손자 백낙도(白樂道)의 효행에 대하여 복호시켜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중택(朴重宅) 등은 보성의 고 학생 선달수(宣達洙)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경호(朴景浩) 등은 나주의 고 학생 박경봉(朴慶鳳)의 효행과 그의 처 김씨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오철순(吳哲淳) 등은 곡성의 고 학생 이석로(李錫魯)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윤정대(尹正大) 등은 전주의 고 사인 김관유(金寬裕)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최우민(崔遇民) 등은 남원의 고 사인 설광열(薛匡烈)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윤창규(尹昌圭) 등은 김제의 고 효자 황만정(黃萬正)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최억(崔嶷) 등은 남원의 고 학생 최득만(崔得萬)ㆍ최득령(崔得齡)의 효행과 그의 어머니 백씨(白氏)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오영익(吳榮益) 등은 전주의 고 사인 이규연(李圭淵)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경상도 유학 정호영(鄭祜永) 등은 대구(大丘)의 고 절도사 양치(楊治)의 절의(節義)에 대하여 포양하기를 청한 일이었고, 유학 정광옥(鄭光玉) 등은 거창(居昌)의 고 학생 백만수(白萬洙)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홍은표(洪殷標) 등은 용궁의 고 사인 고술겸(高述謙)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시근(李時根) 등은 거창의 유학 박창식(朴昌植)의 처 배씨(裵氏)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주희백(周熙伯) 등은 칠원(漆原)의 유학 차봉의(車鳳儀)의 효행에 대해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담로(李聃老) 등은 고성(固城)의 고 사인 김경철(金景喆)의 처 심씨(沈氏)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노석윤(盧錫允) 등은 함양의 고 사인 이재용(李再容)의 처 김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권형국(權衡國) 등은 영천(榮川)의 증 이조참의 나이준(羅以俊)의 충의를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종호(金鍾壕) 등은 진주의 유학 강도걸(姜道傑)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유진휘(柳進徽) 등은 함안(咸安)의 이합(李佮)의 순절(殉節)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서정곤(徐鼎坤) 등은 대구의 고 학생 이춘흥(李春興)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용규(李容圭) 등은 고성(固城)의 고 학생 최흥종(崔興宗)과 그의 아들 최치로(崔致魯)ㆍ최치헌(崔致巘)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서문해(徐文海) 등은 영천(永川)의 고 사인 배성규(裵聖圭)의 처 최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이금(李錦) 등은 개녕(開寧)의 사인 윤중립(尹重立)의 어머니 임씨(林氏)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윤후규(尹厚逵) 등은 합천의 고 사인 정운하(鄭雲夏)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생원 곽서곤(郭書坤) 등은 함종(咸從)의 고 학생 안국장(安國章)의 효성과 학문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하계현(河啓賢) 등은 진주의 고 부사 성동일(成東一)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권호(權琥) 등은 현풍(玄風)의 고 효자 곽기치(郭期致)의 효행에 대하여 관직을 추증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정수진(鄭樹震) 등은 성주(星州)의 고 학생 김학영(金鶴永)의 처 최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규응(金奎應) 등은 함안의 고 처사 조영휘(趙永輝)의 효성과 학문에 대하여 관직을 추증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평안도 진사 조석조(趙錫祖) 등은 정주(定州)의 고 학생 백채오(白采五)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응휴(金膺休) 등은 평양의 고 사인 양우하(楊遇夏)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헌철(金憲喆) 등은 정주의 고 학생 이유엽(李有燁)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문관형(文觀衡) 등은 의주의 유학 백사훈(白思壎)의 처 장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김경린(金敬麟) 등은 평양의 고 사인 강낙항(姜樂恒)의 처 오씨의 열행과 그 아들 강익환(姜益煥)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박내영(朴乃英) 등은 평양의 사인 석용려(石用礪)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창운(李昌運) 등은 중화(中和)의 고 학생 이기현(李基鉉)의 처 이씨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조관기(趙觀箕) 등은 의주의 고 학생 백환규(白煥圭)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임정주(林●柱) 등은 평양의 고 학생 김한계(金漢繼)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김정훈(金鼎薰) 등은 평양의 고 첨지 박진규(朴振糾)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이창운(李昌運) 등은 중화(中和)의 고 학생 김치련(金致璉)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진사 박종권(朴宗權) 등은 평양의 고 학생 장대숙(張大淑)의 효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함경도 유학 박예근(朴禮根) 등은 북청(北靑)의 고 학생 김윤협(金允協)의 처 민씨(閔氏)의 열행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고, 유학 윤치묵(尹致默) 등은 영흥의 조계송(趙啓宋)의 처 배씨의 효열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모두 한성부ㆍ팔도ㆍ3도(三都)에 이문하여, 실적에 대하여 자세하게 탐지해서 일일이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게 한 뒤에 품처하려고 합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첫댓글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에 효자 정려가 있습니다